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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by 존치즈버거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 더 멋지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사랑’ 말고는 대체할 단어가 없었다. 사랑, 사랑, 사랑. 남자는 사탕처럼 그 말을 매일 혀 안에서 굴렸다.


사랑이 대체 뭘까? 여자가 새초롬한 얼굴로 말할 때면 남자는 어쩐지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옆에 생생한 사랑이 있는데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그녀는 정말이지 잔인하다고.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여자는 조용히 웃으며 남자를 안아주었다.


여자와 남자의 키가 자라고 두 사람이 함께 하던 공간이 예전만큼 편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여자를 따라다니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꼈으며 자신들이 원하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는 신발을 갈아 신었고 예전만큼 오래도록 공간 안에 머물지 않았다. 밤이면 여자는 돌아왔지만 남자는 여자를 믿지 않았다. 여자가 손을 내밀어도 남자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다만 여자의 약속을 시험하면서.


여자의 가닿는 반경은 점점 넓어졌다.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장악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스스로를 사랑했다. 그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 이상했다. 내내 유지되는 온도. 좀처럼 기울지 않는 마음의 추. 단정하고 바른 일직선. 남자는 한 번쯤은 자신들의 사랑이 불공평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녀의 곧은 선이 중심을 잃고 하염없이 자신에게로 쏟아지기를.


남자는 오랜 밤을 고민했다. 자기 혀 속에 단단한 나사를 박아 로프를 고정하고 질긴 올가미를 만들어 여자를 가두기로. 말하고 먹고 침을 흘리며 자는 순간까지도 여자를 밧줄에 매달아 놓기로. 남자는 오래도록 입안에서 굴리던 사랑을 툭 뱉어낸 뒤 의심 없이 다가오는 여자를 동여맸다. 여자가 발버둥을 칠수록 남자의 입은 추하게 벌어졌다. 여자는 남자의 혀 끝에 매달려 매일 끌려다녔고 끌려간 만큼 구석구석 닳아버렸다. 여자의 몸은 점점 작아졌고 그럴수록 남자는 점점 가뿐해졌다. 어느 날 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고 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사랑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술에 취한 다음 로프를 뺐다. 구멍이 뚫린 혀 중앙이 썩어있었다.


남자의 썩어버린 혀는 조금씩 아물었지만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남자는 새로운 여자들을 만났지만 한결같이 그의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 남자는 아쉽지 않았다. 이별은 할수록 능숙해지니까. 홀로 남은 밤이면 불현듯 찾아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위로해줬으니까.






“뽑아야 할 거 같습니다.”


남자가 난생처음 치과를 찾았을 때 의사는 구멍 뚫린 혀보다 완전히 썩어버린 그의 안쪽 어금니에 더 놀랐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 의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의 어금니를 뽑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 여자가 있었다. 새끼손톱의 반만 한 크기로 줄어든 그녀는 그의 어금니 뿌리 안에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너무 작아졌거든. 머물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


여자는 태연하게 말하며 구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을 달래던 목소리가 자신의 환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장가를 불러주고 이불을 덮으라 말해주고 가끔은 대신 울어주던 목소리. 남자는 현미경을 가지고 와 여자를 올려놓았다. 확대된 여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늙어있었다.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한 탓에 생기를 잃었고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라있었다.


남자는 이가 빠진 곳을 혀로 핥았다. 있어야 할 곳에 무언가 빠진 것이 어색하면서도 비어 있는 그 자리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 이런 건가, 남자는 새삼 오래된 말을 곱씹으며 상쾌함을 느꼈다.


“앞으로 어떡할 거야?”


남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여자는 재빠르게 그의 몸을 타고 올라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빠진 이가 있던 자리에 뿌리박았다.


“아앗.”


남자는 전에 없던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이젠 여기가 내 자리인 걸?”


단단히 뿌리 박힌 여자는 아무리 뽑아도 뽑히지 않았다. 의사들은 잇몸 사이에서 눈을 똑바로 뜬 그녀를 보자 기겁을 했다. 아무도 손 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예전보다 더 가깝고 더 생생하며 더 크게 여자를 느껴야 했다. 마음대로 남자의 입 안을 헤집고 다니며 고함치는 여자는 이제 그의 입 속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의 모든 것은 그녀의 지시 아래 움직였다. 그는 이제 영원히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었다.


“이게 네가 바라던 바 아니야?”


여자는 매일 밤 속삭였고 남자는 영원히 잠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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