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는 절대 들어오지 마요. 그럼 죽여 버릴 거야.”
뭐 이런 끔찍하게 귀여운 협박이 다 있나 싶었다. 남자는 애초에 부엌에 들어갈 생각 따위는 없어서 손에 물 안 묻히겠다는 바보 같은 약속 따위도 하지 않았다. 살면서 제 손으로 물 한 잔 떠다 먹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완고하고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는 공포로 주변을 순응하게 만들었다. 모든 가정이 이렇게 살 거라고 믿었던 남자는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신이 조금 특별한 가정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교에서 급식을 먹지 않는 건 자신이 유일했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남자의 도시락을 싸주었다. 친구들은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에. 신부가 제정신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천연기념물이다. 이 새끼는 진짜.”
음식물 쓰레기는커녕 자신의 빨래를 개는 일도 해보지 않았다는 남자의 말에 친구들은 경악했다. 그런 식으로 결혼 생활이 유지된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 병시중 와이프가 다 했는데 잘 좀 챙겨줘.”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네가 아버지 병명이 뭔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속으로 뜨악했다.”
“그거야 와이프가 자기가 알아서 다 한다고 했으니까. 나야 뭘 아나. 우리 어머니 아프셨을 때도 이모랑 간병인이 다 했고.”
친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남자를 탓하는 와중에도 자신들은 절대 누릴 수 없는 안락한 결혼 생활에 대한 경외와 탄식을 섞었다. 아내 말을 잘 들어야 목숨을 부지한다 믿는 불쌍한 녀석들. 남자는 속으로 경멸하며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고 모종의 우월감마저 느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줘도 불평 한 마디 없었고 아버지를 돌보는 와중에도 매끼 자신의 식사를 챙겼으며 살뜰히 살림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관리했다. 어디 데리고 가 창피한 적이 없을 만큼 스스로를 잘 단장했다. 친정이 없으니 신경 쓸 장인과 장모가 없었고 이제는 저를 쥐고 흔들던 아버지마저 떠났으니 그야말로 자신의 세상이었다. 남자가 이야기할수록 친구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설 속 용을 만나기라도 한 듯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상에 제수씨 같은 사람 없다.”
술값을 계산하는 남자의 등을 두드리며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남자는 비로소 자신이 당연하지 않은 매일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여자라고만 생각했던 아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여자라고 생각하니 새삼 자신의 인생이 퍽이나 훌륭하지 않냐는 기분마저 들었다. 남자가 집으로 가자 아내가 옅은 미소와 함께 직접 우린 차를 내밀었다. 남자는 차를 마신 뒤 까무룩 잠이 들었고 일어났을 땐 자신의 모든 것이 완벽히 정돈되어 있었다.
“여보?”
식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점심은 집에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남자는 휑한 기운에 망연자실했다. 생각해보니 아내가 낮에 어디 봉사를 하러 간다는 기억이 났다. 모처럼 점심으로 집밥을 원했는데, 애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러 나간 아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생각 없이 쇼핑이나 해대는 타입은 아니라는 생각에 작은 위안이 밀려왔다. 남들과 한 약속은 미뤄도 밥때를 놓치는 일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던 남자는 부엌에는 발도 들이지 말라는 아내와의 약속을 깨기로 했다. 아무리 자신이 천연기념물이래도 이 정도 수고는 할 수 있는 아량이 있었으니까. 남자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결혼한 이래로 정말 부엌에 들어가 본 기억이 없었다. 밥과 반찬이 있었지만 뜨끈한 국물이 필요했던 남자는 라면을 찾기 위해 찬장을 뒤졌다. 선반에는 그릇과 요리 도구만이 가득했다. 처음 들어간 매장을 뒤지듯 남자는 완벽한 아내의 영역에서 헤맸다.
“아무래도 여기가 아닌가?”
남자는 검은색 커튼이 쳐진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엌 바로 옆 팬트리로 쓰는 지하실 통로가 정말이지 생경한 관문 같았다. 어색하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낮이었음에도 안은 어두웠다. 생각보다 안이 깊었다. 선반에는 휴지와 치약, 청소도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생필품이 있었다.
“라면 하나 먹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남자는 조금씩 짜증이 밀려왔다. 고지혈증과 동맥경화의 위험이 있으니 어쩌면 아내는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라면을 깊이 숨겨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향해 내려갔다. 통로가 어두워서인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스위치가 어디 있는 거야?”
벽을 더듬거리다 스위치 불을 켰다. 그리고 남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지하실 팬트리는 마치 명품 매장의 쇼룸 같았다. 선반에는 온갖 명품 가방들과 신발이 차례대로 정렬되어 있었다.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 사태를 파악했다. 그래, 어쩐지 너무 완벽하다고만 생각했다, 아내에게도 나름의 재미는 있어야지, 재미치곤 너무 고가인데, 이 여자가 재테크에도 재능이 있었나. 남자는 어지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수습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발에 무언가 걸렸다. 검은 보스턴백. 발로 툭툭 쳤다. 둔중한 느낌. 남자는 조심스레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는 돈다발과 함께 수많은 여권과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의 주인이 다 달랐다. 남자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닫혀 있는 문들도 열어보았다. 헉소리 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문 킬러라고 여겨도 무방할 온갖 무기들 사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약품들. 위독성을 표시하는 해골의 그림을 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었다. 냄새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묘한 포도향. 병환 직후부터 아버지에게서 풍겨 나오던 냄새. 고개를 돌리는데 선반 저 안쪽 유리병이 빛에 반사되어 보였다. 포르말린 용액 안에 얼마 전 실종된 국회의원의 머리통이 있었다. 그 옆에는 손가락, 그 옆에는 발. 모두 영롱한 유리병에 네임텍을 달고서 가지런히 정돈되어.
“내가 부엌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불현듯 남자의 어깨를 잡은 손길에 그만 바지춤이 축축하게 젖어 오기 시작했다. 아내의 손, 아니 아내라고 믿었던 여자의 손. 남자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엌에 들어오면 죽여 버린 다는 말이 어쩌면 진심일지도 몰랐다.
악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남자의 머리통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뭐가 떨어진다니까?”
여자가 무심히 피 묻은 칼날을 키친타월로 닦아내며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