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아직 안 일어나고 뭐 해?”
남자는 잠결에 여자의 전화를 받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기 있잖아…….”
“응, 말해.”
“우리 헤어진 거 아니었어?”
“응? 무슨 소리야?”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었고 저의 따위는 숨기지 않은 말간 목소리였다.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어젯밤 술기운을 빌려 진심을 고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너무 취해서 아니면 여자가 너무 취해서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새로 오픈한 식당을 가보자며 남자를 재촉했다. 남자는 망설였으나 상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얼른 씻고 여자를 만나러 갔다. 여자가 멀리서 다가오는 그를 보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겨우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추천 메뉴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어제 술 많이 취했어?”
“어제? 아니, 그렇게 취하진 않았는데.”
“그런데 왜 기억 못 해?”
“뭘?”
“우리 헤어지기로 했잖아.”
“그랬나?”
남자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입을 오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허공을 가르며 좌우를 가르는 고갯짓.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그녀의 표정. 남자는 그게 싫었다.
“자기가 그랬잖아. 내가 통 넓은 바지를 입는 게, 숟가락이랑 젓가락을 한 번에 잡는 게, 여러 번 가지 않은 길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게, 하품하면서 소리를 내는 게 싫다고.”
“그래, 그랬지.”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그냥 나의 어떤 점이 싫다고만 했지.”
여자는 여전히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 번에 잡은 채 남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보고 똑똑히 말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제는 내가 필요 없다고. 우리는 여기서 완전히 끝이라고.”
“아……. 하지만 그 말은 너무 심한 거 같은데. 나는 그런 식으로 이별하고 싶지 않아.”
“그런 식?”
“안 좋게 헤어지는 거 말이야.”
“좋은 이별이라는 게 있어?”
“그러니까…… 좋게 마무리하는 거 말이야. 지금처럼 맛있는 밥을 먹고 웃으면서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는 그런 거 있잖아.”
여자는 마지막 남은 카레를 꼼꼼하게 씹어 삼킨 뒤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렇지만…… 사랑하는 것 같진 않아.”
남자는 차마 여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잖아. 종말을 고하는데 확실히 내다 버릴 각오 정도는 했어야지. 아무튼 자기 마음을 잘 생각해봐, 나랑 이별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테니까.”
“뭘 또 종말씩이나?”
아무것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남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자를 생각했다. 여자의 말을 생각했다. 교묘하게 말꼬리를 잡는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을까? 사랑하는 것 같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과 같을까?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어지러이 흩뜨려 놓는 ‘-것 같다’의 세계를 유영하며 오래 잠들지 못했다.
여자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의 안부를 확인하고 자신의 일상을 공유했다. 자동 활성화된 게임처럼 로그아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자는 스스로 작동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좀 한심하게 느껴지면서도 여자의 말대로 그 커다란 눈망울에 똑바로 대고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다고, 네가 필요 없다고, 이제 내 인생에서 퇴장하라고 말을 하려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상대방이 먼저 스위치를 끌 때까지 절대 마음을 멈추지 않아.’ 남자는 사랑이 싹텄던 파릇파릇한 나날들을 떠올렸다. 고백을 신중히 하라던 여자는 며칠 동안의 시간을 끈 끝에 남자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했었다. 그때만 해도 낭만적이라 생각했던 말이 씁쓸한 기운을 내뿜으며 남자의 머릿속에 퍼져나갔다.
“거기서 봐.”
남자는 여자가 신기했다. 반쯤 떠나버린 마음을 알면서도 천진난만하게 그와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는 것이. 망설이는 남자는 약속에 자주 늦었고 그녀는 늘 그를 기다렸다. 여자는 해사하게 웃었고 그럴 때마다 남자의 시야는 자꾸만 흐려졌다. 혼탁하게 가라앉는 마음. 남자는 자신이 유예하고 있는 것이 이별인지 아니면 확실한 말들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마음들인지 알 수 없었다. ‘남다른 면이 좋긴 했지.’ 어떻게든 자신을 견디는 여자를 보며 남자도 마음을 다 잡으려 했지만 여자의 장점 뒤에 언제나 ‘하지만……’이 붙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게추는 점점 기울어졌고 무거움이 아둔함인 듯 가벼움이 권력인 듯 남자는 자꾸만 여자 앞에 어깃장을 놓고 시선을 외면했다. 어차피 나쁜 쪽이 되어야 한다면 제 풀에 지쳐 끊어내기 위해. 그럭저럭 만나면서도 여자의 꾸준함이 미련해 보이던 어느 날 남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불쾌한 땀을 닦으며 비로소 말을 했다.
“널 사랑하지 않아. 이젠 네가 필요 없어. 이제 그만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줘.”
입을 열자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 말들을 해낼 수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아예 안 든 건 아니지만 여자 쪽에서 원한 말이기도 했으니까. 남자는 둘을 위해서도 언젠가 해야 할 말이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진심이지? 그 말.”
“응.”
“번복은 불가능해.”
“그래, 오래 고민했어.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아니야. 사랑이 영원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
그간 자신이 여자에게 했던 무수한 영원의 맹세들이 떠올랐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그 맹세를 깨버려서 인지 여자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해서인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갈까?”
“아니.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게 있어.”
“또 뭐가?”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자를 재빨리 훑었다. 그간 주고받은 선물을 정리하자는 건가? 담담한 얼굴이지만 사실은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려는 건가? 아니면 성숙한 어른처럼 악수라도 청하려는 건가? 이런저런 불상사를 떠올리면서도 남자는 내심 여자가 친구로 지내자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담담하니 이미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연인으로는 끝이지만 친구로서는 나쁘지 않다는 그간의 생각을 제가 먼저 입 밖으로 꺼내려는 찰나 갑자기 여자가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꺼야지.”
“뭘?”
“스위치.”
“뭐? 스위치?”
남자는 여자의 행동을 먼저 막아서야 할지 여자의 대답을 먼저 이해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재빠른 여자의 손길이 단추를 모두 풀고 하얀 가슴팍을 드러내고 있었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잘 마무리된 거 아니었어? 갑자기 이게 뭐 하는 거야? 이럴 거면 차라리 우리 집으로 가서……”
남자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자가 날카로운 칼날로 자신의 가슴팍을 그었다.
“으악.”
남자는 여자를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단말마의 고통이 느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피를 흐르는 사이로 보이는 불빛. 여자가 제 손으로 벌어진 살점을 헤치자 스위치가 보였다.
“이게 뭐야?”
“스위치. 내가 말했잖아.”
여자는 이별할 때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제 가슴을 남자 쪽으로 내밀었다.
“난… 난… 아니 이게…….”
남자가 뒷걸음을 쳤다.
“이 정도 각오도 없이 이별을 말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어서 눌러. 스위치를 켠 사람이 스위치를 꺼야 해.”
그게 무슨 당연한 룰이라도 된다는 듯 여자가 재촉했다. 많은 날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고 명랑하게 읊조리는 심장의 박동을 들어왔다. 그 소리에 어슴푸레 잠이 들던 날이 수백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자의 가슴속에 정말 스위치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는 이제 자신의 아둔함을 탓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서. 꺼줘.”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스위치에 손가락을 올렸다. 심장 부근이 너덜너덜하게 닳아 있는 것을 보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딸깍 소리와 함께 스위치가 꺼지자 반짝이던 불빛도 사그라들었다. 여자의 몸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만 더 부탁하자. 이것 좀 그냥 떼 줄래? 이젠 나도 지쳤어. 몇 번이나 가슴을 뜯었지만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늘 지긋지긋해. 마음에 스위치가 없다면 끌 필요도 없으니까.”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아 다시 스위치에 갖다 댔다. 남자는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고 스위치를 떼기 전까지는 절대 보내주지 않겠다고 그녀의 악력이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 스위치를 떼어냈다. 여자의 가슴팍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여자는 냅킨으로 대충 피를 닦았다. 벌어진 가슴 사이가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가슴으로 여자는 이내 미소를 짓더니 묵은 떼를 벗겨낸 개운한 사람의 모양으로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남자는 다리가 풀려 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따가운 햇살이 그의 손바닥으로 속절없이 내리 쏟아졌다. 온통 피로 물든 제 손을 바라보다 혹여나 여자가 무사할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만 보일 뿐 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남자는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고 피만큼이나 선명하게 남아 있는 여자의 온기를 자꾸만 쥐었다 펴보았다.
손에 묻은 핏자국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의 곁에서 사라졌지만 남자는 검붉은 얼룩을 볼 때면 그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외로울 때면 책상 서랍 깊숙이 감춘 여자의 스위치를 홀로 껐다 켜길 반복했다. 비어버린 여자의 가슴에는 스위치 대신 무엇이 자라났을까 조용히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