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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Oct 18. 2023

나를 위한 깊은 구덩이

열한 번째


  

 나는 가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혼자 방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간다. 일명 공부방-이라고 부르나 남편은 주로 게임과 잔업을, 딸은 로블록스를,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곳-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내 책상 위에 있는 노란 불빛이 나오는 스탠드 조명을 촛불 대신 켜놓고서. 따뜻하다 못해 김이 펄펄 나는 아메리카노도 한 잔 준비해 두고 말이다.      


 딱히 거창한 무얼 하는 건 아니다. 일단 유튜브 창을 3개 띄운다. 나는 유튜브를 거의 asmr 듣기용으로 사용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는 타자기 소리와 풀벌레 울음이 섞인 장작 타는 소리다. 마지막으로는 재즈 플레이리스트다. 재즈에 정통한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들어야 한다면 어김없이 재즈를 선택하는 편이다. 나는 이 3가지를 동시에 틀어놓는다. 성수동 핫플레이스가 부럽지 않은 나만의 천국이 완성된다.     


 내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은 뒤에는 얇은 담요를 무릎에 올린다. 그리고 책상 앞 컴퓨터용 의자에 나비 다리를 하고 앉아서 한 시간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지된 사물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누구에게 보여 줄 만한 만들어진 표정 없이 그냥 나 자체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안 막힌 곳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그야말로 해방이 시작된다. 매우 사적이고 정적인 해방.      


 이런 시간을 갖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한 깊은 구덩이를 파기 위해서다. 남들이 알 수 없는 나의 심연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눈가에 잡힌 잔주름까지 훤히 보이는 낮 시간, 멀쩡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장착했던 긍정의 갑옷을 방구석에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내 안으로 침잠한다. 막연하게 짐작하고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환희, 슬픔과 고통, 우울과 불안을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지만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누가 나보다 더 깊이 내 안으로 가라앉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라고 하고 그것을 위한 온갖 긍정의 소품을 준비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긍정은 단지 긍정을 위한 긍정일 뿐 진짜 긍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빛을 빛이라고 인지하기 위해선 충분한 어둠 속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둠 그 자체만이 아니라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의 과정 또한 내게는 중요하다. 어둠을 이해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진짜 빛을 볼 수 있다고 여긴다. 진짜 긍정은 어둠을 뚫고서도 빛으로 나아가려는 힘 그 자체라 믿기에. 나는 맨손으로 어둠의 벽면을 더듬어나가며 지도를 그린다. 언제고 이곳에서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구덩이를 파는 일은 간단하다. 그냥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만족하는가, 기쁜가, 슬픈가, 완성했는가, 실패했는가, 계속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뒤돌아 보는가, 외면하는가, 배부른가, 허기지는가,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 그중 가장 빈번한 감정은 무엇인가. 사진첩을 넘기듯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의 조각을 훑고 나면 반드시 걸리는 부분이 있다. 기쁘다면 왜 기쁜지, 슬프다면 왜 슬픈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냥 요즘 그래.”라거나 “나 원래 그렇잖아.”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이유에 대해 말해본다. 특히 우리가 부정적이라 부르는 감정을 다룰 때 이것은 매우 유용하다.      


 단순히 슬프고 지긋지긋하고 짜증 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촉발시킨 진짜 원인을 찾으려 한다. 무얼 할 때 제일 짜증이 나는지, 그 행위 자제가 짜증을 유발하는지 그것의 결과가 짜증을 주는지. 짜증이라는 말이 불안에 가까운지 고됨에 가까운지 같은 것들을 나누고 나누어 계속 생각한다. 감정의 갈래를 나누다 보면 내가 짐작도 못했던 나의 상처와 마주하기도 한다. 남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이 내가 비루하고 궁색해지던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상처받은 나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뭐 어떠랴, 이건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나의 짜증이나 슬픔이 열등감에 가까운지 아니면 실패를 예상한 불안에 가까운지 그도 아니면 원하는 것을 방해받아서 오는 스트레스인지, 이유가 뭐든 나의 감정을 구체적인 이유와 함께 명확한 문장으로 더듬어 나가다 보면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 근사치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나약한 나를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둘러싼 감정의 부스러기를 털어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벼워진다.     


 이건 어쩌면 나라는 인간의 설명서를 작성하는 것과도 같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데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남이 나를 제어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깜깜한 밤에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묘약이라도 만드는 사람처럼 은밀하게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마치 한밤의 수리공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동화책에 나오는 신비로운 마법사처럼 말이다. 온전히 나에게만 통하는 마법. 하지만 그 작은 마법이 나의 세상을 바꾼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그것에 고마움을 느끼지만 나라는 인간의 내면만큼은 온전히 나 자신의 힘으로 돌보고 싶다.  나는 나라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사는 동안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지 않을까? 백 퍼센트 완전하게 나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근사치에 가까울 정도의 이해를 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조금 더 윤택해질 것이다. 선택의 순간은 언제나 느닷없고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그간 쌓아온 지혜와 직관의 힘을 빌려야 한다. 모든 선택은 후회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덜 후회하기 위해선 내가 무엇에 취약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이 은밀한 작업을 멈출 수 없다. 도약하기 위해선 반드시 나의 바닥을 알아야 한다. 나는 내가 쓸 에너지를 이런 식으로 가늠한다.  

   

 혹여 이런 과정이 자기 스스로를 어둠 안에 가두는 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면 나는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시라 말하고 싶다. 구덩이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인터넷 창을 닫고 스탠드를 끄고 주변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가면 된다. 그리고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아침이 아침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여전히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 든다면 그건 위험한 신호다. 그럴 땐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자.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누가 자신을 돌본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를 지켜야 하고 그것은 매일의 잠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 부디 한 번쯤은 깊은 구덩이를 파고 자기 안의 깊이를 재어보자. 뒤죽박죽 얽힌 생각들을 늘어놓은 채 마냥 뒤척이기엔 밤은 너무나도 짧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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