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억이 넘어지듯 내 머릿속에 쏟아질 때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마들렌처럼, 특정 냄새나 소리 혹은 감촉이나 온도 같은 것들이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내 곁을 스쳐 간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 좋았던 시절도 함께. 그리고 이런 식으로 떠오른 친구들은 대부분이 지금 내 옆에 없다. 그들은 떠났거나 아니면 내가 떠났다. 정확히 무엇에서 떠난 것인지 모르게 흐지부지된 관계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게 좀 불편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이 꼭 누군가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 반짝이는 시간을 여전히 기억하는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너 혹은 나를 원망했다. 미워할 대상 없이 상황을 견딜 만큼 나 자신이 성숙하지 못했으니까. 그러고 나면 한바탕 슬퍼졌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특별한 계기가 없이도 내가 그 관계 안에서 무력하거나 지친다면, 굳이 나를 괴롭히면서까지 끌고 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안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 주거니 받거니 미주알고주알 서로를 내보이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와 이야기할 때면 서로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온 듯, 마치 이 친구가 내 마음의 대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각이 비슷했다. 우리는 자랐고 어느덧 어른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아이들이었지만 어쨌든 어른으로 살아가야 했고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치듯 어색하고 불편하게 이런저런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는 조금씩 달라졌다. 서로가 사는 곳도 서 있는 위치도 만나는 사람도 생각도 마음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연락은 줄어들었다. 시간을 내서 만나 수다를 떨어도 회포를 푼다거나 마냥 반갑다는 느낌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늘 개운치 않은 무언가가 마음속에 덜거덕거렸다. 그럴 때면 그 아이와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마치 유체 이탈을 하듯 내 몸에서 쑥 빠져나와 나를 타인으로 두고 그 아이와 내가 대화하는 모습을 찍는 카메라처럼. 미세하게 어긋나는 순간들이 보였다. 예전처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돌았네, 돌았어.”하면서 키득거릴 수 없는, 그러니까 이제는 완전히 그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 삶의 방식과 태도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물론 그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참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그 아이를 아니꼽게 보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히 그런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혔다. 오랜만에 그 아이에게서 연락이 오면 반가웠고 늘 답장도 재빠르게 했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약속을 잡으면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점점 연락이 끊겼다. 나도 그 아이도 서로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창밖의 풍경도 계절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사람이라고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사람의 어떤 부분이 떨어져 나가거나 아주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일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변해버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변하냐가 나를 울적하게 만든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 아이의 말이 나를 할퀴기 시작했다. 우리가 쌓아온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보는 풍경이 달랐고 가고자 하는 길이 달랐고 애호하는 카테고리도 달랐다.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만한 사건은 없었지만, 켜켜이 쌓아온 앙금을 감당할 만큼 나 또한 여유가 없었다. 그간 무수히 이야기하던 가치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의 대변자가 되었던 날들,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이 되자는 약속. 나에겐 여전히 그런 가치들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그런 것은 이제 한낱 위선이고 중요한 건 얼마만큼을 가지고 무엇을 소비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점점 조용해졌다. 마치 수업 시간에 발제를 듣는 사람처럼 상대의 말에 영혼 없는 끄덕임을 반복했다.
만나고 돌아서면 불쾌한 감정을 상대만 탓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무어라고 상대에게 변하길 요구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 날부터 그 아이와의 대화가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퍼지기 시작했다.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슬픔이 내 일상을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일부러 일상을 방해하며 그 슬픔을 끄집어내는 내가 있었다. 결국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린 결정은 그 관계에 휴지기를 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쉼에는 기한이 없겠지만.
대부분의 친구 관계가 그렇듯 정식으로 친구가 되자고 선언하고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기에 정식으로 헤어짐을 말하지도 않았다. 좋은 영화나 책을 보아도 더 이상 추천하지 않게 되었고 맛집이나 쏠쏠한 이벤트에 관한 링크를 보내지 않았고 그 아이의 점심시간에 카톡으로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고 그 아이의 SNS에 들어가 일상을 구경한 뒤 그날 입은 옷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댓글에 달지 않았고 중요한 날을 지나치고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점점 마음속에 그 아이를 지워가면서도 나는 종종 그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가 그렇게 변해버린 세월 동안 겪었을 시간을 생각했다. 내게 툭툭 내던졌던 말들을 힌트 삼아 그 친구가 겪었을 좌절, 고통, 외로움에 대해서 말이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도달하는 메시지가 다른 것처럼 나는 나의 방식대로 그 친구는 그 친구의 방식대로 각자만의 길을 찾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그 아이도 나름대로 인생과 자신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결론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지금의 자신일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 본래 자신이 원하던 어른의 모습이라면 그 아이 입장에서는 축하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와 나의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우리’의 좋았던 시간이 변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은 과거라는 이름으로 마음속에 단단히 봉인되어 있으니까. 다만 좋았던 시간을 간직했다고 해서 나를 해치면서까지 이어 나가야 할 관계가 없음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나와 너를 동시에 손상시키는 고문과도 같았다. 반짝이던 시절이 그립지만 나는 때때로 그것을 꿈에서 만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는 너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둘의 등이 다시 착 붙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일단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저 오늘도 미움 없이 원망 없이 푹 잠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