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친애하는 코튼 킴
나를 똑 닮아 수학을 질색하는 그대여! 다만 연산 문제에서도 실수를 하던 엄마와 달리 복잡한 문제들도 척척 푸는 널 보며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아니? 말장난 같은 서술형도 이제는 엄마의 도움 없이 해결하는 널 보면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이른 나이에 수포자의 길에 들어선 나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그래서 조금 욕심을 부려 볼까 해. 오늘 내가 추천하는 소설은 연산과 서술을 지나 네가 맞닥뜨리는 응용문제와도 같을 거야. 골치 아프고 어렵지만 도전할 가치가 있지.
작가의 이름은 제임스 설터야. 그는 다작을 하는 작가가 아니었어. 겨우 8편의 책을 내놓았지. 그중 두 번째 단편집인 ⌜아메리칸 급행열차⌟ 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어. 이 소설은 내가 추천한 소설들 중 역대급으로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대화가 왜 이렇게 진행되는 걸까?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잘 됐다는 거야 안 됐다는 거야? 읽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의문들이 네게 노크를 할 거야. 무언가 시작될 듯하면 갑자기 끝나고 요란하게 들썩이다가도 금세 냉정한 얼굴을 하지. 응징하고 싶은 인물들은 태연히 자기 삶을 살고 안타까운 죽음의 순간에도 끝까지 숨을 놓지 않던 사람은 별안간 삶을 마감해. 이 작가의 소설에는 빈 곳이 많아.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야. 그러니까 비어버린 곳, 삶의 공허나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폐허 같은 것이 등장한다는 이야기야. 그리고 작가는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 않아. 그것이 일으킨 작용에 대해서만 보여주지. 우리는 빈 곳을 스스로 짐작해 나가야 해. 그간 쌓아온 인생의 경험들을 반추하며. 혹은 내 안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들어가 나의 폐허를 바라보며. 그래서 웬만하면 가장 편한 자세로 제일 좋아하는 장소에서 홀로 읽는 편을 권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너의 지질함을 끄집어내야 할 거니까.
소설에는 총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어. <탕헤르 해변에서>, <20분>, <아메리칸 급행열차> <이국의 해변>, <영화>, <잃어버린 아들들>, <애크닐로>, <황혼>, <부정의 방식>, <괴테아눔의 파괴>, <흙>. 모든 단편이 소중해서 이 제목들을 다 불러보고 싶었어.
간결하다 못해 건조한 문체들. 오래 고민하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서사. 속독은 고사하고 챕터 하나하나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그만큼 가치를 지니지. 나는 그중 표제작인 <아메리칸 급행열차>를 제일 좋아해. 주인공인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성공한 변호사들이야. 친구사이였던 그들은 윗세대의 염려에도 자기들만의 기회를 잘 붙잡아 큰 성공을 맛봤지. 화려한 만큼 냉혹하기로 유명한 뉴욕 한 복판에 그들의 사무실을 차릴 정도로. 일찌감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그들의 인생은 거칠 것이 없어. 변호사들이 등장하는 치열한 법정물이냐고? 아니, 이 소설은 성취와 자만심이 만들어낸 그들 마음속 뒤틀린 욕망에 대해 말해. 그들은 진창에 푹푹 빠져 온몸을 더럽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죄책감 대신 차라리 더 깊은 타락에 몸을 던져. 이른 성공이 가져다준 공허와 성공한 이들이 누리는 방종을 이토록 세련되고 군더더기 없이 그린 작품이 또 없지. 소설은 이들이 벌인 각종 기행을 낱낱이 파헤치진 않지만, 그들이 유럽에서 보여주는 행동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타락에 익숙해진 사람들인지 알 수 있어. 사냥하듯 어린 소녀를 낚아채고 함께 공유하지. 서늘한 문장들엔 사이가 많아. 그래서 자극적이진 않지만 그들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무감한 상태인지가 더 잘 보여. 어떤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에 죄짓기를 멈추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죄책감마저 극복하려는 듯 자신을 더욱 타락으로 내몰지. 소설 속 인물들은 후자야. 그렇다고 그들이 천하의 나쁜 놈이며 무자비한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 전형적인 악당과는 거리가 멀지. 강압과 폭력 대신 회유와 유혹을 건네. 그리고 어린 소녀는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값비싼 유혹 앞에 무너져.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야. 성공을 함께 이룬 두 친구는 쾌락 앞에 다시 동맹을 맺지. 두 사람은 홀로 갈등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들에 빠지기도 하지만 금세 구원돼. 구원은 지독하게 나쁜 것들이 대신하지. 소중한 것, 이를테면 이제 두 살이 된 딸 카미유를 되찾고 싶지만 그들은 알아. 이제는 자신들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아쉽게도 그들의 파국은 소설에 등장하지 않아. 정당한 노동으로 하루를 꾸려가는 젊은이들을 내려다보는 그들의 시선으로 끝을 맺지. 남들보다 앞당긴 성공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마저 사치 부리지. 절제되지 않는 쾌락이 과연 성공의 결실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긋난 욕망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 돌아갈 수 없는 시절과 이제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충만함, 수치심과 좌절, 불현듯 깨닫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 이 소설에 깃들어 있어. 잘난 체하며 턱을 괴고 있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읊조리기도 해.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읽고 나면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허처럼 느껴지기도 해.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허상이지 않았을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작가는 복잡한 인생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해. 단정적이기보다는 효과적이고 그래서 더 가슴에 남아. 대단한 작가야.
상처 받았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어긋나는 욕망을 붙잡을 힘이 없어서, 자신이 실패를 용인할 수 없어서 사람들은 가끔 딴소리를 하지. 아이들도 그러긴 하지만 어른이 더 심해. 그놈의 냉소. 그 냉소 뒤에 파르르 몸을 떠는 내면의 나를 마주할 수 없다면 영원히 공갈빵 같은 인생이지 않을까? 공갈빵 알아? 딱딱한 껍질로 잔뜩 부풀어 있는데 손가락을 톡 대면 금세 바사삭 부서져 버리는 빵이야. 요즘은 잘 안 팔아. 아무튼, 그렇게 말이야.
살다 보면 그런 거 같아. 정말 100퍼센트 솔직하게 나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 놓고 살 수가 없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까진 그저 짐작에 그치지 않아. 그리고 그러한 짐작들도 대부분 오해에 가깝지. 툭 터놓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각자의 상황에 따라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오면 상처를 받기도 해. 그런 감정들이 쌓이다 해소되지 못하면 더 큰 감정의 골이 생기지. 주위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을 수 없으니 나이를 먹다 보면 그렇게 수어 개의 감정의 골을 품고 살아.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인간은 타인의 진실을 외면하며 나를 소외시킨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마음만 돌보는 사람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지. 엄마도 가끔 그래.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자주. 내가 나로 사니 당연히 나 자신에 대해 다 알고 나를 둘러싼 주위의 상황들도 알거라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소설 속엔 사회적으로 권위를 가진 인물들도 많이 나오지. 통장 잔고 걱정 안 하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한량 같은 사람들. 정말 부러워 죽겠다. 그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 대화는 자주 어긋나서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미간을 찌푸리게 돼.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같은 문장을 반복해야만 어렴풋이 의미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지. 그래서 자꾸만 나를 낯설게 만드는 이 소설이 더 우리 삶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자주 은폐하지. 심지어 스스로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매끄러운 삶을 위해 우리는 모난 부분의 조각을 자기 안으로 감춰야 해. 진공청소기라도 된 것처럼 요란하게 흩어진 감정의 부스러기와 치욕이 남긴 알갱이를 말끔히 들이켜야 하지. 어른들이 둘러 모여 하나마나한 이야기들로 시간을 때우는 모습을 자주 볼 거야. 사실 진짜 인생은 그 너머에 있을 텐데. 가끔 드러나는 상대의 맨얼굴을 외면하며 우리는 그 이야기에 사활이 달린 듯 우리 자신을 그 안에 매몰시켜. 아파트와 주식과 8학군과 코인의 너머에 있는 진짜 우리의 위기는 만질 수 없기에 외면되기 쉽지.
나만 견딜 수 없는 걸까? 자주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졌었어. 모두들 행복한 거 같고 모두들 자기 몫을 수행하는 거 같은데 나만 변방의 외톨이로 떠돌고 있는 기분이 들었거든. 남들이 보기엔 그럴싸한 면들도 있었지. 우쭐해서 그런 면을 더 부각하며 본래 몸집보다 더 부푼 나 자신을 연기했지만 누구보다 나는 알았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나 자신의 구석구석을 소외된 부분 하나 없이 살핀다는 게. 공허하고 무의미한 나날들이 지속될수록 나는 저 뒤편에 감춰진 진실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믿어. 드러나지 않는 것 혹은 비어버린 공간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아니면 존재했었는지 생각하기. 이것도 연습이 필요해. 그 상실의 주체가 내가 되었을 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균형을 잡기 위해선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하고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선 지탱할 힘이 필요해. 단련된 근육만큼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없지. 희망과 긍정의 기운만으로 인간은 버티지 못해. 우리 삶에는 시간적 한계가 있으니 직접적으로 부딪히기만 하겠다는 건 무모해. 몸의 근육을 운동 키우듯이 마음의 근육은 성실한 사유에서 비롯되지. 독서만큼 좋은 게 없어. 소설이 정말 우리 삶에 쓸모가 있을까? 글쎄, 충실히 읽어 온 사람의 내면은 함부로 무너지지 않아.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기 실린 11편의 단편은 모두 놓쳐서는 안 될 작품들이야. 그것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되짚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직접 읽고 그 안에 깃든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는 일 자체가 중요하거든. 인간의 생명을 놓고 생각하자면 인생이라는 건 정말이지 거룩하고 위대하지만 사람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생각하면 마냥 시간의 견딤인가 싶을 정도로 허무한 날이 많아. 내가 가진 것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심장 한가운데가 뻥 뚫린 기분. 그 허무를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써 위장해도 죽음의 사투를 벌이며 힘겹게 집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지. 느닷없이 때려눕히는 삶에 맞서 우린 보란 듯이 일어나야 해.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나의 어둠을 모조리 발가벗기는 작가의 소설 앞에서 나는 되레 삶의 의지를 다져. 대부분의 인생은 지리멸렬해. 그 지리멸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꿈과 희망만큼이나 세계와 나 자신을 바로 보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왜 하필 엄마가 이런 어려운 소설을 추천해주는가 원망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읽어봤으면 좋겠어. 모두가 조금씩 비틀린 채 견디며 나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위안이 될 거야. ‘힘내.’ ‘할 수 있어.’ ‘너는 문제없어.’ 이런 말들보다, 오히려, 더.
From. 네가 보지 않을 땐 가끔 비틀비틀 걷기도 하는 엄마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