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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의 곁에 없을 때

(2)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와 최은영의 모든 소설

by 존치즈버거


그런 날이 있어.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불현듯 내가 이고 진 무게들이 느껴지는 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내 등 위에 올라탄 짐들 때문에 늘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걷곤 했지. 찰나의 가벼움에도 불안을 느낄 만큼 이제는 짐 지는 것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 등에 얹힌 그 무게가 나를 구성하는 살과 뼈와 피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어. 겨우 집으로 기어들어와 내팽개치듯 몸을 뉘어도 해소되지 않는 무거움들에 짓눌리고 말지. 누군가와 이 무게를 나누고 싶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제와 새삼 호들갑 떨어 무엇하냐 자신을 나무라게 되기도 하지. 그럴 때 나는 최은영 작가의 책을 펼쳐봐. 책 속에 무게를 해소시킬 명확한 답이 있진 않아. 하지만 지친 나를 숙주 삼아 몸 불릴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는 외로움과 포기 같은 감정들을 이 책이 대신 잡아먹어 주긴 하거든.


“와우! 이 작가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무시무시하고 힘이 센가 봐?”


천진한 얼굴로 물어볼 너에게 나는 미리 대답할게.


“글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우선 전혀 무시무시하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 단어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그런 이미지는 아니라는 거야. 오히려 누구보다 잘 상처 받고 허약한 사람들이 나오지. 속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약점을 마구 드러내기도 하고 저 싫다고 떠나간 사람의 등을 바라보면서 닿지 못할 그리움에 한없이 마음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자기 코가 석자면서도 타인의 아픔까지 모조리 흡수해버리고 마는 바보들. 하지만 그래서 무시무시하고 힘이 센 것 같기도 해. 타인의 감정을 얕보고 함부로 구는 사람들에 아무런 이득을 바라지 않고 다가오는 해맑음이란 감당할 수 없는 빛이 되거든. 자신이 믿어본 적 없는 세상에서 튀어나온 낯선 생명체의 고귀한 마음이 어둠에 은폐했던 자신들의 치부를 발가벗기기도 하니까. 사랑의 마음으로 잔뜩 무장한 사람들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어?”




내가 처음 최은영 작가의 책을 접한 건 20대 끝자락이었어. 마침 학교에서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비평문을 쓰는 과제가 주어졌어. 그중 유난히 눈에 띈 작품이 ‘쇼코의 미소’였지. 발표 날 알게 되었어, 나만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후 ‘쇼코의 미소’를 표제작으로 삼은 작가의 단편집을 샀어.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라는 중편 소설로 등단했고 문창과 학생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어. 세련되진 않았지만 진솔하고 단정한 문장도 좋았지만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제일 반짝이던 건 작가의 가진 관점이었어. 인간을 바라보는 그녀의 따스한 시선에는 연민과 이해, 사랑이 있었어.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아픔은 나도 언젠가 느껴보았고 느끼고 있던 것들이었어. 작고 소박해서 어쩌면 보잘것없다 느껴지던 것들을 작가는 세심하게 어루만져 귀한 보석으로 일구었지. 화려한 수사나 복잡한 구성없이 담담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들. 비루한 생이지만 가까스로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그 인생의 진리를 표현하기에 단순한 진심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사랑만큼 그 어떤 수식어 없이 설명되는 감정이 또 어디 있겠어.


⌜쇼코의 미소⌟에는 총 7가지 단편들이 실려 있어. 하나같이 소중하지 않은 구석이 없단다.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는 소유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 소녀의 집에 일본인 교환학생 쇼코가 찾아오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돼. 이야기는 소유와 쇼코 그리고 소유의 할아버지와 관계가 중심이 돼. 그들 관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어긋남들 속에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소설이지. 단순히 그들의 우정 이야기라기에 이 소설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 우리 앞에 닥친 삶에 매몰되어 타인의 고통을 무심하게 지나친 일에 대한 후회도 느낄 수 있고 꿈이라는 가능성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지난한 청춘의 쓸쓸함도 엿볼 수 있지. 타국에서 온 소녀에 대한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수줍은 미소를 건네던 소유와 쇼코는, 자신들의 소망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지막에는 서늘한 미소를 남기지. 나 또한 수없이 공모전에 떨어지며 실패에 익숙해진 사람이었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어. 소설의 내용은 핑크빛 표지의 발치에도 못 갈 만큼 어둡지만 묘하게 위로를 건네. 날 찌르고 비난하던 이 비정한 세상에 대신 사과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최은영 작가의 ‘착함’을 너도 사랑하게 될 거라 믿어.


'쇼코의 미소'만큼이나 내가 사랑하는 작품은 '씬짜오, 씬자오' 라는 작품이야. ‘씬자오’는 베트남어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래. 나는 이 작품을 책을 구입하기 전에 먼저 읽었어. 웹진에 발표되자마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어나갔지. 마침 식사 중이었는데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 참 이상해. 최은영 작가의 이야기는 늘 담담하게 흘러가거든. 인물을 부러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 꼬집고 깨물 듯 아픔을 말하게 하지도 않고 눈물 흘리지 않으면 독한 인간으로 만들 만큼 신파적인 요소가 없는데도 항상 느닷없이 사람을 울리고 말아. 정작 소설 속 주인공들은 침착한 얼굴로 자신의 과오를 되짚어가는데 말이야. 콩나물을 입으로 집어넣으면서도 코를 연신 훌쩍였어. 그 이야기에는 내가 몰랐고 몰랐기 때문에 외면한 타인의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어. 이방인이라는 이름의 서로를 위로하던 개인들을 갈라놓은 거대한 역사. 너도 언젠가 학교에서 베트남전에 대해 듣게 될 거야. 엄마 세대에서도 이 전쟁은 먼 과거의 이야기였지. 하지만 여전히 그 전쟁으로 희생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 나는 소설을 덮고 베트남전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어. 진실은 어쩔 땐 마음속 체기를 가시게 할 만큼 속을 뻥 뚫어주기도 하지만 어쩔 땐 차마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짐을 줄 만큼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지. 이 소설에 자리한 진실은 후자의 것이었어. 나는 오래 나의 무지에 부끄러움을 느꼈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슬픔이 이토록 많구나. 만약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슬픔을 배우려 한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단 알게 되면 나는 예전과 같을 수 없겠지. 그렇다면 내게 다가 올 타인의 슬픔 앞에서 나는 고개를 돌려야 하는 걸까? 그럴 수 있을까? 일그러진 타인의 얼굴 앞에서 나는 무심한 냉소를 보일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나는 순간이 오기도 했어.


다행히도 최은영 작가가 선사하는 수치와 부끄러움은 나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잔인한 형식이 아니야.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7편 모두 떠나보내거나 남은 사람들이 끈기 있게 그 관계의 의미와 떠난 사람의 마음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한쪽만을 탓하지도, 어그러지는 순간을 제멋대로 단정 짓지도 않으면서 상처가 남긴 서늘한 폐허를 바라보게 하지. 울음으로 꽉 채워진 날조된 슬픔을 이 작가의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찌질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솔직한 인물들을 바라보며 나 또한 여전히 홀로 질척이는 떠나간 자리들을 돌볼 수 있었어. 이별에 쿨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상처 받았음을 인정하기 싫어 쿨한 척할 뿐이지. 엄마도 여전히 질척이며 서성대는 몇 개의 과거를 가지고 있단다.




바로 엊그제였어. 옷장을 정리하면서 오디오북으로 작가의 ‘몫’이라는 단편을 듣다가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지. 아이고 삭신이야, 허리를 두드리며 먼지가 풀풀 나는 옷장 앞에 서있다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어. 대학 편집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의 굵직한 사회 이슈들 사이에서 소외된 여성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 모두가 돌보아야 할 상처임에도 누구 하나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아픔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여전히 그런 문제들을 지나치고 있는 나의 허약함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에 울컥 눈물이 터지더라. 나도 여자이고 나 역시 소소한 차별들을 자주 경험하고 사는 사람임에도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여러 문제들을 못 본 척했지. 어쩌면 그런 무관심이 나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화제가 되는 이슈 앞에서만 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었어. 역시 최은영 작가답다. 연습으로는 가질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질투조차 느낄 수 없어.


내가 아는 세계 너머를 사는 사람들. 소설은 미처 내 시선이 미치지 못한 세상의 구석에 불을 밝혀 시야를 넓히지. 그리고 최은영 작가는 특히나 길모퉁이 소외된 곳들을 자주 불 밝히는 작가야. 내가 알지 못하는 생과 사를 살피며 그동안 나 자신이 얼마나 자만심에 깃들어 있었나를 깨우치게 해 주지.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그것과 공감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아픔도 온전히 어루만질 수 있다고 생각해. 다수가 원하는 해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의기양양한 태도와 달리 자기들의 감정들도 깡그리 무시한 채 그 답안지 속으로 스스로를 구겨 넣는 실수를 하기도 하지. 공감에도 학습이 필요하듯 소설이라는 간접의 세계를 통해 상처를 배우는 일도 중요해. 미래에 너에게 닥칠 부정적 감정들에 미리 연습을 하는 거지. 그뿐일까. 감정의 근육들을 단련하면 언젠가 사랑하는 네 곁의 사람들이 어둠에 잠길 때 용기 있게 손을 내밀 수도 있어. 그 훈련을 하기에 소설만큼 탁월한 것이 없지. 물론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일은 금물이란다. 그건 정말이지 비겁해.


거대한 세계의 슬픔과 나 자신의 상처를 저울질하며 홀로 웅크리고 있을 때 이 작가의 문장이 너의 등을 토닥일 거야. 고작 이런 슬픔 따위,라고 웃어넘길 때 사실 누군가는 너의 상처를 미세한 현미경을 대고 바라봐주고 있다는 상상. 그것만으로도 힘이 나지 않아? 따지고 보면 세상에 고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작은 슬픔이 어디 있을까. 사랑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듯 슬픔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도 헛된 오만함이 아닐까?




앞서 이야기한 스트라우트도 최은영 작가도 다작을 하는 작가는 아니야. 그래서 내가 지닌 애정만큼이나 그들의 작품에 대한 갈급함이 크지. 하지만 그들의 결과물을 보노라면 느림을 감수한 것이 헛수고가 아님을 느껴. 얇게 뜯은 페스츄리가 완전히 녹아버릴 만큼 혀에 놓고 음미하듯이 나는 이들의 신간이 나올 때면 문장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완전히 녹아내릴 때까지 오래 음미해. 책을 덮고 모조리 읽어버렸다는 아쉬움이 들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똑같은 책을 펼쳤을 땐 처음과 다른 감정이 나를 찾아와. 그럼 난 다시 문단을 잘개 쪼개 혀밑에 굴리며 정신의 허기를 채워.


우리의 빈자리를 이들의 책이 채워줄 수는 없겠지만, 엄마 또한 가끔 홀로 된 마음으로 이 책들과 함께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은 우리가 너의 곁에 없다는 말이 무섭고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인간은 어느 때고 반드시 자기만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멀리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되니! 엄마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끔 길을 잃고 혼자가 돼.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나는 빈자리를 이렇게 채워. 너는 나보다 훨씬 잘해나갈 거야. 설령 우리가 곁에 없다 해도 말이야.


허나, 불안에 잠식되어 허덕이는 날도 있겠지. 살다 보면 강한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달랠 수 없는 날이 있어. 그럴 땐 집으로 와.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영원히 장담할 수 있는 우리 곁으로 와도 돼. 네가 묻는 질문들에 모두 대답해주지 못하는 날이 와도 네 존재가 가친 가친에 대한 대답은 언제든 해 줄 수 있으니까.



From. 학교 간 네가 보고 싶어 부엌에 서서 너의 교실 쪽을 자주 바라보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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