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필경사 바틀비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서구 냉전 상황이 극에 달한 1960년대의 베를린이 등장하며 소설이 시작돼. 당시만 해도 독일은 우리나라처럼 동독과 서독으로 갈려 장벽이 세워진 상황이었어.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 국가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공상권 영향 아래 있는 동유럽 국가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지. 동독은 서유럽 국가들과 대치중인 나라 중 하나였어. 당시를 냉전이라 부르는 이유는 피 튀기는 전쟁이나 무력을 사용한 충돌이 없이 소설에서 나오듯 스파이 활동을 통한 정보 싸움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야. 차가운 전쟁. 총성이 난무하는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발가락 끝까지 꽁꽁 얼어붙어 버린 긴장의 한 복판에 주인공이 등장하지. 냉정하고 빈틈없는 영국 정보부 요원인 리머스는 자신이 책임지던 독일 첩보망을 동독 정보부의 실권자인 문트라는 인물에게 처참히 파괴당해. 자신의 정보원이자 내부 스파이로 활동했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고 정보가 새자 리머스는 이제 스파이로서 자신의 경력은 끝이구나 생각해.
현장을 떠나 한직을 떠맡으며 영국에 머물고 있는 리머스에게 어느 날 ‘컨트롤’이라 불리는 관리인이 연락을 해오지. 스파이 요원이라 해도 정확히 컨트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어. 연락이 오면 명령이 무엇이든 복종하는 일만이 그들의 몫. 리머스에게 떨어진 명령은 독일의 이중스파이가 되어 그를 실패로 내몬 문트를 제거하라는 것이었어. 영국 정보부 안에도 이중 스파이는 존재하는 법. 독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아군까지 완벽히 속여야 했지. 리머스는 생활고를 겪고 알코올 중독을 일삼으며 피폐해진 모습으로 무능한 요원을 연기해. 그리고 영국 정보부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직하지. 알리바이를 위해 위장 취업한 도서관에서 영국의 공산당원인 리즈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돼.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야. 리머스는 사랑하는 리즈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겨.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소련의 스파이가 그에게 접근해. 리머스는 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척하며 그들을 교란시킬 조작된 이야기를 흘려. 적군의 시험을 우여곡절 끝에 통과한 리머스는 동독으로 가게 되며 점점 자신의 목표물인 문트와 가까워지지.
스파이를 떠올리면 으레 <007 시리즈>처럼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하고 현란한 액션을 생각할지 몰라. 미국식 첩보물에 익숙했던 나도 항상 스파이를 그런 식으로 연상했어. 존 르 카레라는 작가의 책을 만나고 편견은 깨졌지. 이 작가는 실제로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던 요원이었어. 그래서일까? 기존 스파이물이 가진 화려함이 전혀 없는, 어쩌면 심심해 보이고 극도로 조심스러운 소설의 이야기들이 오히려 스파이의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 스파이를 해보진 않았지만 스파이가 된다면 그건 존 르 카레의 소설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재미만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소설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작가의 소설에는 스파이라는 일반인들이 닿을 수 없는 특수한 세계의 뒤안길만이 아니라 첩보 과정을 통해 인간의 실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충분해. 실존이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거야. 그러니까 지상에 발 디딘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가지는 현실에서의 의미와 그 존재적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국가와 국가, 조직과 조직, 개인과 개인.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이며 어떻게 왜 존재하는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직업이 있지. 그중에는 단순한 밥벌이를 떠나 그 이상의 사명이 필요한 일이 있어. 사람의 생명이 달린 안전과 세계가 올바르게 작동하는 것에 관여하는 일들. 이를테면, 의사나 간호사, 법조인과 소방관, 경찰 혹은 응급구조사와 같은 일말이야. 상황에 대한 판단력과 타인의 인생이 좌우되는 일인 만큼 신중함 또한 요하지. 모든 직업이 사람들 삶에 중요하지만 이런 일들은 직업적 특수성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더 원칙적으로 직업적 윤리를 지켜야 해. 가끔 뉴스에서 벌어지는 이들과 관련된 일들 대부분이 직업적 윤리를 배반한 것에서 시작되지. 소설의 주인공의 직업인 스파이도 마찬가지겠지. 스파이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정보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이야. 특히 냉전 시대는 세계대전이라는 지난하고 끔찍한 전쟁을 겪은 후라 자칫 하다가는 무력 전쟁의 가능성이나 테러의 위험이 많았어. 그렇기에 스파이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명을 다 해 일해야 했어. 국가의 안위라는 것에는 조국의 미래와 시민의 생명이 모두 달린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그렇기에 스파이는 엄정하고 철저한 검증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굉장히 특수한 전문직이지. 그들이 아무리 임무를 잘 수행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켰다 해도 사람들은 알지 못해. 완벽한 결과에도 명예는커녕 제대로 된 칭찬은 바랄 수도 없지. 신분이 탄로 나면 끝장이니까. 그러니 그 어떤 일보다 사명감이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어. 해야만 하는 일이이게 행한다, 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채 위험한 작전을 펼치는 일. 고독한 국민의 수호자. 뭔가 쓸쓸하지만 멋지지 않아?
리머스는 숱한 임무 속에 살아남으며 사명을 위해 전력을 다 하지만 동독에서의 일을 겪으며 회의에 빠져. 자신의 희생으로 인해 국민이 안전하게 산다는 자부심을 원동력으로 시쳇말로 “까라면 까.”식의 무조건적인 명령에 무조건적인 복종.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듯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조국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일했지만, 익명의 존재로 가치가 없을 때는 철저히 버려지고 이용당하지. 이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믿으며 정보를 주던 가까운 이들도 작전이 끝나면 지체 없이 용도 폐기되어버려. 냉혹한 총성으로 메우는 공허. 연대와 단합은 전무하고 오래 몸담은 조직에서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지. 누적되는 피로와 매일 반복되는 긴장의 나날. 리머스가 사랑하는 여자 리즈는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공산당원이지만 그녀와 대화할수록 그녀의 신념 또한 바람직한 사상의 토대 위에 있음을 깨닫지. 그녀 또한 올바른 가치를 위해 공산당을 선택했을 뿐. ‘신념이란 도대체 뭐지?’ ‘나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거지?’ ‘한 나라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목숨이 낭비되는 지금 이 상황이 옳은가?’ ‘그들도 그들의 신념을 따를 뿐인데.’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명령을 수행하지만 리머스의 마음은 혼란이 가득 차지. 모든 것이 안갯속에 가려진 것 같은 상황. ‘문트’라는 분명한 목표물이 있지만 그것이 참인지도 알 수 없어.
그야말로 장기판 위의 말. 정작 게임판 위의 말들에게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법. 모든 움직임은 컨트롤러의 계획 하에 놓여 있지. 결말부 반전에서 리머스는 자신을 움직이는 권력의 민낯을 다시 한번 확인하지. 사건을 수행하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는 자부심 넘치는 얼굴의 스파이 따위는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아. 한 생명이 꺼지는 것을 보면서 스파이는 울 수 없어. 철저히 감정을 숨기고 컨트롤의 다음 연락을 기다릴 뿐. 그들에겐 애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아. 말 그대로 기계장치 속 톱니바퀴의 삶을 살고 있는 거지. 그들의 존재란 권력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 때만 가치를 발휘해. 이용 가치가 없으면 스파이 또한 가차 없이 폐기되지. 애초에 인간성을 거세당한 도구임을 알아챘을 땐 이미 총알이 그의 심장 바로 앞에 와 있을 때겠지.
난 스파이라는 존재가 언제나 흥미로웠어. 사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묵묵히 대업을 수행하는 삶. 나는 그들이 총을 든 성직자 같다고 늘 생각했지. 어쩌면 내가 절대 몸담을 수 없는 세계이기에 환상이 더 컸던 것 같아. 그들의 과정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거야.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리머스와 같은 생각을 했어. 서유럽도 동유럽도 스파이들 활동의 목표는 같아. 조국을 지키는 것. 다만 그들을 목숨 걸게 하는 이념이 다를 뿐이지. 이념에 의문이 드는 순간 스파이의 사명감도 흔들려. 한 번 흔들린 이념은 신념이 아닌 생존을 위해 투여되는 자기 최면이 되기도 해. 아무리 차가운 스파이라 해도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어. 생각하는 인간은 흔들리기 마련이 아닐까. 스파이의 삶은 끊임없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더군. 인간의 한계까지 내달려 고통을 맛보고 환멸을 느끼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임무에 뛰어들어야 하는 그들의 삶에 환상을 가지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어.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만 부패는 쉬워. 음식도 한 번 썩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지. 처리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어.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해선 많은 수고가 감수되지. 나의 이익을 위해 수고를 지연시키면 결국은 모조리 부패하고 말지.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결단의 칼을 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거대한 조직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그 직업의 명확한 목표 아래 직업적 윤리라는 원칙을 늘 가슴에 품어야 한다고. 무슨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 일일수록 그 직업의 윤리를 잊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그 직업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제일 먼저 손상하지. 사람의 목숨, 안전, 평등 같은 것들 말이야. 리머스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탁월한 스파이지. 스파이를 통해 생활은 가능하지만 자유가 없는 그의 삶을 생각한다면 보상은 사실상 전무하지. 부조리한 일터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고민하는 리머스는 어떤 면에서 판타지 같다는 생각도 들어. 나라면 소설에 등장하는 무수한 변절자들처럼 차라리 두둑하게 주머니나 챙길 생각부터 했을지 몰라. 인간적으로 너무 하잖아. 리머스를 움직이는 컨트롤, 그리고 그 컨트롤을 따라 올라가면 국가가 있겠지. 이 국가의 수장들이 썩은 뿌리를 과감하게 도려내지 않거나 자신들이 먼저 썩어 버린 덕에 무수한 생명과 귀한 사명이 소멸해버렸지.
어떤 일은 나라는 인간의 증명서가 될 만큼 인생의 모든 것이 되기도 하지. 반대로 어떤 일은 나의 존재를 흔들리게 만들 만큼 나를 처참히 짓밟는 수단이 되기도 해.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감내해야 할 고난이 생각보다 많아. 그렇다고 돈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건 내 안에 괴물 한 마리를 키우겠다 선언하는 것과 같지.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중요한 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느냐, 인생은 결국 태도의 문제랄까. 원하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이 너의 존엄과 영혼을 포로 삼아 대가에 매몰되게 만들지는 마. 우리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응원해. 하루하루 버티는 고단함을 알고 있으니. 그게 어떤 일이든 네 삶을 꾸려나가는 그 자체가 우리에겐 자랑이 될 거야.
From. 네 나이 때 지구방위대가 장래희망이었던 엄마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