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올해 봄이었다. 거리에 벚꽃 잎이 난분분했다. 봄바람을 흠뻑 맞으며 아이와 크림이를 데리고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꽃잎이 바람에 뒹굴 때마다 크림이는 정신없이 그 뒤를 쫓아 뛰고 아이는 원을 그리며 자전거로 빙글빙글 도는 제 나름의 묘기를 보여주었다. 한바탕 웃어 젖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완 연결된 자전거 도로 앞에서 멈칫했다.
초록 불이 켜져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바로 옆 자전거 도로에서 자전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크림이를 들어 올렸고 그 과정에서 자전거는 브레이크를 잡아야만 했다. 사고는 없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우리는 그저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너는 중이었고 자전거는 멈춰야 할 곳에 멈췄을 뿐이다. 과실을 따지면 자전거 쪽이었다. 자전거 도로를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연석이 있는 부분과 이어져 있어서 초록 불이 켜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전거 도로를 막아선 채 서 있어야 했다. 그러니 자전거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살피고 반드시 속도를 줄여야 하는 구간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탄 남자는 갑작스러운 그 순간 놀란 가슴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다.
“씨발년이 왜 거기 서 있어, 짜증 나게.”
사실 그 사람은 남자라고도 할 수 없었다. 옆 동네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아이. 어린이 티를 벗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중학교 1학년이나 2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는 너무나도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저 말을 내뱉었다.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 아이가 뱉은 말보다 이게 더 놀라웠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그러니까 감정과 생명이 있는 타인의 느끼면서 모욕의 언어를 내뱉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물론 뉴스에서는 자주 봤다. 외계에서 정체불명의 약을 공기 중에 흩뿌려 지구인들의 뇌를 오염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발생하는 기이하고 괴상한 모욕과 혐오와 다툼에 대해서. 나는 그런 뉴스를 보며 자주 화가 나고 피해자의 감정에 이입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체험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다음 날이면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내게 씨발년을 내뱉은 순간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봄날의 씨발년을 아시나요?
순간 나는 유체 이탈하듯 제삼자의 입장이 되어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씨발년. 씨발년. 자꾸만 곱씹으니 욕이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명 같기도 했고 곡식의 이름 같기도 했다. 말할수록 저 말이 더 생경해져 나는 미친 사람처럼 비실비실 웃었다. 솔직히 딸과 강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아이를 쫓아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횡단보도를 다 걸어왔을 때쯤 바로 옆에 있는 딸에게 물었다.
“혹시 아까 자전거 탄 남자애가 하는 말 들었어?”
즐거운 산책의 여운에 여전히 젖어있던 딸은 해맑은 얼굴로 되물었다.
“아, 아까 자전거 탄 오빠 말이야? 왜? 그 오빠가 뭐라 그랬어?”
아이의 영문 모를 얼굴에 안심이 됐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앞서 가라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점처럼 작아지고 있는 그 남자애의 등을 바라보았다. 내 시야의 끝 코너를 돌아 여린 그 등짝이 밥풀처럼 작아 보일 때까지.
화는 나지 않았다. 저런 말을 내뱉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니까. 나는 얼마 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냉소하고 비꼬고 욕을 하는 건 너무 쉽다고. 그건 자다가도 할 수 있다고. 반면 사랑을 하는 것, 더 나아가 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라고. 그건 매우 지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지고의 영역이라고. 그 아이는 아직 그 지고의 영역으로 갈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난 나보다 훨씬 어린데도 지고의 영역에 속한 사람을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건 나이의 문제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이해해야지 어쩔 수 있나. 그렇지 않으면 미워하고 말 텐데.
제목을 봐서 알겠지만 나는 지금 복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 나 또한 지고의 영역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철없는 어른이긴 마찬가지다. 나는 그 아이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 다만 누구도 다치지 않는 은밀한 복수 말이다.
나는 그날 이후 계속 그 아이를 생각했다. 물론 기억을 지속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이를 닦으며, 설거지를 하며, 10년째 해오고 있는 핸드폰 퍼즐 게임을 하며 혹은 스텝퍼를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아이를 떠올렸다. 까맣고 찰랑거리던 머리칼, 햇빛이 반사되어 빛나던 정수리, 동그랗고 단단해 보이는 뒤통수, 아직 여물지 못한 등과 체육복 같은 교복 위로 선연히 드러나던 등뼈 같은 것들을, 안경을 끼지 않은 얼굴을, 씨발년이라고 말할 때 옹졸해지던 그 입술을.
그 아이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가끔 어떤 이의 최선을 다 한 행복이 사실은 누군가를 향한 복수의 칼날임을 생각하면, 세상에는 예상보다 꽤 많은 복수가 이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아이를 생각하며 그 아이가 누빌 가상의 공간과 삶을 시뮬레이션해본다. 어떤 삶의 과정들이 그 아이의 입에서 그 단어를 말하게 했을까. 감히, 나이도 어린놈이, 뭐 이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가 언젠가 골목길을 돌다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남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의 기원을 나만의 방식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이다. 그 아이의 삶을 책으로 만들었을 때 중학교 이후 챕터에서는 다시는 그 말이 따옴표 안에 쓰이질 않길 바라면서.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그날의 그 장면을 복기한다. 불현듯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힌 어떤 말에 대해. 아이야, 나는 천진한 네 삶의 나락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단다. 그리고 나는 그걸 최대한 오래 보관하고 있을 거야.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의 얼굴 사이에 너의 그 시절을 함께 엮어 사진첩을 만들었어.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가끔 열어보며 그들이 걸어갈 삶의 궤적을 생각하지. 그들은 아마 잊었을 거야. 우리 인생에서 먼지 한 톨이라 부를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가끔 인간은 물리법칙을 거스르고 서로 사이에 시차를 만들어 어떤 찰나를 아주 더딘 슬로 모션으로 만들기도 하지. 미안하게도 나는 꽤 집요해서 네 생각을 멈출 수 없어. 이 사실을 알면 너는 섬뜩하겠지. 그러니 우리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돼.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단어가 존재하고 마음만 먹으면 더 나은 표현으로 당혹감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마음 안에, 감은 눈 안에 복수의 패널을 만들고 그러나 전혀 그들의 불행을 기원하는 일과는 무관하게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나 스스로도 소름 끼치는 순간들이 있다. 단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로. 아니, 세상에 내가 뭐라고. 하지만 이 세계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중 분명 나 같은 사람도 적어도 둘셋쯤은 존재할 텐데, 나도 언제 나 같은 사람을 만날지 모를 일이다. 나의 제일 못난 부분을 구겨 던지는 대신 그걸 손바닥으로 쫙쫙 펴서 고이 간직할 사람말이다. 복수의 칼날을 매일 1미리씩 가는 고집 센 인간을. 그리고 나의 가장 일그러진 얼굴과 나의 가시 같은 말들을 몇 번이고 주워 삼킨다는 것. 나의 나락을 누군가도 지니고 있을 그런 상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착하게 살아야지, 어리숙하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안에 제일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해 아무리 내가 미워도 마지못해 이해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놔야지, 하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최소한만 상처 주자.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얼굴을 잊지 않는 것. 마땅히 기억해야 할 슬픔만큼이나 명확하게 나에게 온 수치를 기억하는 것. 다시 한번 잊지 않는 것. 잊지 않음으로써 그런 인간이 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하는 복수의 방법이다. 누군가의 나락을 거울삼아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 맞다, 나도 좀 제정신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