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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산다는 게 뭔지

(1) 필경사 바틀비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by 존치즈버거


To. 친애하는 코튼 킴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어. 너도 한 번쯤 들어 본 적 있을 거야.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지 뭐.” 혹은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


조막만 한 입 속으로 어찌나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지, 너의 두 볼이 갓 찐만두처럼 빵빵하게 부푼 채로 움직일 때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해. 에너지를 얻고 건강한 육체를 만들기 위해 잘 먹는 건 참 중요해. 무릇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먹고살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지만 인간만큼 복잡한 먹이사슬의 메커니즘을 가진 동물이 있을까 싶어. 먹고살려고 하는 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은 그 단순한 본능 앞에서 자신도 몰랐던 다양한 얼굴을 만나지. 그저 음식물을 섭취하는 일만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안전과 평온을 도모하는 일을 ‘먹고 산다’라는 말 한마디로 퉁 치기도 해.


먹기 위해 살다 혹은 살기 위해 먹다도 아닌 '먹고''살고' 가 동일 선상에 놓인다는 건, 우리 인생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뭉뚱그려 놓았을 때 어쩌면 그것이 가장 핵심이며 전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지. 먹기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해. 그 대가를 지불할 능력을 갖기 위해 인간은 일을 하지. 지금은 엄마와 아빠의 보호 아래 네가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시지만 언젠가 네가 먹을 건 네 힘으로 지불해야 하는 날이 온단다. 그때가 오면 엄마가 왜 버블티 2잔을 원하는 네 요구 앞에서 잠시 고민하는지 알게 될 거야. 하하!





의식주라는 삶의 기본 요소가 일을 해야 하는 당위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사실 일의 원동력은 그것을 넘어 선 차원의 것이기도 하지. 간단히 말해 자아실현. 앞으로 네가 학교나 사람들을 만났을 때 무수히 듣게 될 말이야.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직업들이 있고 너의 흥미와 욕구에 따라 다양한 직업군을 만나게 될 거야. 흥미와 일치하는 일을 하며 재능을 뽐내는 일을 할 수도 있고, 막연하지만 살아내고 싶은 삶을 그리며 그에 걸맞은 조건의 일을 구하게 될 수도 있어. 모든 선택은 너에게 달렸어. 하지만 선택한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일을 하기 위해선 그 일을 하기 위한 충분한 능력도 갖춰야 하지. 그래서 학교를 다니고 책을 읽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교육을 하는 거야. 이 지루한 과정을 잘 거쳐 내면 교과서가 말하는 ‘훌륭한 인재’가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건 엄청 이상적인 과정이고 사실 일을 구하고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멋지지는 않아. 그 일이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일이라도. 네가 좋아하는 게임도 그렇잖니. 대왕 몬스터를 무찌르고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선 수많은 쪼꼬미 몬스터들을 무찔러야 하지. 일도 그래. 그 성취의 크기가 어떻든 반드시 장애물을 넘어야 해. 장애물도 여러 가지야. 목표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일 수도 있고 일터를 구성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하는 결과물에 가닿지 못하는 나 자신의 미숙함 일수도 있고 정말 다양한 장애물들이 있어. 그걸 수없이 뛰어넘으며 보람을 느끼고 다시 더 큰 목표를 꿈꾸며 게임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와 쪼꼬미 몬스터들과 겨루는 거지.


물론 이것도 어쩌면 이상적인 설명일지 몰라. 일이 곧 나의 존재 증명이요, 일이 바로 나의 가치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정말 먹고 산다는 말의 무게를 실감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거든. 아직 희망으로 부푼 너의 몽글몽글한 바람들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에둘러 설명했지만 너도 언젠가 일 그 자체의 냉혹함을 마주하는 날이 오게 될 거야. 인생이란 참 쉽지 않아.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쩜 이렇게 복잡한지.


너도 언젠가 네 돈으로 버블티를 사 먹기 위해 직업을 구하고 일이라는 세계에 투신하는 날이 오게 되나니, 차마 내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의 비정함에 대해 소설로 알려주도록 할게. 내가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 봐야 잔소리 아니겠어? 먼저 “I would prefer not to.”라는 유행어를 남긴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 대해 알아보자.





월스트리트의 성공한 변호사가 이 소설의 화자야. 그는 터키와 니퍼즈라는 별명의 필경사 두 사람을 직원으로 부리고 있어. 일손이 모자란 그는 모집공고를 내고 문제의 필경사 바틀비가 사무실로 찾아와. 필경사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서류 작업을 대신해주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야. 어두워 보이지만 차분한 성품의 바틀비를 마음에 들어 한 변호사는 그를 고용해. '손쉬운 삶이 최고의 삶!'이라고 자부하는 변호사는 양심도 공감도 없는 인물이야. 엄청난 양의 업무를 주고 그 외 잡무도 시키면서 쥐꼬리만큼의 월급을 주지. 직원들을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그가 그들의 인간으로 존중하기보다는 부품처럼 여기기 때문이지. 바틀비는 처음에 그의 구미에 맞게 일을 잘해. 그러다 어느 날 이렇게 말하지. “I would prefer not to.” 바로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이지.


당황스럽지 않아? 그동안 일을 잘하다가 갑자기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라니? 나도 처음엔 바틀비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 일을 하고 그 대가를 얻기 위해 가는 곳이 직장이잖아. 그런데 바틀비는 멍하니 앉아서 창밖만 보고 뭘 시키든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고 하니 말이야. 그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한 건가? 노노! 바틀비는 그렇지도 않아. 그래서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선언과도 같지. 안 함의 세계에 머무르겠다는 선언. 그동안 변호사 사무실의 니퍼즈와 터키는 각종 질병과 정신적 질환에도 변호사가 시키는 일을 아무런 의문도 없이 해치우는 직원들이었어. 업무 이외의 일을 시켜도 그저 그것이 당연한 자신의 일인 듯 질문 하나 없었지. 변호사 입장에서 직원들의 그런 태도야말로 마땅한 것이었어. 하지만 바틀비가 안 함을 선택하자 완전히 상황이 변해. 정신적 붕괴, 한 마디로 멘탈붕괴가 일어난 거야.


처음에 이 소설은 황당하고 어이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의 과정을 보고 나면 수많은 질문과 의문들이 생겨나.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선택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잖아. 내가 오늘 무얼 먹고 싶고 어떤 걸 먹어야 합리적인 가격에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게 되는 건 우리에게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바람직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 아니겠어? 그런데 일을 할 때만큼은 왜 과도한 업무에도 무조건 충성하고 업무 이외에 자신이 하지 않아야 할 일에도 예스맨이 되어야만 하는 하지? 물론 나를 고용해 일을 맡기고 월급을 주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게 내가 한 일의 대가보다 훨씬 적은 데도 그저 만족해야만 하는 걸까? 작가인 하먼 멜빌은 산업화가 가속되던 1800년대 말, 관료제가 움트고 임금만 준다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착취할 수 있고 노동자를 인간이 아닌 기계 부품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일터의 부조리에 대해 바틀비의 저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의문을 제기하지. 당시만 해도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상실함에도 불구하고 관료제 하의 노동자는 주어지는 임무를 선택하거나 거절하기 어려웠어. 일하는 사람을 유용성으로 판단하고 그들을 도구화하는 시스템은 언제든 빈자리를 대체할 여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노동법이 존재하는 지금도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지만.


엄마도 요즘 들어 먹고 산다는 캐치프레이즈 안에서 벌어지는, 먹고살기 위해 존엄을 내어 주는 일에 대해 생각해. 취업난이 심각하고 불평등이 만연한 요새 내 몫의 일이 주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지만, 그로 인해 입으로 밥을 들이미는 만큼 내 영혼이 갉아 먹힌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섬뜩하다고 해야 하나?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제대로 보상은커녕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보다 더 아찔한 건 일의 세계에도 계급을 둬 어떤 사람의 죽음이 그 사람의 무능인양 쉽게 조롱당한다는 사실이지. 그전에 위험한 일터에서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들의 비극에는 그만큼 규칙적인 인간의 안일함이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입을 모아 토론해야 할 점은 그게 아닌가? 직업에는 귀천 없고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고 배웠는데 말이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엄마는 종종 순진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하지. 나이를 먹을 록 세상의 냉소와 부조리의 편에 서야 강한 인간인 것처럼 다뤄지거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는 기존의 관습들이 더 무능에 가까운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은 많은데 정답은 나도 모르겠네.


이 소설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건 바틀비의 내면에 대해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일 거야. 우리가 바틀비에 대해 얻는 정보는 모두 글의 화자인 변호사의 시선으로만 알 수 있지. 엄마는 이 소설의 탁월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객관이 제3자의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주관은 나만의 견해와 생각이 깃든 관점이야. 이 소설은 오로지 변호사의 말로만 진행되기에 그의 주관이 엄청 묻어나지. 사람 심리가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 거기에 동질감을 느끼게 되어 있어. 특히 중심인물이 바틀비처럼 요주의 인물인 경우 그를 관찰하는 사람의 시각에 기대게 되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변호사의 시선을 따라가며 오히려 바틀비를 이해하게 만들어. 역설적이지. 변호사의 견해를 들여다볼수록 변호사가 얼마나 속물적인 인간인지 깨닫게 만드니까. 아마 바틀비의 편에 서서 바틀비가 왜 이런 선언을 하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보여줬다면 오히려 효과가 떨어졌을 거야. 왜 어른들이 하는 말 있잖아. “야, 누군 안 힘드냐? 나도 그래. 나 때는 말이야…….”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이런 생각도 들더라. 어쩌면 그동안 바틀비는 강력하게 자신의 입장에 대해 설득했는데도 변호사가 그딴 거 중요하지 않으니 됐어, 라는 식으로 무시해왔던 게 아닐까. 사람이 말하는데 정작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니 그가 처절하게 내 짖는 비명을 그저 개 짖는 소리쯤으로 여겨서 기억에 없는 게 아닐까.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줄곧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일은 자신의 편의가 포함된 선택을 강요하거나 자기가 사는 세계의 정답만이 옳다고 고함지르는 것밖에 없거든. 결국 그가 하는 선언에 당황하며 자기 연민에만 빠져있을 뿐이지 어째서 바틀비가 그렇게 말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아.


변호사는 끝에 가서 바틀비를 남겨 두고 사무실을 이전해. 그리고 새 변호사가 들어와 바틀비를 내쫓고 거리의 부랑자가 된 바틀비는 유치장에 갇혀. 그는 거기서도 하지 않음을 선택해서 비극을 맞이해. 하지만 그게 비극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바틀비는 끝까지 자신의 선택을 지켜냈거든. 자신이 택한 하지 않음의 세계를 완벽히 살다 갔지.


시종 가식적인 얼굴로 미소를 잃지 않고 점잖은 말투 속에 협박을 담은 변호사가 조금이라도 그의 입장을 생각해보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변호사는 끝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지. 자신을 바틀비를 도우려고 엄청 고민했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바틀비를 무시해버렸어. 물론 바틀비의 죽음 후 변호사는 바틀비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게 되며 바틀비가 갑자기 왜 그런 뚱딴지같은 말을 하게 되었는지 알게 돼.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배운 세계의 매뉴얼에서만 해석할 뿐 그 이상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아. 그런 면에서 어쩌면 변호사야 말로 진정으로 수동적인 사람이 아닐까.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세계에 살며 스스로에게 조차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는 사람, 아, 어쩌면 질문하지 않아 기능이 퇴화된 사람. 사유가 없으면 질문도 없지. 질문은 대상의 본질과 그 이면을 알기 위한 끈질긴 관찰에서 출발하니까. 영원한 방관자에 머무른 변호사에게 자살 방조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너무 과한 걸까?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섬뜩해. 어쩌면 변호사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나도 초반에는 변호사의 입장에서 바틀비를 바라보았으니까.


먹고사는 건 너무 중요해. 부당한 상황에서도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지. 정작 잘못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닌데. 치사하고 더럽지만 먹고살려고 그런다는 말이 어른이 된 지금 무엇보다 실감하게 돼. 그렇지만, 어떤 어려움과 수고와 장애물들에도 인간의 존엄까지 받치며 먹고살아야 하는 일터는 최선을 다 해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존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마주하는 말들 “너무 예민하구나.” “다들 괜찮다는데 너만 왜 그러니.”같은 말들이 판단력을 흐리는 마취제처럼 투여되기도 하니까. 자만심만큼이나 억압에 취하면 내 안의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지.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고단한 사유를 저버리고 복종에 중독되고 말지.


바틀비가 매우 극단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인물이지만, 그보다 더 극단의 상황에 처하고 그보다 더 극단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뉴스를 장식하는 걸 보며 어쩌면 현실이 더욱 잔혹함을 느끼기도 해. 부당함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가해자들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 문제를 지적하고 대항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면서도 간사한 사람인지라 너만은 부조리의 세계를 완벽히 빗겨 나가길 간절히 기도하지. 그렇다고 변호사가 되는 편을 선택해야 할까? 글쎄, 데카르트란 철학자가 한 말이 있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더 높은 계층의 사다리를 올랐을 뿐이지 자신의 생각을 거세한 채 시스템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는 변호사는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고 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직업윤리만 지킨다면 일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반 이상은 줄텐데. 그 기본적 원칙을 지킨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 이상적 사상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막상 실험이 시작되면 인간의 욕망이라는 변수 앞에 전혀 다른 결과를 이끌어 내니까. 눈앞의 이익,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정직하고 묵묵히 일하는 게 바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 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부당함을 이겨내고 내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기쁨, 그게 더 쿨하지 않아? 조금 느리게 걸어도 정도를 걸으면 좋겠어. 지시와 강요된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기보다는 신중히 판단한 원칙을 지키며 너의 신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어려울 거야.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도 길은 있어. 일을 하다 보면 유유자적 노닐 여유와 몰두할 취미를 잃을 정도로 바쁜 순간도 오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존엄성만큼은 지키라는 거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니? 내가 좋아하는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이란 영화에 나오는 대사야. 가오는 폼을 속되게 가리키는 비속어로 쓰이니 자존심 정도로 대체하자.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그 교환가치 속에 우리의 영혼마저 팔 순 없지. 저당 잡힌 영혼으로 아무리 폼 잡는 들 본새가 날까. 인간으로 바로 서자. 일이든 뭐든 우리가 우리임을 지킬 때 삶은 어떻게든 돌아가니까.


그럼 다음으로 국가의 안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과 목숨을 함부로 다뤄도 되는 것인가, 라는 딜레마에 빠진 스파이의 이야기를 통해 직업적 윤리와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자. 바틀비와 다르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명감을 원동력으로 일을 해나가지.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물론 그 감정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지만. 얼마 전 타계한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는 소설이야. 제목부터 뭔가 의미 심장 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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