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멍게는 어른이 되면 자신이 정착해서 살 곳을 찾는다고 해. 그리고 남은 인생의 평온을 위해 가장 칼로리 소모가 많이 되는 자신의 뇌를 먹어치운다고 하더라. 숨이 붙어 있기 위해서 뇌는 필요하지 않나 봐. 그렇게 뇌를 다 먹고 나면 식물처럼 한 자리에 붙박여 숨만 쉬고 살게 된대. 더 이상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는 거지. 예전 같았으면 “와우! 멍게 그러고 살았어?”라고 깔깔 웃었겠지만 요즘은 그럴 수 없어. 가끔 멍게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거든. 그리고 나 또한 멍게가 될까 두려워지기 시작했거든.
정의의 사도들이 악당을 응징하는 모험 소설을 좋아했어.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뒤마'의 책이라면 환장을 했었지. 워낙 어른들이 보여주는 부조리와 위선에 기겁을 하는 아이였으니, 저렇게 사는 게 어른이라면 나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겠다 다짐하기도 했어. 하지만 피터팬의 세계에서 살던 그 아이는 세상 풍파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느새 어른의 세계로 떠밀려 왔어. 진실을 위해 어렵고 고단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면서도 나 자신은 그럴 수 없다 쉽게 체념했지. 가치를 외치면서도 풍요가 주는 안락함에 점점 길들여지기 시작했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눈을 똑바로 뜨려 노력하지만 어떤 날에는 안간힘을 써도 눈이 자꾸만 감겨. 눈 감은 밤사이 일어난 일들을 나 스스로 알려하기보단 지나가는 풍문에 기대 지식인 듯 받아먹기도 했지. 왠지 빨라진 세계의 속도, 뻥 뚫린 고속도로에 올라온 듯 세계도 그만큼 빠르게 변해. 정보를 물어다 주는 메신저들은 수를 불리는데 나는 정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더라. 세상사 사람이라는 존재가 완벽하면 악인 선인을 가리기 쉽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판단될 수 있겠어? 내가 아무리 존경하는 인물이라도 365일 꼬박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밑바닥도 보겠지. 그 사람의 인생을 시시한 실수들로 판단할 수 없다 생각했는데 세상은 어쩐 일인지 그런 일을 벌이기도 해. 사건과 관계없는 내밀한 사생활을 들킨 죄로 사건과 상관없이 단두대에 오르기도 하지. 복잡하게 얽힌 사건 속에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여론이 정답이라 수긍하는 나날. 요즘 엄마는 진짜 무서워. 내가 이러다 멍게가 되는 게 아닌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야. 인간은 때론 실수를 하지. 하지만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가 생겼을 때 이 사회에 속한 시민으로서 사건의 본질을 생각하며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 쓸 필요 없다고? 글쎄, 한 개인이 자신이 저지른 일과는 무관하게 언론의 타깃이 되어 그간의 삶을 모두 부정당한다면 어떻겠어? 실제로 그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자극적인 기사 한 꼭지의 헤드라인을 통해서 사건의 전말이라는 게 제멋대로 판단되기도 하지. 억울하지 않겠어? 너무 거창한 예를 들어와닿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봐. 음, 어떤 게 좋을까? 그래, 방귀! 단어만 들어도 네가 깔깔 배를 잡는 그 방귀 말이야. 엘리베이터에 타서 방귀 냄새가 나는데 위치상 네가 꼈을 거라고 모두 생각해. 너는 절대 뀌지 않았어. 정작 방귀를 뀐 어른은 근엄한 얼굴로 정색을 하고 있지.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 중 가장 만만한 어린이인 네가 타깃이 되었어.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해도 누군가 네가 평소에 고구마를 좋아하니 당연히 네가 꼈을 거라고 누군가 말해. 사람들이 동조하고 너는 엘리베이터 방귀쟁이로 소문이 나는 거지. 어때? 엄청나게 억울하겠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오해받는 걸 세상 제일 싫어하는 너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거야. 물론 했다 해도 그걸 방귀와 전혀 상관없는 일들까지 엮어서 누군가 너를 놀린다면? 오늘 내가 이야기할 소설은 이런 것에 관련된 내용이야. 여론, 그러니까 ‘사회 대중의 공통된 의견’이 어떻게 날조되고 망가져 한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지. 그리고 여론을 형성하기에 책임을 가져야 하는 ‘언론’이라는 기관이 어떻게 그 잔인한 사회 살인의 과정에 선두가 되는지를 책은 잘 보여주고 있어.
하인리히 뵐이 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1970년대에 나온 독일 소설이야. 실제로 당시 독일의 언론사인 빌트지에서는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취재 없이 날조된 기사로 사람들을 호도했다고 해. 작가는 그런 무책임한 언론의 태도를 기초로 소설을 썼지. 시작은 이래.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여인이 경찰서에 나타나. 그리고 자신이 한 기자를 죽였노라 고백을 하지. 그리고 살인이 벌어지기 나흘 전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소설은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어. 어째서 평판 좋고 총명하며 부지런히 살아온 가정부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카타리나 블룸이 아예 잘못이 없는 건 아니야. 그녀 입장에서 따지자면 사랑에 빠진 죄! 그녀는 파티에서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서 첫눈에 반해. 남자도 그렇고. 그녀는 괴텐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 그리고 그 남자가 현재 여러 가지 혐의로 수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카타리나는 그가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잠복해 있는 경찰이 들이닥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카타리나가 도주를 도와준 그 사실에 대해서만 심판을 받아야겠지만 그녀는 이 일로 인생을 모조리 해부당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사정들까지도. 그리고 그 일을 벌이는 게 <차이퉁>이라는 신문사지. 겨우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카타리나의 인생은 완전히 발가벗겨지고 거짓으로 범벅이 됐지. 차이퉁의 기자인 퇴트게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삶을 망쳐놔. 암에 걸린 그녀의 엄마에게 페인트공으로 위장한 채 접근하고 엄마의 말을 악의적으로 꾸며 보도해. 엄마만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말을 전부 그렇게 만들어. <차이퉁>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신문이었고 그 신문에 비친 카타리나만 보면 공산주의자에 문란하고 부도덕한 인간이 따로 없지. 한 개인으로서 카타리나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는 일 밖에 없었어. 결국 카타리나는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이지. 사회적으로 한 사람을 살인한 기자에게 물리적 죽음을 선사한 카타리나에게 후회는 없어.
카타리나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성실한 태도로 일하고 주변의 신뢰를 얻었어.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주변에 치근대는 남자들에게 예의를 다 했지만 ‘수녀’라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철벽녀이기도 했지. 다만 갑작스레 다가 온 사랑에 마음이 흔들린 거야. 실상을 알 수 없는 표면으로만 드러난 이유들로 사람을 판단하기에 인간의 삶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지. 썩 괜찮은 미모의 여자와 범죄자라니 그럴듯하겠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도 아니니 즉각 대응도 힘들었지. 그러니 신문 부수를 올릴 자극적인 기사의 희생양이 되고 말아. 요즘에도 빈번히 볼 수 있는 일이야. 한낱 가정부가 포르셰를 탄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그녀는 주변의 호의에 더 해 정당한 대가도 지불한 그녀의 소유물인데도 무언가 부정한 기운이 있을 것 같다는 음모론은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섬뜩하지 않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상식에 반하는 편견으로 무장하고 산다는 게. 차가 없을 때 신사들의 차를 얻어 탄 것도 구설이 돼. 대가 없이 남자들이 친절을 베풀 리가 없다는 일명 ‘뇌내망상’이 여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스워.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태연한 그녀의 태도는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니 저 여자는 뭔가 구린 구석이 있을 것이다 짐작하는 게 정말 합당한 태도일까? 도대체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란 어디에서 온 걸까?
소설을 읽는 동안은 나도 이성이 살아 있는 인간처럼 기자들을 힐난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나도 실수를 하지. 가만 생각해보면 인간은 어떤 입장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가치판단이 작용하는 거 같아. 슬픈 일을 당하면 울어야 하고 범죄를 당한 피해자는 즐길 수 없고 내부고발자는 사생활에 있어서도 한없이 순결해야 한다는 뭐 그런 고정관념들 말이야. 완벽하지 않은 인간을 욕할 만큼 우리는 완벽한 생을 살았나 생각해보면 침묵밖에 답이 없지. 하지만 내가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저 사람은 휘말렸다는 자체가 이상한 권위 의식을 주는 것 같아. 나는 적어도 저런 일은 저지르지 않았어. 나는 적어도 네가 불쌍하다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삶을 살았구나. 순식간에 여론이 돌아서며 억울함이 깊어지는 일을 종종 봤어. 정작 올바른 판단이 내려져야 할 죄에 대해서는 유야무야 되고 말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이제 더 놀랍지 않아.
살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수에게 비판받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만약 그 사람이 정말 부도덕한 짓을 했다면 그 부분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는 있어도 말이야. 이성을 지닌 인간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한 판단 능력을 남용할 권리는 없잖아. 언론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그래. 자신의 주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다수의 지지를 받아 외톨이로 만드는 것. 가끔 학교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
명예란 세상이 인정할만한 재능이나 성취 혹은 인격적인 행동으로 우러름을 받는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훈장과도 같아. 명예를 부여받은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지. 여기에 쓰인 명예는 훼손된 명예를 가리킬 때 쓰는 의미와 더 가까울 거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지위나 인격적 가치에 흠집을 내고 손해를 입힐 때 우리는 ‘명예훼손’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를 하잖아. 아마 너도 뉴스에서 많이 들어봤을 단어야. 세간의 존경을 받지 않아도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각자 나름의 명예가 존재해. 지위나 인격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것이 훼손되었을 때의 고통은 어마어마하지. 그거 알아? 명예훼손은 고대 로마에서부터 존재했다는 걸. 그만큼 명예라는 단어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싸잡아 부정하게 만들고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지. 그건 정말 잔인하고 끔찍해.
혼란스럽게 얽힌 사건들 속에 진실을 보려는 노력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런 노력은 누명 쓴 한 개인에게 힘이 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살아감에 있어 큰 힘을 발휘할 거야. 매사 공명정대하고 옳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겠지. 가끔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할 거야. 하지만 나의 판단이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하면 신중할 수밖에 없어. 본질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실 귀찮고 힘들어. 하지만 꾸준히 연습하면 논리를 갖출 수 있어. 그 연습을 하는 거지. 자신이 차곡차곡 쌓아오며 예감 가능한 위기에는 자신의 과오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들이닥치는 위기는 사랑만큼이나 불시에 찾아와. 그리고 어떤 위기는 지루한 일상을 그리워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녀. 특히 우연히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는 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평소 이런 훈련을 꾸준히 하길 바라. 진실에 다가서 이면을 보려는 노력은 반드시 통찰이라는 선물로 너에게 선사될 거야. 함부로 호도하지 않는 사람만이 함부로 다뤄지지 말라 경고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