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폭풍의 언덕과 위대한 개츠비
안개가 자욱한 웨스트에그의 부둣가에서 저 멀리 떨어진 이스트에그 만의 초록색 불빛을 지켜보는 남자가 있어. 초록 불빛은 밤새 반짝이고 먼 거리에 비해 당장이라도 손에 잡을 수 있다는 듯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며 그를 희롱하지. 오,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가여운 개츠비!
나는 늘 개츠비에게 연민을 느꼈어.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휘황찬란한 저택의 꼭대기에서 수많은 명사들을 내려다보며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되지만, 정작 개츠비는 자신이 원하는 건 조금도 가지지 못했거든. 한 세계를 향해 동경을 품고 그곳에 속하려 노력하지만 견고한 벽 앞에서 매번 미끄러지는 기분, 그건 나 역시 매일 느끼며 살고 있어. 그러니 내가 개츠비에게 느끼는 연민은 어쩌면 나 자신을 향한 것일지도 몰라.
개츠비는 가난한 장교였어. 우연히 명망 있는 가문의 데이지라는 여인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져. 하지만 그가 프랑스의 전장으로 떠나게 되고 기약 없는 약속에 지친 데이지는 톰 뷰캐넌이라는 시카고 출신의 엄청난 부자와 결혼을 하게 돼. 이 소식을 들은 개츠비는 마이어 울프라는 어둠의 세계 보스 밑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 그때 미국에는 대공황이라 불리는 경제 위기가 있었어. 사람들이 흥청망청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주법을 시행했어. 개츠비는 밀주를 팔았어. 한마디로 몰래 술을 판 거지. 그뿐이 아니야, 도박과 주식 투기도 서슴없이 감행했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은 돈으로 개츠비는 매일 성대한 파티를 열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하고 환상적인 파티를.
왜 그랬을까? 개츠비가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파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유형이라서? 아니, 그 이유는 오로지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어. 멋진 저택도 값비싼 물건들도 오직 데이지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이었지.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늘 열린 그의 저택 문으로 수많은 무리들이 떼 지어 들어오고 나가길 반복해. 그중 데이지는 없었고 개츠비는 결국 데이지와 친하게 지내는 조던이라는 이름의 골프선수와 데이지의 먼 친척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닉에게 부탁을 하지. 데이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매우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며 그 누구보다 신사적인 태도로 말이야.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를 5년 만에 다시 만나. 닉의 집에서. 비를 쫄딱 맞은 꼴을 하고선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데이지 앞에 나타난 개츠비를 보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단다.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츤데레’ 남자 주인공을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들지. 자존심 따위는 개나 주고 연신 초조해하고 긴장하고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면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아, 개츠비는 데이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구나. 비록 데이지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은 처지라 그들의 사랑이 ‘불륜’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도 어쩐지 그들의 재결합을 응원하고 싶어 진다니까.
개츠비는 온갖 불법적인 일을 하면서 부를 이뤘지만, 그가 데이지에게 내보인 마음만큼은 무엇보다 순수했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애틋한 마음. 그렇지만 내가 오늘 너에게 하는 이야기는 좋은 연애를 위한 ‘나쁜 연애 알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지? 아쉽게도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욕망이 그의 목숨마저 앗아가게 된단다. 정말이지 비참한 죽음이 따로 없어. 정작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톰과 데이지는 아무런 반성도 없는데 말이야. 개츠비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날에도 데이지를 걱정하며 이스트에그의 초록 불빛 앞에 서 있었어. 톰과 뷰캐넌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부터 도망갈 준비를 끝낸 상태였는데. 개츠비,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있나!
그렇다면 개츠비가 그토록 사랑했던 데이지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아? 데이지는 말 그대로 금수저 집안의 딸이지. 금이야 옥이야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옷들만 입고 명망 있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화초 같은 아이. 때가 되면 사교계에 데뷔해 인형 놀이하듯 하녀들에 의해 곱게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자신에게 호감을 내보이는 부유층 자제들과 왈츠를 추며 그 당시 여성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던 사람. 온갖 좋은 것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이나 욕구를 돌볼 시간은 없어 아름다운 껍데기만 남아 버린 사람이지. 이런 데이지의 캐릭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 데이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극도로 긴장한 개츠비는 영국에서 보내 준 옷들로 가득한 옷방에서 마치 첫눈이 내리듯 낭만적으로 자신의 셔츠들을 하늘 위로 던져. 화려한 색감과 부드러운 감촉 사이에서 데이지는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흐느끼지. 그야말로 물욕의 향연이 따로 없어. 그런데 정말 데이지가 그런 옷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까? 평생 놀고먹으면서 자기 뜻대로 살아도 돈이 차고 넘치는 톰 뷰캐넌과 결혼한 몸인데. 데이지는 자기 안에 몰아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겨우 그 정도로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 왔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데이지가 자신의 딸에게 ‘이런 세상에서는 예쁘고 귀여운 비보가 되는 게 최고지.’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왔고, 자기를 기만하는 남편을 떠나기에는 그간 받은 혜택들로부터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거지. 욕망 앞에서 미끄러지기는 데이지도 마찬가지지. 다만 그녀에게는 그런 불만을 해소시킬 자극제가 넘쳤어. 바로 돈. 개츠비가 아무리 기를 쓰고 모아도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귀족의 역사와 전통이 담긴 그야말로 정통성이 존재하는 부유함 말이야.
데이지는 얼마 간 개츠비와 처음 만난 시절처럼 불타는 연애를 하긴 했어. 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지. 남편의 빈정을 상하게 만들 정도로. 데이지 때문에 개츠비는 자기 집 하인들도 전부 갈아치웠을 정도로 그녀의 말이라면 완전히 복종하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데이지에게 개츠비는 권태로 둘러싸인 그녀의 삶에 잠시 스쳐가는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부부라 해도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데이지도 톰 못지않게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바닥인 사람이야. 오, 불쌍한 개츠비라고 하기엔 사실 개츠비의 갈구도 문제점이 많아.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보여주는 태도만 놓고 봤을 때 세상 뭐 이런 로맨티시스트가 다 있나 싶지만, 그걸 제외한 개츠비의 삶은 그야말로 거짓과 부도덕함으로 가득하거든. 이름도 학력도 살아온 이력도 모두 거짓말이지. 그걸 간파한 사람들을 속일 만큼 임기응변 실력이 꽤 좋긴 하지만. 명석한 사람이고 겁도 없지만 그게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지. 그토록 자신의 환경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그이지만 잘못된 상대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를 망가뜨리니 말이야.
진정한 자신의 가치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새겼어. 아마 표면적인 개츠비만 보았다면 그를 좋아할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개츠비에게는 그를 지켜보는 닉이라는 존재가 있었지. 그의 도움으로 독자들도 개츠비에게 측은함을 느낄 수 있지. 닉도 처음에는 개츠비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결국은 유일하게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되지. 닉이 개츠비를 그렇게 느낀 건 그가 가진 부유함이 아닌 그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어. 물론 대부분의 시간 그는 거짓을 살았지만 데이지를 향한 진실함을 닉은 알았으니까. 개츠비는 유일하게 닉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지. 개츠비의 위대함은 그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드러나고 말았지. 자기 삶을 바로 잡을 기회조차 그에겐 허용되지 않은 거야. 그건 톰도 데이지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형벌들을 예의 그 화려한 껍데기 속에 숨긴 채 살아가겠지. 그게 과연 축복받은 삶일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위해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목표를 추구하며 정진하는 것. 그 자신의 가치를 높이면서도 자랑스러운 연인으로 서는 일. 이 두 가지를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만 이루기만 한다면 그 희열은 말로 다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어. 설령 너의 노력이 실패해도 네가 그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상대라면 가차 없이 이별을 고해야 한다는 점이야. 너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남들과 너를 비교하며 너를 잃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잘 생기고 재미있고 잘나도 절대 뒤돌아 보지 말라는 거야. 너의 노력이 단지 그 사람의 수준 맞추기 위한 것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평생을 남과 너를 도토리 키재기를 시키며 너를 불행하게 만들 테니까. 단순히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너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가장한 채 살다 보면 네 안의 소중한 것들이 힘을 잃게 돼. 절대 너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과와 상관없이 너의 노력 자체를 귀하게 여길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겠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절대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어. 먼저 너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너를 귀하게 여기는 연습을 해두어야겠지?
끝나버린 사랑을 잘 떠나보내는 용기를 가지는 만큼 너 자신을 지키는 뚝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라는 중심을 잃지만 않는 다면 몇 번의 실수를 거듭해도 금세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니까. 꿈을 위해 채찍질을 하면서도 너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끔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것도 괜찮아. 그런 마음속 여유를 가진다 해도 절대 늦지 않거든. 삶은 속도보다는 나아가는 방향이라고 누군가 말했지. 나도 겨우 서른 하고도 몇 해 정도를 살아왔지만 해가 갈수록 그 말을 실감해. 물론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는 내 말이 그저 잔소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람의 끈기라는 건 데이터의 수치보다 신념이 담긴 가치관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더라고. 당장의 성공과 인정을 위해 너 자신을 망치는 일은 대부분 슬픈 결말을 안겨 주더라.
돌아볼 수 있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다투고 원망하고 떠나고 홀로 남아도 함께 손잡고 지나온 길들 만큼은 부끄러움 없이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사랑 말이야. 엄마에겐 도망치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연애가 있었단다. 그게 시간이 지나도 참 많이 후회로 남더라고. 다양한 실패와 좌절은 인생의 큰 고비를 넘는데 훌륭한 자양분이 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긴 실패는 결국 나 자신의 상처가 되더라고. 사랑하는 너만큼은 그런 실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
사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초인적인 힘을 느끼기도 하고 그 반대로 잘 숨겨왔던 부정적인 면들이 드러나기도 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명확한 문제들이 막상 자기의 사건이 되면 안갯속에 꼬리를 감추지. 그래서 ⌜폭풍의 언덕⌟도 ⌜위대한 개츠비⌟도 모두 중심인물을 지켜보는 관찰자들의 입장에서 쓰였는지 몰라.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사람들은 때론 눈이 멀어버리니까. 언젠가 너도 눈이 멀고 남들의 이야기가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몰라. 그럴 땐 엄마의 조언들도 고루한 노파심으로 그치고 말겠지. 이미 각오는 하고 있단다. 하지만 지나친 폭풍 속에 휩싸이지 않게 미리 예방주사를 맞는 건 나쁘지 않겠지? 내가 추천한 2권의 책들을 통해 너에게 닥칠 폭풍의 전조를 예감할 수 있길. 경계를 나누고 욕망을 자극하는 빛을 발산하기보다는, 막막한 항해 중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등대 같은 연인이 되길. 달콤한 낭만만으로도 충분할 사랑 앞에 엄마가 너무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면 미리 사과의 말을 전한다. 하나 인생이 늘 그렇듯 우리 계획대로만 되지 않거든. 처음에도 말했지만, 사랑은 늘 우리를 훅 덮치고야 마니까. 튼튼한 마음으로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From.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널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엄마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