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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욕망 사이

마담 보바리

by 존치즈버거


To. 친애하는 코튼킴


놀이터, 그네의자, 버블티, 킥보드, 라면 과자, 모래 파기, 놀이공원, 강아지……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 네가 원하면 웬만해서는 나도 거절하지 않는 것들. 순간에 흠뻑 취해 늦여름 벚꽃처럼 분분이 날리는 너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이 작은 것들로 세상을 다 가져도 되나 싶을 만큼 나도 행복해. 엄마와 아빠는 결핍을 모르는 네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소박한 것들에 이토록 큰 행복을 느끼는 시절이 생각보다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있을 때 잘 하자!’라는 마음으로 너의 소망들을 하나씩 채워나가고 있지.


하지만 너도 세상을 점점 알아 가면서 원하는 것들의 가짓수도 크기도 값어치도 더 늘어나게 될 거야. 옷이나 장난감이나 먹을거리처럼 물질적인 것도 있겠고 취향과 성공처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될 거야.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욕구라는 게 있잖아. 그 기본들은 물론 그 이상의 욕구들도 채워야만 만족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네. 네가 아주 어렸을 때는 먹고 싸고 자고가 다였다면 지금은 재미있는 경험까지 원하는 것처럼. 물론 소박한 것들에도 행복을 느끼는 어른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나이가 들어 사회에 속하고 여러 가지를 경험하며 자기만족을 위해 다양한 자극을 추구할 수밖에 없어. 물론 무언가를 가져야 하는 정확한 나이라는 건 없지만 살다 보면 그래. 나라는 존재의 증명이 너무 물질적인 것에만 치우쳐진 요즘, 엄마 또한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들 중 하나란다. 속물이 되긴 싫지만 안락하고 싶고, 꿈을 향해 매진하면서도 내가 가진 것을 조금도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 어떤 날에는 다 가지고 싶어 괴롭다가도 어떤 날에는 그 모든 것을 가지지 않아도 행복한 내 삶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지.


소망과 욕망. 이 둘은 한데 묶어 야심이라 부를 수 있겠다. 소망은 무엇을 바라는 마음 그 자체를 말한다면, 욕망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한다는 마음을 일컬어. 그리고 ‘탐하다’라는 동사에는 ‘지나치게 욕심내다’라는 설명이 붙지. 비슷한 단어 같지만 욕심이라는 그 한 끝 차이가 인간을 불행하게 할 수도 있어.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 욕심이 건강하게 발휘해 더 나은 나를 만들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욕심이라는 건 배제할 수 없는 에너지이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큰 문제가 되어 버리지. 오늘 내가 너에게 소개할 소설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야.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형식도 변하잖아. 어떤 소설은 발표된 당시 시대상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마담 보바리는 1856년에 나온 소설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담 보바리는 그야말로 욕망의 화신이지. 충분히 여생을 잘 보낼 수 있었음에도 절제되지 않는 욕심으로 패가망신의 어두운 터널로 스스로를 밀어버렸지. 이 여인의 생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공부가 왜 필요하며 물질에 앞서 가치관을 정비하는 것이 어째서 중요한지 배워보도록 하자고.




마담 보바리는 30대가 되어서야 읽었어. 나도 책 꽤나 읽었다고 하지만 막상 두꺼운 두께 앞에서는 망설이게 되고 말지. 플로베르의 고집스럽고 다소 엄근진한 표정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따분할 거 같다는 편견이 있었지. 그러던 중 플로베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고행을 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어. 5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이 책을 썼다는 거야. 세상에! 게다가 형식과 문장에 있어 완벽하길 원했던 플로베르의 집념 때문에 고치고 고치기를 반복했고 절친에게 끊임없이 보바리 부인에 대해 욕을 해댔다는 기록을 보았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만뒀을 텐데. 역시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작가로 살아남는구나, 새삼 그의 인내에 탄복하며 책을 펼쳐 들었어. 그렇게 고생을 했다는데, 이렇게 오래 회자된다는데, 내가 이 책을 읽지 않는 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리고 558페이지의 이 광대한 이야기는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어. 1800년대의 먼 인물임에도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전히 물질과 자극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달까? 엠마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교 무대와 무도회 같은 것들은 이제 SNS라는 공간으로 옮겨 왔지만.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래. 엠마라는 이름의 농장주 딸이었어. 어릴 적부터 또래에 비해 남다른 면이 많았지. 다소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할까? 기숙학교를 마친 엠마는 집으로 돌아오고 자신의 집을 방문한 의사 샤를르 보바리를 만나게 돼. 샤를르는 엠마에게 반하고 엠마는 그와 결혼을 하게 되지. 샤를르에 대해 썩 나쁘지 않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엠마는 무엇보다 그와 함께라면 도시로 나가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거든.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목숨을 돌보는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특수성 때문일까. 기회를 잘 잡아 이름을 알리면 그다음부터는 완전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샤를르는 엠마가 원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어. 사람이 좀 수동적이고 우유부단한 면이 많았지. 엠마랑 결혼하기 전 돈 많은 과부랑 결혼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자기 엄마가 시킨 일이었고 의사 시험도 한 번 떨어지고 방황하다가 엄마의 성화에 겨우 합격한 인물이니까. 요즘 말로 헬리콥터 맘 아래서 성장한 말 잘 듣는 아들내미 같은 인물이지. 그런 샤를르에게 유일하게 자기 욕망으로 인해 성취한 것이 있으니 바로 엠마였어. 그러니 샤를르는 엠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했겠어? 엠마가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짜증 내는 것 변덕 부리는 것을 모두 받아 주며 엠마의 기분을 맞춰주지. 하지만 엠마는 권태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욕망을 가지고 있었지. 도무지 충족되지 않는 시골의사 아내의 삶이란. 결국 엠마는 연하남 레옹과 부유한 루돌프를 만나 불륜을 저지르며 자신의 모자란 욕구를 충족하지. 그러나 아무런 목표나 이상 없이 그저 한 순간의 자극에 심취한 보바리는 빚을 당겨 명품 플렉스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남편 명의로 사기를 치는 대담함을 보여주며 자신의 남편과 딸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아.


이 소설에는 단순히 엠마 보바리의 몰락만이 아니라 막 산업사회로 진입한 유럽의 사회상을 보여줘. 정신적 가치보다는 점점 물질적 가치가 대두되는 시대에 엠마 보바리는 상징적인 인물이지. 엠마 보바리의 욕망이 터져 나오는 마차 장면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바로 농업 공진회 장면이야. 참사관이 마을로 와 농업의 부흥을 위해 연설하는 장면이 엠마가 루돌프와 감정이 깊어지는 장면과 교차되며 영화적인 효과를 보여주지. 그 장면은 엠마의 부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산업사회로 막 진입한 시대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이 소설이 가진 세계를 확장해. 물론 대부분의 소설이 시대상과 떨어질 수 없지만 플로베르는 엠마 보바리라는 문제적 인물을 통해 도저히 거세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여전히 유효하게 만들지. 이 효과적인 장면 연출은 실제 책을 읽어야 실감 나게 느낄 수 있으니 이 장면만이라도 꼭 보도록 해. 플로베르는 실제로 이 장면을 수정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라고 했대. 궁금하지 않니?





모든 것이 수치화되는 현대에 불안은 어쩌면 감기처럼 빈번한 질병이 돼버렸는지 몰라. 나도 여러 번 느닷없는 불안을 느끼니 말이야. 치솟는 물가와 점점 고령화되는 사회, 나의 늙음을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할 것 같고. 화려하고 윤택한 도시의 풍경에 반해 전혀 조명되지 않는 계층의 현실을 볼 때면 비겁하게도 지금의 나의 삶이 그래도 안락한 축에 속한다며 비교하기도 해. 차례를 놓고 보자면 중간에는 갈까? 끊임없이 세계의 계층 속에 나의 삶이 리트머스 시험지라도 된냥 무턱대고 들이밀어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지. 하지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불안은 공부나 운동 같은 현재를 충만히 만들어주는 자기 계발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더라. 아니면 미래에 대한 세세한 계획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면 불안의 안개가 걷어지는 기분도 들고. 방법이 어려울 뿐이지 결국 행동하는 내가 있으면 되니까.


문제는 권태인 것 같아. 보바리 부인도 자주 권태에 빠지는 사람이지. 아무리 재미있고 좋은 것이라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지겨울 수밖에 없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을 때 생각보다 즐겁지 않은 나를 보고 놀라는 경우가 있지. 반복되는 일만큼 성취도 따라오면 좋겠지만 성취란 보이지 않는 매일의 수고가 쌓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도 하니까. 결국 내게 당도할 앞날을 기대하며 권태를 이겨낼 수밖에 없지. 물론 권태에서 헤어 나올만한 다른 취미를 갖는 것도 중요해. 하지만 취미도 잘해야 즐거운 법. 잘하기 위해서는 거듭된 헛발질의 날들도 필요하니 호기롭게 시작한 활동들도 과정 중에 반드시 지루한 순간들이 오게 돼. 결국 인간은 권태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 같아. 그런데 우리의 문제적 인간 보바리 부인은 그 권태를 자극으로 이겨내려 했지.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한방에, 재빨리, 아주 효과적으로 나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들. 그런 걸 행복으로 착각하게 되면 문제가 커진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나를 흥분시키는 것들도 결국 권태를 맞이할 테니 조금 더 큰 자극 더 큰 자극 이런 식으로 뻗어나가지. 행복도 중독 인양 계속된 자극을 추구하면 금단증상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짓도 해버리는 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 물론 일시적으로 나를 기쁘게 만드는 모든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강력한 자극을 주는 일일수록 우리의 노력과 인내 같은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부작용을 동반하니 반드시 주의가 필요하겠지.


엠마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장면이 초반에 나오지. 수도원의 기숙학교에 간 엠마는 지루한 농장을 벗어났다는 데 대한 기쁨도 잠시 도무지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대신 낭만적인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환상 속에 젖어 살아. 멋진 남자와 어여쁘게 수 놓인 드레스와 화려한 꽃장식과 무도회들. 좋게 말해 자기표현이 뛰어난 소녀였지만 수도회에서는 골칫덩이였지. 오죽하면 엠마가 떠나는 날 수녀들이 환호를 했을까. 샤를르를 만나기 전에도 안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때는 허허벌판에 농장 하나 있는 곳에 살았으니 엠마도 자기의 욕망이 이토록 강렬했는지 잘 모르고 살았겠지. 비록 시골이긴 하지만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엠마는 자신이 가닿지 못하는 세계에 입장하려 기를 써. 샤를르에게 성공 불가능한 수술을 권유하기도 하고 빠듯한 수입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신상 옷들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 우연히 알게 된 귀족의 초대로 가게 된 무도회에서 엠마는 억누르던 본성을 터뜨리며 욕망의 판도라를 열어. 엠마가 계속 머물고 싶은 세계는 샤를르의 힘으로는 그저 가끔 일어나는 이벤트에 지나지 않지. 엠마가 그때 현실을 깨우치고 뭔가를 해보려고 했다면 조금 나아졌을까? 실제로 후반부에 빚에 허덕이는 엠마를 보며 회계사 하나가 말해. 부인들도 돈을 모을 수 있다, 주식이나 여러 방법으로 돈을 불릴 수 있었다. 누가 엠마에게 이런 것 좀 알려줬으면 달라졌으려나 싶지만. 글쎄……. 엠마의 갈증은 “지금 당장 내 눈앞에!”라고 으름장을 놓는 듯 기다림과는 거리가 멀지. 사실 이 작품을 읽으며 엠마를 이해해보려 노력을 하긴 했어. 그러니까 그 당시 여자는 자아실현이 매우 어려운 시대였으니까. 자기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남자와 가정이라는 세계에 속박 당해 훌륭한 엄마만이 칭송받는 길이었지. 사람들의 입에 오래 회자되는 파티의 호스트가 된다면 조금 주목받으려나? 산업화와 자본의 물결에도 여인들의 생이란 특정한 카테고리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었으니 엠마 같은 여자가 견디고 배기겠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엠마는 확실히 문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 문제적 특성은 단순히 플로베르가 여자들을 바라보는 어떤 특수한 방식이 아닌 보바리만의 것이라는 생각이고.(물론 주인공이 여자이기에 그 욕망이 더욱 위험하고 드라마틱해 보이는 효과는 있지.) 왜냐면 지금도 보바리 같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까 보바리는 여자와 시대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 그 다른 성별 다른 시대에 놓아도 뭔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 왜냐고? 보바리 부인에게는 이렇다 할 자기 지향점이 없거든. 그러니까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어. 스펀지처럼 쾌락을 흡수하지만 모든 기쁨이 말라버리고 나면 자신이 그것을 진정으로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거야. 아무리 이해를 하고 상황을 짐작하려 해도 엠마가 벌인 무책임한 일들은 절대 용인될 수 없지. 마지막에 음독자살을 하면서 그 무엇 하나 책임지지 않고 지상에서 사라졌으니 이보다 더 제멋대로인 캐릭터가 있을까.


샤를르도 레옹도 루돌프도 엠마에게는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었을 뿐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어. 자신의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해 엠마는 고리대금을 쓰고 그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남편의 이름을 팔아 환자들에게 돈을 뜯어내지. 양심의 가책보다는 자기 안의 결핍에만 몰두한 채 단 한순간도 진짜로 기쁜 적은 없었던 삶. 그만큼이나 엠마를 믿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샤를르도 답답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도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실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부모의 뜻대로만 산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무턱대고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는 없어. 오랜 시간 견딘 보상이 실패라는 결과를 주기도 하지. 꿈을 이룬 사람들 중 무심한 몇몇은 무조건적인 도전을 말하기도 하고, 나르시시즘이 너무 심한 몇몇은 나 때는 더 심했다면서 이 정도 고생 가지고 징징 거리지 말라고 다그치기도 하지. 그런 말들에 흔들릴 필요 없어. 물론 조언을 받아들이고 자기에게 맞는 방향 설정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꿈을 위해 행동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은 온전히 너의 몫이잖아. 중요한 건 너라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 꿈이 없어도 괜찮아. 각양각색의 우리가 모두 다른 삶을 사는 건 당연하잖아? 정말 중요한 건 명사로 나타낼 직함이나 재산이 아니라 어떤 삶에 대한 밑그림일 거야.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그 안을 채우는 구성원의 마음이 불행하면 그게 진정한 행복일까? 거대한 꿈을 꿔도 삶의 형식은 소박할 수도 있고 삐까뻔쩍한 전문직이나 대기업을 다니지 않아도 부자가 될 수 있지. 그걸 어떻게 이뤄나가고 그 안에서 네가 원하는 모습이 중요한 거야. 이런 걸 다 뭉뚱그려 가치관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가치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이 있다면 무엇이 나에게 옳고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것인지를 먼저 인지하는 게 중요해. 무턱대고 누군가의 삶을 갈망하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욕심만 부리다 보면 보바리 부인처럼 잘못된 길로 갈 수 있거든.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루르처럼 그릇된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의 손길을 더 자주 맞잡게 되거든. 모험은 중요하지만 잘못된 길에서는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정도를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 가치관은 돛과 같아. 바람이 몰아닥쳐도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지. 조류와 해류에 밀려 아무 곳에나 닿는 건 표류에 지나지 않아. 아무리 좋은 낚싯대를 가지고 원하는 물고기를 잡아도 돛이 없다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서 멀리 밀려날지도 몰라. 가치관은 소망과 욕망 사이 파도치는 생애 단단한 돛대가 될 거야.


이렇게 말을 하고 나니 내가 엠마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올바른 인간인 것 같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엄마도 가끔은 세상의 지표들에 흔들리기도 해. 엠마를 전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엄마도 시즌마다 새 옷을 사고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달뜨기도 하잖아. 다만, 엄마가 매일 실패하는 와중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는 건 나 자신이 정말로 가고 싶은 길을 찾아서인 것 같아. 넘어지고 부서지는 와중에 맷집도 키워서 작은 시련은 가뿐히 넘길 수 있기 때문이지. 내가 빼앗고 싶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수없이 찍었을 발자국을 생각하면 앉은자리에서 탐내는 모습이 그야말로 섣부른 욕심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돼. 모든 걸 경험할 수 없어서 나는 소설책을 읽었지. 흥망성쇠를 잘게 쪼개 그 안에 자리한 인간의 욕망과 공허를 모두 들여다보니 아스라지는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하더라.





아직은 소망하는 것 자체에 대한 기대로 한껏 들뜬 내게 나의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지나친 욕심을 부리기에 너의 기쁨은 손 내밀면 닿는 곳에 온통 가득하니까. 하지만 사람들 속에 점점 너의 자리가 생겨나며 얻는 것도 잃는 것도 많을 거야. 네가 원하는 것이 뭐든 그 꿈을 이루길 바라. 네가 원하는 삶이 어떻든 정직한 길을 걷는 다면 나는 그 길이 어두운 터널이라 해도 네 곁에서 함께 걸어갈 거야. 그때를 위해 가방 속에 잊지 말아야 할 너의 가치관을 준비해둬. 힘겨운 날 꺼내먹으면 그보다 힘이 나는 것이 또 없을 테니.




From. 그 좋아하는 딸기도 한 입 먹고 너에게 다 주고 마는 엄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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