휴학하고 홀로 동해바다에 간 일이 있습니다.

by john ater




휴학하고 홀로 동해바다에 간 일이 있습니다. 해질 저녁 즈음에 사천해변에 도착해서 해변을 걷고 있었어요.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저밖에 없었지요. 근데 저 멀리서 하얀 로브, 그니까 커튼 같은 긴 천을 두른 어떤 남자가 걸어오고 있는 겁니다. 맨발로.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서 피해 가려고 옆으로 비껴 걸었어요. 물론 궁금해서 힐끗 쳐다보긴 했죠. 서양사람이더라구요. 그러다 그가 제 바로 옆을 지나가는 찰나, 그 남자가 저를 노려보며 말하더라구요.

“너 자신을 알라!”

“네!?”

“너 자신을 알라고!”

“아, 예......”

무서워서 대충 대답하니까, 그때부터 계속 쫓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누군데”

아 모르겠다고, 하면서 해변 너머 팬션촌이 있는 곳까지 도망쳤는데 계속 따라오시는 거예요.

“너 자신을 알고 있다고 했잖아. 너 씨발 나한테 구라 친 거야?”

그 아저씨가 무슨 그리스인처럼 이국적인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런 구수한 욕을 하니까 엄청 낯설면서 또 무섭고...여튼 묘한 기분으로 아저씨를 떼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근데 그때 그 아저씨가

“네가 모른다고 인정하면 네게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지혜가 뭔지 궁금해서, “네. 저 제 자신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까

그 아저씨가

“맞네 씨발 나한테 구라친거. 아깐 안다며”

그때부터 화가 너무 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냥 집에 가시라고, 경찰 부르기 전에 가시라고 나긋나긋 경고했습니다.

그러더니 “나랑 같이 토론 좀 해보지 않을래?” 라고 자꾸 묻더니, 계속 거절하니까 순순히 가데요?

‘별의 별 미친놈을 다 만났구나’, ‘액땜 했다’라고 여기고 돌아서서 제 숙소로 걸어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그 아저씨가 수산물 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한동안 잊고 살았고, 저는 복학해서 학교생활을 다시 했습니다. 그러다가 철학 수업을 들을일이 있었는데, 소크라테스가 그때 그 아저씨랑 똑같이 생겼더라고요.

요새 자소서를 쓰는데, 저는 제가 누군지 정말 모르겠어서 그 아저씨 생각이 다시 나요.

그때 아저씨랑 소주 한잔하면서 얘기 좀 했으면 저는 제가 누군지 알았을까요? 아니면 소주 마시다 싸워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까요?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는데, 그 아저씨가 소크라테스였다면 소주 먹다 숨졌을 겁니다. 저 술 무지 세거든요.





본 글은 예전 라이터스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할 당시에, 짧은 시간안에 앉은 자리에서 한편의 글(초 단편 소설)을 완성하는 훈련(?)을 해보면서 쓴 글이다. 2019년 3월에 썼는데, 2017년 즈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 하면서 글에 기웃 기웃 거리던 시절이었다.


오늘(2025년 10월) 매주 가고 있는 일렉 기타 수업에서, 기타 선생님께서 속한 밴드의 앨범이 얼마전 발매 되었다고 노래를 들려 주셨다.


노래의 분위기도 한 몫하긴 했지만, 선생님 얼굴에 담겨 있는 설레임과 두려움이 참 보기 좋았다.


이렇듯 세상의 시선에서는 무용하다고 보이는 것들을 책임감 있게 해 나가는 이들을 보면, 존경스러워 자연스레 응원하게 된다.


오늘 이 글을 우연히 보면서,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건 아닐까 싶다.


물론, 기타 선생님의 "즐겁긴 하지만 결과가 나와야 해요" 란 말처럼, 정작 그 일들을 해나가는 당사자 일때는 그 찬란함이 느껴지지 않았던게 참 안타깝다. 하지만 그게 또 인생의 묘미이자 재미인게 아닌가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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