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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by 존치즈버거

오늘도 종지판씨는 극렬한 두통 속에서 잠을 깼다. 얼마 전 어머니께서 고추를 드실 때 그 속의 씨를 솎아내는 모습을 본 후로 매일 밤 고추씨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꿈을 꾸고 있다. 종지판씨는 조그마한 동그라미의 집합을 금속 책상의 모서리만큼이나 싫어한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 성향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고추씨를 정렬하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혈연에 대한 배신을 느꼈다.


종지판씨는 큰일을 보기 위해 담뱃갑을 열어젖혔다. 젠장. 어젯밤 눈물로써 아버지에게 돛대를 빼앗긴 일이 생각났다. 그는 담배 없이 똥을 싸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터질 것 같은 대장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고 슈퍼에 얼른 다녀왔다. 문 앞에 다다르자 비로소 아랫배에 힘이 풀리며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그는 변기 위에 앉아 생각했다. ‘아, 사소한 것들에서 오는 이 극심한 고통은 나의 똥덩어리보다 묵직하고 고약한 것들이라.’


단순히 지나쳐도 좋을 것들. 한낱 사소함을 너무나도 세심하게 받아들인 탓에 지판씨는 23살에 아끼고 아끼던 첫사랑과 이별을 하게 되었다. 지판씨는 아름다운 그녀의 발가락에 난 굵은 털 자락들이 너무나 미웠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발가락의 제모를 권유하였으나 그녀는 매몰찬 목소리로 “쌍놈의 변태 새끼”라는 말을 남긴 채 이별의 종지부를 찍었다.


지판씨는 가끔 정신적 교란을 느끼기도 했고 시공을 초월하여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다행히 공부에는 소질이 있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 그지 않는 대기업에도 한 번에 입사하게 되었으나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던 남 과장의 금속성 책상 모서리를 견디지 못하고 멱살잡이 끝에 퇴사를 권고당했다. 지판씨는 완치되지 않아도 좋으니 자신이 제발 사소한 것들이 주는 극한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랬다. 수를 써서 신앙에 의지해보려 했으나 항상 끝을 끌어내리는 목사의 말투가 싫어서 하느님마저 미워졌다.


지판씨의 증세가 이렇듯 심각해지자 어느덧 가정에서조차 서서히 따돌림당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지판씨를 남부끄러워하셨고 그가 업어 키운 동생마저 형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지판씨는 견디기 힘들어졌다. 자신이 발견한 오점은 그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오로지 그만의 ‘싫음’이었다. 지판씨는 오랜 고민 끝에 업계에서 소문난 신경정신과를 방문하기로 했다. 병원 특유의 의약품 냄새를 싫어하는 지판씨는 방독면을 구입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다행히 정신과에서는 사람들의 냄새만이 느껴졌다. 십여분의 시간이 흐르고 지판씨는 의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의사에게 대충의 증상을 설명해 보였다. 그러나 의사는 명쾌한 병명 대신에 헛기침만을 내놓았다.


“네, 네 종지판씨. 음, 아마도 기한 두고 오래 상담을 받아봐야겠습니다. 차근차근 진행해보죠. 그럼 일단 지판씨가 그렇게 못 견디겠다는 것들은 무엇이죠?”


지판씨는 조금의 침묵도 두지 않고 곧이 말을 받았다.


“아, 싫은 것들 많은데 정말 싫은 게 있어요. 그건 국을 펐을 때 숟가락 밑에 맺히는 작은 방울입니다. 전 그걸 없애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국 퍼기를 시도해봤지만 언제나 숟가락 밑에는 대롱대롱 그 방울이 맺혔어요. 달리 방도가 없어서 국을 푸고 나면 숟가락 밑부분을 먼저 혀로 핥아먹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해요. 그래서 전 다른 사람과 밥을 먹지 않아요. 누군가 국을 풀 때면 그게 자꾸 신경 쓰여서 제대로 식사를 못하거든요.”


“아....... 심지어 가족과도 말이죠? 음, 숟가락 밑에 방울이라.”


지판씨는 의사의 ‘심지어’라는 말투가 거슬렸다.


“물론이죠.”


의사는 지판씨를 향해 턱을 괴고 있던 몸을 슬며시 등받이 쪽으로 치밀어 넣었다.


“또 다른 싫은 것들은 무엇이죠? 그것들도 국에 관련된 것입니까?”


“아, 아뇨. 또 제가 싫어하는 건 책갈피를 꽂지 않은 채 그저 책 표지 부분을 이용해 읽은 곳까지를 표시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책의 모양이 이상해지기 때문이죠. 아, 그리고 무언가 촘촘한 무늬는 너무나도 싫습니다. 가끔 길을 걷다 그런 무늬를 발견하면 모조리 뜯어버리고 싶어요. 며칠 전엔 집에 도배를 새로 했는데 세상에 어머니께서 제 방 벽지를 그런 무늬로 해놓으신 겁니다. 역겨웠죠. 다행히 그 무늬가 손으로 긁으면 떨어지는 것들이라 3일 밤을 새 가면서 그 무늬들을 죄다 민무늬로 바꾸어 놓았어요.”


지판씨의 말이 끝나자 의사는 또다시 침묵을 강행했다. 그가 안쓰러워 보이긴 하였지만 또 싫은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그 결과가 더 갸우뚱 해질 것 같아 의사는 짧은 시간 동안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려 고심했다. 의사는 다행히 지판씨가 이런 생활을 통해 우울증까지 키워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의사는 일단 신경증 약을 처방하였다. 지판씨는 의사에게 차도를 보아 또 찾아뵙겠노라 다짐을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들어갔다. 약사는 그를 한번 훑어내려 갔으나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으므로 대단한 약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판씨는 주황색 병 안에 든 알약들을 손에 쥐었다. 어머나, 이럴 수가, 젠장, 수많은 욕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알약은 전부 다 빨간색들이었다. 병이 주황색이라 알약들이 발그스름하게 보일 거란 그의 바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약의 색깔은 선명한 빨간색이었다. 지판씨는 차마 그 알약들을 입에 털어 넣을 수가 없었다. 지판씨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새빨간 캡슐의 알약이었기 때문이다. 지판씨는 빨간 알약들이 몸속으로 퍼져나가 위 속을 모조리 빨갛게 만들어버릴 거란 생각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알약들만 삼키면 나을 것 같은데. 왜 하필 빨간색인 거지?’ 지판씨는 다시 그 약국을 찾아갔다. 약사를 향해 다짜고짜 이 약의 색깔은 빨간 것이 전부냐고 물어보았다. 약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말했다. 지판씨는 길을 걸으며 오늘이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한 날이라고 되뇌었다.


지판씨가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은 마침 저녁식사 중이었다. 죄다 숟가락 밑의 방울은 개의치 않고 국을 퍼먹고 있었다. 지판씨는 식은땀을 흘리며 제 방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갔다. 가방 안에서 약을 꺼내고서는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침대 모퉁이에 몸을 의지해 그것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 나는 이겨내야 한다. 저 약을 먹자. 저 약은 분명히 나의 삶에 새로운 빛을 가져다줄 것이다. 봐라. 빨간색이다. 빨강은 태양의 색이다. 태양은 빛이다. 그래 나는 저 약을 먹고 갱생한다. 먹자. 이겨내자.’ 지판씨는 현기증을 느꼈지만 굴하지 않고 약을 향해 주문을 걸었다. 그러나 그가 알약을 입에 넣는 순간 빨강에 연관된 해로운 장면들이 그를 덮쳐왔다. 도살당하는 소에게서 흐르는 피, 유태인 학살, 트럼프와 광신도들, 드라큘라. 지판씨는 그 위기의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약을 뱉어버렸다.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지판씨는 그 빨간 캡슐들을 다 뜯어내고 그 속의 가루를 먹기로 결심했다. 캡슐은 대단히 빡빡했다. 뜯다 뜯다 지친 지판씨는 문득 자신이 이겨내야 할 것들은 이따위 빨간 캡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갸우뚱한 의사선생의 표정도 생각났다. ‘종지판은 구제불능, 망할 인간, 쓰레기.’ 그의 뇌리에는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지판씨 또한 그 단어에 동조하고 있었다. 결심한 것을 주저하는 모양새 또한 끔찍해하던 지판씨는 그대로 제 방 창문을 열고 두 팔을 벌린 채 낙하했다.


조명 아래 비친 바닥에는 지면을 장식하는 각양각색의 돌판이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었다. 지판씨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 난삽함에 기겁해 몸을 틀었다. 웅대한 삼나무 가지에 몸이 걸린 지판씨는 대롱대롱 매달린 채 죽음마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설움에 오래도록 목 놓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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