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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향수를 이야기하는 두 가지 방식.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미드나잇 인 파리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노스탤지어’라는 단어는 나에게 유치환의 시에 등장하는 시어로 처음 등장했다. 맑고 곧은 정신과 이념의 푯대이지만, 그 끝에는 애수를 휘날리는 손수건이 묶여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다. 이게 내가 가진 ‘노스탤지어’라는 단어의 이미지이자, 아마도 그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정의일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는 두 영화를 다룰 것이다. 


노스탤지어는 추억이다. 또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현재에 대한,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노스탤지어는 상실을 동반한다. 과거를 추억하는 행위의 동기는 결국 그 시공간에 대한 열망이지만, 그 열망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노스탤지어는 곧 상실로 직결된다. 그렇기에 노스탤지어는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돌아갈 수 없음을 알지만 돌아가기를 계속해서 희망하는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의 역순행적 구성 또한 이러한 아이러니를 담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자에서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상실감을, 후자에서는 선형적 전개를 따르는 플롯의 변화를 통해 주인공이 느끼는 신비함을 강조해냈다. 그리고 이 구성은 결국 시간과 관련된 아이러니를 드러내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에게 오묘한 슬픔을 전달한다. 이후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


노스탤지어, 과거를 회상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대조와 대구. 이는 노스탤지어의 아이러니에 대한 자세이기도 하다. 대조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동시에 현재는 과거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하는 관점이고, 대구는 과거로 향한 열망과 현재의 열망을 동일 선상에 놓고 살펴보는 관점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대조를, <미드나잇 인 파리>는 대구를 활용해 각각 훌륭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독특한 구성과 연출로 유명하다. ‘액자식 구성’이라고 언급했는데, 아무래도 일반적인 액자식 구성과 같게 취급하면 안 될 것이다. 영화의 프롤로그 부분을 따라가 보자. 맨 처음은 공동묘지에서 시작한다. 한 소녀가 어떤 작가의 기념비에 열쇠고리를 건다. 그 후 소녀는 벤치에 앉아서 책을 바라본다. 그 책에는 기념비의 주인인 작가의 사진이 있다. 이후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넘어가며 시점이 바뀐다. 노년의 작가는 자신이 젊었을 때 거의 무너져가는 한 호텔에 머물었던 이야기를 한다. 시점은 다시 작가가 젊었을 때로 바뀐다. 젊은 작가는 그 호텔에서 주인 제로 무스타파를 만나게 되고, 제로가 호텔을 어떻게 사게 되었는지 듣게 된다. 이제 제로의 시점으로 들어간다. 제로는 본인이 로비 보이였을 시절에 당시 호텔 관리자였던 구스타브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휘말려 누명을 쓰게 되었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게 이 영화의 프롤로그다. ‘소녀 - 노년의 작가 - 젊은 작가 - 제로 - 구스타브’로 이어지는 이 영화는 총 네 개의 액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액자의 매력은 영화가 마무리되어서야 발산된다. 제로의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액자로부터 하나하나씩 빠져나올 때 감독 웨스 앤더슨은 여운을 남길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정작 낭만이 넘치고 아름다웠던 시기, 구스타브의 이야기는 방대하게 풀어냈지만, 그 이후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는 그 깊은 액자 속에서 바깥으로 쫓겨나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상실을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현세대가 경험하지도 않았던 시대와 낭만을 강제적으로 들여다보게 한 후 상실감을 안겨주며 퇴장시킨다. 이것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매력이자 주제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살리기 위해서 감독이 선택한 것은 ‘대조’의 전략이다. 낭만과 문학이 흘러넘치는 구스타브의 시대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대조시켜서 더 큰 상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제목부터 한때 매우 잘나갔지만, 지금은 허름해져 버린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대조’의 대부분은 연출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인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작품이 과거와 현재에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과거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그림이었고, 본 주인이었던 마담 D.가 사망하면서 구스타브에게 작품을 유산으로 남기자 마담 D.의 아들이 이를 되찾기 위해 구스타브에게 누명을 씌울 정도였다. 그러나 젊은 작가가 무너져가는 호텔에 갔을 때 ‘사과를 든 소년’은 좁은 프런트에 삐뚤게 걸려서 매니저의 담배 연기를 맞고 있었다. 예술적 가치의 몰락인 것이다. 개인적인 것도 아닌, 시대적인 몰락이다. 또 구스타브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해결책이 되었던 것은 구스타브 자신의 낭만이었다. 여인의 장례식에 가는 길에 제로가 군인에게 붙잡혀 진압당할 뻔했을 때, 그 경찰의 상관이 구스타브에게 은혜를 입었던 덕을 기억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또 탈옥 직후 갈 곳이 없을 때에도 ‘십자 열쇠 협회’의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전개들을 우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구스타브가 가진 낭만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구스타브의 마지막 순간을 보면, 기차 안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지만, 구스타브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군인의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구스타브의 낭만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구스타브의 마지막 장면의 연출 또한 대조를 보여준다. 이전까지는 웨스 앤더슨의 주력인 화려한 파스텔톤 색감으로 화면을 채웠다면, 그 장면에서는 흑백으로 처리했다. 시각적 아름다움이 풍부했던 때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시대를 대조하여 보여준 것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는 반대로 대구의 전략을 택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은 아무래도 플롯이다. 기존의 시간 조작과 관련된 영화들에서는 ‘현재‘와 ‘과거’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의 몇몇 영화들은 아닌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이 영화는 현실과 과거의 시간대가 한 공간에서 혼재되어 나타난다. 공간은 여전하기 때문에 주인공인 길의 삶은 여전하다. 길은 현재에서든 과거에서든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시간대가 달라짐에 따라 주변 환경과 길의 관계는 달라진다. 현재 시간대에서 길은 대부분의 일정을 자신의 약혼녀 이네즈와 이네즈의 부모님, 혹은 이네즈의 친구 폴 부부와 함께 보낸다. 그러나 이들은 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4명의 무리에서 길이 항상 겉도는 듯한 인상을 느낄 수 있다. 연출에서도 이는 매우 중요하게 나타나는데, 4명 가운데 길을 제외한 3명을 카메라로 비추다가 길이 들어오거나, 4명에서 길이 스스로 빠져나가 3명이 남는 구도가 많이 등장한다. 이는 현재 시간대에서 길과 그 주변 환경의 부조화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시간대에서 길은 그 환경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자신의 ‘황금기적 사고(golden age thinking)’을 비웃는 현재의 사람들과는 달리, 길은 넘치는 상상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과거의 사람들과 더 깊이 교감한다. 현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여주지 않는 자신의 소설을 과거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보여준 것을 생각해보라. 1920년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길은 항상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합류해 파티로 떠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런 복잡하고도 명확한 플롯 속에서 우디 앨런은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인 노스탤지어에 대해 대구로 답한다. 바로 길과 아드리아나의 대구이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 비교의 대상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둘은 서로 같은 자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길은 할리우드에서 영화 각본을 쓰다가 소설을 쓰기 위해 파리로 왔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아드리아나는 의상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이 둘 모두 정부가 있는 동시에 서로 사랑하며, 자기 나름의 황금기를 꿈꾼다. 영화 막바지에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낭만 속에 머무른다. 길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낭만인 파리에 머물러 새로운 인연을 찾는다. 결국, 길과 아드리아나는 사실상 같은 사람인 것이다. 길이 어떻게 이네즈와의 약혼을 깨고 자신의 낭만을 찾을 수 있었는가. 결국, 아드리아나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일종의 허상 속 자아를 투영시켜 답을 찾은 것이다. 길이 실제로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갔을 수도 있지만, 현재 시간대에서의 결론만을 놓고도 생각해보자. 길은 파리에 와서 소설을 쓰던 중 자신의 낭만을 찾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고 이네즈와의 약혼을 취소한 후 파리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때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곧 영화에서는 과거의 시간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어쩌면 가이드가 읽어준 ‘아드리아나’라는 여인의 일기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길은 허상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해답을 찾는다. 즉, 노스탤지어와 황금기를 향한 낭만이 가져오는 상실감에 대해 길은 대구를 통해 답을 찾았고, 우디 앨런은 우리에게 대구를 통해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 가진 낭만과 향수를 콕 짚어 우리와 길과 아드리아나를 동일 선상에 놓이게 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 또한 우리와 영화 사이의 대구이다.


노스탤지어는 종종 쓸데없는 몽상으로 치부된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폴은 노스탤지어를 ‘황금기적 사고‘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의미 없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맥락에서 폴이 현실을 의미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도 이와 같은 현실적인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저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변명이라는 지적 말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며 주인공 길에게 몰입될수록 우리가 느끼는 현실과 상상(혹은 과거 시간대의 현실) 사이의 간극, 혹은 우리의 현실과 영화 사이의 간극이 넓어짐을 느끼는 것에도 이 현실적인 지적은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도 영화 속으로 들어가 길과 같은 경험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낭만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현실에 불만족을 심어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점이 바로 <미드나잇 인 파리>가 남긴 노스탤지어에 대한 숙제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도 노스탤지어에 대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노스탤지어에 대해 우리에게 ‘상실‘에 대한 깊은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노스탤지어는 상실을 동반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꿈꾸는 향수의 시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상실감도 커져간다. 결국 노스탤지어 자체는 소극적 행복에 그칠 수밖에 없고, 우리는 향수를 느끼면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복잡한 액자식 구성을 통해 노스탤지어의 상실감을 증폭시킨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각각의 영화가 제기하는 노스탤지어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해답은 각각의 반대편에서 찾을 수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노스탤지어가 현실의 부정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이야기하며 그렇기에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며 우리가 느낀 노스탤지어는 과연 현실의 부정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은 분명히 구스타브의 시대를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며, 이 영화가 끝나고 드는 상실감은 우리 스스로가 구스타브와 같은 시대를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구스타브의 시대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며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저 과거의 가치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연민과 슬픔을 느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부정을 수반하지 않는 노스탤지어는 존재할 수 있고, 이는 더욱 성숙한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행위가 아닌, 과거의 가치를 다시금 살펴보고 우리 현실에 반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의 상실과 관련된 딜레마는 <미드나잇 인 파리>로 해결할 수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이 느낄 상실은 아드리아나이다. 자신이 꿈꾸고 그리던 황금기의 낭만의 집약이 바로 아드리아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황금기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고집하던 길은 자신의 복제품이자 낭만의 결정체인 아드리아나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길은 아드리아나를 떠나보내며 상실감을 느끼기보다, 현실로 돌아온 자신을 위한 깨달음을 얻었다. 노스탤지어를 통해 낭만을 고찰하며,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자신의 낭만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노력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길에게는 파리에 정착해 소설을 쓰는 것이 되겠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스탤지어를 통해 상실감만 얻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노스탤지어를 통해 우리가 그리워하고 이루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 가치들을 직접 대면하여 현실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로써 노스탤지어가 주는 상실감에 좌절하지 않고 우리의 가치를 실현할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상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상실을 극복하는, 니체가 이야기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방식이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노스탤지어를 그린 영화들이다. 그냥 영화라기보다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구체화시켜 아름다운 스토리를 만든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특별한 것은, 이 두 편의 영화는 노스탤지어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오묘한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노스탤지어와 향수에 관한 고찰 속에 이 두 편의 영화가 언제나 녹아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2278388/mediaviewer/rm3406353408?ref_=ttmi_mi_all_sf_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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