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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Oct 04. 2023

어? 저기 사랑이 보이네

아홉 번째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은 올해 초에 들어서야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했다. 무려 7살에 사준 자전거로 말이다. 탈것에 느려 5살이 넘어서야 킥보드(일명 씽씽이)를 탄 딸은 뒤늦게 자전거에 재미를 붙여서는 맹연습에 돌입했다. 쉽게 포기할 거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딸은 일주일을 매일 자빠지고 흔들리며 어설프게나마 두발자전거 마스터가 되었다. 자가용이 생긴 탓인지 딸은 기쁨에 들떠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놀이터에 간다고 하면 나나 남편이 따라나서야 했다. 이제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는 용돈으로 버블티도 사 먹고 알아서 친구들과 약속을 정해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놀다 들어온다. 나는 그때 이렇게 글을 쓴다. 세상에, 이런 날이 올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자전거계의 용맹한 날다람쥐가 된 걸 진심으로, 매일같이 기뻐하는 중이다.     


 나는 아이를 너무 어렵게 키웠다. 오해하지 말길. 우리 애만큼 순하고 마음 넓은 아이도 없다. 나는 가끔 딸을 보며 저 작은 몸에 이만큼의 관용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지만 나는 매일 후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영유아기라 불리는 0세부터 만 5세까지 말이다. 나는 엄청나게 낯을 가리는데 누군가가 이 시기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말하면 많이 힘드시죠? 하며 어깨를 두드리는 행위를 용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아이를 돌보면서도 씩씩한 주양육자들을 보면 존경이 절로 샘솟는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얼 해도 잘할 것이란 믿음과 함께.




    


 육아 때문에 힘들어서 운 적은 없다. 나는 눈물 대신-뭐 본래 힘들고 슬프다고 우는 타입은 아니다-식은땀을 흘렸다. 그 시기를 되짚을 때 이제는 많은 것들이 희미하다. 명확한 것은 사시사철 땀을 흘리며 전전긍긍하던 나의 모습뿐이다. 나는 기억력이 꽤 좋고 삶의 여러 순간을 뇌 속에 스냅샷으로 찍어놓는 편이라 자주 그걸 꺼내 보며 추억에 잠기는 사람인데도, 그 시기만큼은 통째로 들어낸 듯 뚝 끊겨 있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이 그 시기를 폐쇄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그곳에 발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복기하는 자체마저 두려움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힘들었다는 말이겠지. 애써 그것들을 기억해 낼 노력은 하지 않는다. 과거가 희미해도 지금이 몇백 배는 좋다는 걸 아니까, 그럼 됐지 뭐. 그래서 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요즘에도 누군가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 하는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선택으로 남겨 두는 쪽을 택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기쁨이 어떤 고통의 순간을 거쳐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게다가 몇몇은 사랑과 헌신으로 아이를 키우면서도 지속적인 고통 속에 살기도 한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생동하는 변수에 자식이라는 존재가 끼어들었을 때 일어나는 인생의 변화에 대해 지금의 기분에 취해 낙관만 말하는 게 난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한다.  

    

 다행인 점은 내가 병리학적으로 어떤 정신적 질병에 분류될 만큼 명확한 이상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나의 영혼을 파먹으며 늙어갔다는 말이 옳겠다. 모든 어둠을 내 안으로 끌어당기고 아이는 최대한 빛에 남겨두었다. 아이는 내 기준에서는 잘 자랐다. 물론 중간중간 나도 실수는 했다. 아이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그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와 유대 관계를 다졌다.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우리는 다시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잘 것 없는 농담을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엄마로서 역할을 잘해서가 아니다. 온전히 딸의 넓은 마음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내가 딸을 키우는 동시에 딸이 나를 자라게 한 것이 맞다. 나는 정말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기에 한없이 모자란 인간이니까.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라는 것도 1도 없었다. 웨딩드레스를 단 세벌만 피팅하고서도 진이 빠져 제일 첫 번째 것을 골랐으니 말 다했다. 결혼식 전날에 손톱을 반듯이 자른 게 나름 네일 관리였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믿고 말 것도 할 것도 없이 그냥 결혼이라는 게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바란 인생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만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이 기존의 것이 되면 내가 나를 배반하며 훌쩍 떠나는 사람.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사랑하는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사람을 한 자리에 동여매는 것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그들을 향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더욱이 사람에 마음 쓰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해 인간관계를 협소하게 꾸리는 나 같은 쫄보에게는 사랑이 제일 두려운 것이었다. 나 자신 하나도 감당할 수 없는데 나만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스스로에게는 너무 무책임하고 상대에게는 가혹한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역시나 ‘어쩌다 보니’ 엄마가 되고 말았다. 자유에서조차 자유로워지고 싶어 발버둥 치던 나 같은 인간에게 말이다. 이러니 주변에서 놀랄 만도 했다. 네가 엄마라니, 그러게, 내가 엄마라니!     






 육아를 어떻게 잘할 것이냐에 대한 주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스테디셀러이지만, 주양육자 특히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주제가 봇물 터지듯 서점가를 장악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엄마라서 힘들고 엄마라서 괴롭고 엄마라는 것이 싫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인 것의 일종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아이가 영유아 시절 때만 해도 나의 억울함과 분노와 슬픔과 허무와 후회에 대하여 미친 듯이 글로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랬다.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든 게 바로 이 욕망의 지연이었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나 늘 방해받고 마는 것. 게다가 어렵사리 무언가를 추구해도 자주 신호가 끊기는 화상통화처럼 끊임없이 분절되고 마는 연속성.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는 두려움은 모유 수유를 위해 두 시간에 한 번 깨어나는 일만큼이나 공포감을 줬다. 특히 예열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 같은 사람은 무언가에 집중하기는커녕 시작조차 불가능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한여름 아스팔트 물기처럼 죄다 증발하고 만 것이다. 머리로는 안다. 그 시절의 막막함에 대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분노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고 받아들였고 후회하는 대신 환경 안에서 최대한 효율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며 이 루틴을 변수 없이 운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정도이다.


 지금 나는 괴롭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자식이라는 이름의 특수한 관계를 떠나 고유한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대부분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불시에 운명처럼 나타나 마음을 흔들고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며 시작된다. 하지만 아이와의 사랑은 달랐다. 심장이 뛰는 건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해서였고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건 정말 정신없이 하루가 갔기 때문이다. 사회 통념에 따라 자식이라는 존재를 귀하게 여기면서도 나는 가끔 아이를 볼 때마다 남처럼 낯선 기분을 느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나를 잡아준 것은 ‘세상 모든 어른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막연한 내 도덕적 의식에 근거한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내가 낳은 타인을 마주할 때면 늘 저 문장을 잊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내 딸이라고 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는가. 다음 기회는 없는 운명의 돌림판에서 당첨돼 잘 알지도 못하는 어른에게 자기 생명을 위탁해야 하는 아이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부모는 될 수 없어도 아이가 제 힘으로 세상에 나가기 전까지 어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자는 마음만이 강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나도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걸 포기할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내가 달라져야 하는 것. 나라는 인간 자체를 새롭게 개조할 수는 없지만 영점 조정은 가능했다. 과녁은 그 자리에 두되 내가 가진 환경에 맞게 영점을 새로 조정하고 조금 느리더라도 탄착에 성공하는 것. 많은 영광과 즐거움이 생략되더라도 진짜 중요한 나의 욕망과 꿈에 대해선 한 치의 물러섬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이 지나갔고 작은 하루하루가 세월이라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고난의 돌은 알아서 저편으로 떨어지고 나는 가끔 돌멩이를 발로 차며 시시한 인생을 찬양하는 것이다. 시시해도 절대 뺏기고 싶지 않은 행복들. 나는 정말 이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 웃기기 때문에. 웃긴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란 여간해선 힘들다.    




 


 나는 내가 바라던 모습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정착했고 여유 대신 효율을 택했으며 가끔은 남들과 비교를 하기도 한다. 아줌마라는 말에 모욕적 제스처가 동반되어 있지만 않으면 절로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애들과 술래잡기를 하기도 한다. 훌쩍 어디론가 떠나기보다는 놀러 나간 딸의 귀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나를 매어 놓을 사랑을 만난 지금 가끔 과거의 나를 그리며 향수에 잠기기도 하지만 이 기분이 싫지만은 않다. 아이가 베란다를 통해 다 들릴 만큼 껄껄 웃어젖히는 소리에 부엌 덧문으로 쪼르르 달려가 내려다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아, 저기 사랑이 있다! 사랑이 집으로 오고 있다.’ 백 퍼센트의 확신으로 점철된 매일의 문장.      


 그리고 그 사랑은 비밀번호를 뻔히 알면서도 초인종을 울려 자신이 당도했음을 알린다. 신호탄처럼, 고요하던 내 세상은 장막을 걷고 요란하고 복작거리는 평행우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게 내 삶이다. 삶은 내 마음처럼 절대 흘러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최대한 좋은 면을 바라보고 그것의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걸 다른 말로 사랑의 힘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내일이 어떨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내 옆에 잠든 이 길쭉한 아이는 백 퍼센트의 확신으로 존재한다.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그녀보다 늘 늦은 시간에 잠드는지도 모르겠다.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잊을 수 없는 스냅샷을 눈동자로 탁탁 찍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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