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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그 누가 악을 교정하는가.

이터널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만일 마블이 회사가 아닌 일종의 예술 크루였다면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이후 마블은 해체되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방면에서 <어벤져스: 엔드 게임>은 최고치이자 종결점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블의 행적은 마치 밴드가 은퇴를 알리듯 끝날 수 없다. 애석하게도 마블은 본질적으로 기업이고 이익 집단이기에 경영을 이어나가야 한다. 


마블은 <어벤져스: 엔드 게임> 직후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을 발표했고, 코로나의 2020년을 넘긴 후 작년부터 현재까지 <블랙 위도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이터널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총 4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했다. (아쉽게도 필자는 아직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품에 관한 언급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전까지의 MCU 시리즈 영화들과 비교해 보면 꼭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어찌 되었든 마블의 필모그래피는 나름 순탄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으로 만들어낸 대중과 평단의 고무적인 반등을 생각하면 2022년부터의 개봉 영화들이 더욱 큰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마블의 성공은 단순히 이익 모델의 운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마블이 지난 대략 5년동안 이루어낸 문화적 성취는 슈퍼히어로라는 서브장르에 깊이와 완성도를 더해 대중에게 복합적인 카타르시스를 전달하게끔 발전시켰다는 데에 있다. 물론 <왓치맨>이나 <다크 나이트>같은 놀라운 장르영화 작품들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슈퍼히어로 장르는 유치하다’라는 인식을 없애는 데엔 마블의 일조가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는 그 전작인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소코비아 사태를 일개 영웅담이 아닌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조명했다. <블랙팬서>에선 흑인 문제에 대해 다루었고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언론과 시민으로서의 윤리를 다루었다. 결국 각각의 작품들은 위기-갈등-승리로 끝을 맺는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우리 사회와 철학을 담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의 팝 문화에 대한 향수, <어벤져스>에서의 ‘세계관’이라는 개념의 탄생 등 마블의 장편 영화들은 유치한 만화 원작의 서브컬쳐라는 편견에 응전을 시도해왔고 지금까지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근의 마블 장편 영화들은 이전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부터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거쳐 현재까지 마블의 장편들은 하나의 대주제 속에서 특정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 글에서 살펴볼 것은, 이전부터 보였지만 최근 들어 더욱 돋보이는, 최근 마블 영화들이 고수하는 철학적 사조이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자.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울트론의 창조를 두고 일어났던 히어로 간의 갈등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이다. 다만 이때에는 ‘울트론’이라는 세부적인 소재를 놓고 다루었기에 그 깊이가 얕으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이러한 논지를 소코비아 협정으로 이어받아 같은 주제를 심화시킨다. 그리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더욱 추상적인 서술을 보여주며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핵심 대립 중 하나인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타노스라는 캐릭터 자체가 전 우주를 위해 그 생명체의 절반을 희생시키려는 인물이기에 이는 적절한 방향의 설정이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대의를 위한 희생과 절대적인 정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순간들도 자주 등장한다. 타노스는 소울 스톤을 위해 가모라를 살해했지만 스타로드는 소울 스톤의 위치를 알고 있는 가모라를 죽이지 못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의를 위한 명목으로 타임 스톤을 파괴하지 않았고, 어벤져스는 같은 이유로 비전의 마인드 스톤을 파괴하지 않았다. 캡틴 아메리카의 “We don’t trade lives”도 같은 맥락이다. 즉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의 인물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의 비극적인 엔딩에도 소수의 희생을 택하지 않은 자들이 책임져야 할 숙명임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흐름에는 슈퍼히어로 장르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전에도 다른 글에서 서술한 바 있지만, 슈퍼히어로는 정의에 대한 담론을 담기에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히어로와 악당의 대립은 곧 선악의 대립이며 정의에 대한 토론이다. 장르 자체가 정의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히어로들의 폭력은 정당화되는가, 절대선이란 존재하는가 등등의 물음은 매우 고전적인 장르적 접근이다. 여기에 현대적인 간을 더한 것이 바로 마블 영화인 격이다. 자유의 국가인 미국에서 파생된 뉴웨이브인 만큼 지극히 미국적인 사상이 반영되어야 할 노릇이며, 마블의 신자유주의 주창은 이에 알맞게 퍼져나갔다.


허나 최근 이러한 마블의 방향성은 단순히 명쾌하지만은 않다. 우선 작품들을 잠시 살펴보자.


<이터널스>는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이후 개봉한 마블의 장편영화이고 <노매드랜드>로 비평적 성공을 거둔 클로이 자오의 작품이다. <이터널스>는 MCU 영화의 계보에서 아주 독특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제작된 마블의 장편 영화 중 가장 작가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클로이 자오가 감독을 맡는다는 소식만으로 기대와 걱정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영화의 개봉은 관객의 반신반의한 감정을 양쪽 모두 증폭시켜주었다. 다시 말해, 감독의 작가주의 노선이 연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화면 비울과 연출의 유기적 구성,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연상케하는 오브제 등등이 그렇다. 다만 이전작들만큼의 상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을 보아, 마블에서도 과감한 선택을 내렸고 이는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이터널스>의 각본은 대담하다. 우선 문명의 기원을 다루는 슈퍼히어로 장르 영화도 드문 데다가 대거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들 또한 영화 제작의 난이도를 높이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신화의 차용, 거대한 규모의 설정과 복잡한 이해관계까지, <이터널스>의 각본은 완성도 있는 형태를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손을 많이 벌여 놓았다. 그렇기에 <이터널스>의 각본이 허술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그나마 인상 깊은 부분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드루이그의 서사일 것이다. 사실 클리셰적이기도 하지만 배리 케오건의 뛰어난 역량으로 드루이그의 대사와 행동은 작품 속 여느 인물보다도 깊게 느껴진다. 안젤리나 졸리 역의 테나도 인상 깊은 지점 중 하나이다. 전쟁의 여신인 테나가 매드 워리(mad weary) 증상을 앓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쟁의 여신이 힘을 잃는 것이 역설적으로 이터널스에게 위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전쟁과 문명은 불가분적인 대상임을 밝힌다. 


결국 <이터널스>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 마블의 과감한 도전이자 실험이었고, 그 정도의 의의면 충분해 보인다.


또 다른 영화는 멀티버스 붐을 일으킨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다. 이전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전부 모인다는 가십만으로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불러일으켰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여러 방면에서 관객의 기대치를 완전히 채워주었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 때에도 보았지만 마블의 팬서비스는 항상 부족한 법이 없다. 물론 경영 전략으로서 자리 잡히긴 했지만, 그 자체만으로 장르 역사에 발자취를 남길 만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팬을 향한 마블의 저격은 단순한 사업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작 기술의 활약으로 마블은 관객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스크린에 옮길 수 있었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이는 작품 전체를 휘감는 테마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시각적인 완성도도 훌륭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 특유의 스윙 액션은 한 명으로도 화면을 전부 채울 정도로 역동적이지만, 세 명의 스파이더맨을 한 화면에 담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테크닉의 문제였을 테지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그 기술적인 목표치에 충분히 도달한 듯하다. 스파이더맨 외의 다른 빌런들이나 캐릭터들도 뛰어난 연출의 뒷받침을 받아 빛을 발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두 작품의 연결성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이 두 작품은 완전히 같은 인물의 동기와 중심 서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터널스는 셀레스티얼와 새로운 10억 년의 우주, 그리고 지구와 인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스파이더맨 또한 무한한 멀티버스로부터의 위협과 눈앞의 악당들을 위한 치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결국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모두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과 개개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블의 철학적 방향성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이터널스>의 이터널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스파이더맨과 친구들로, 전자에서의 아리솀과 이카리스 일당은 후자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로, 전자에서의 지구와 인류는 후자에서의 닥터 옥토퍼스 등의 악당으로 대응된다. 전자에서 세르시가 지구를 위해 셀레스티얼을 제압하는 것은 후자에서 스파이더맨이 멀티버스의 질서를 바로잡지 않고 악당들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과 동등하다. 


이만이 아니다. <이터널스>에서의 악인은 이카리스이다. 하지만 이카리스의 동기는 전역적인 시각에서 특별히 악하다고 할 수 없다. 이카리스는 자신의 창조주인 아리솀에 대한 무한한 충성으로 자신의 숙명을 다하려고 하는 것뿐이며, 인류가 셀레스티얼을 위해 잉태된 <이터널스>의 세계관에서 이카리스의 신념은 충분히 정당하다. 허나 이는 세르시 일당의 박애주의에 전면으로 대립하는 행동이기에 작품에서 악인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파이더맨과 대립하는 닥터 스트레인지는 멀티버스의 혼돈을 잠재우기 위해 작중의 악당을 제압하려 스파이더맨의 박애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즉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가 공유하는 것은 서사뿐만이 아니다. 히어로들의 무제한적 박애주의와 운명론을 등에 업은 악인의 대립이라는 구조 또한 동일하다.  사실 이러한 기조는 이전의 영화들에서도 강하게 드러났다. 가장 좋은 예시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는 어벤져스의 박애주의 정신에 반하는 자신만의 대의를 가지고 이를 실행하려고 하는 캐릭터였다. 물론 그 대의 자체의 논리적 오류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충분히 보아왔지만 그와 별개로 타노스라는 캐릭터가 악인이 되는 이유는 그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악인과의 대립은 곧 어벤져스가 (타노스의 논리에 의하면) 전 우주의 미래와 현재의 생명 사이에서 후자의 손을 드는 결정으로 이어진다.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철학적 기저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또는 그 이전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등의 마블의 이전 가치들과 맞아떨어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는 순간 마블의 연속된 어조에서 미세한 입장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마블이 제시해왔던 철학적 딜레마와 관련이 있다. 숙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우선 동의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대의라는 것은 공동체의 가치를 위함이다. 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공동체의 가치 수호를 우선시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공상에 가까울 이야기일 때가 많다. 소수의 희생이 공동체의 가치 수호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타노스의 논리대로 생명의 절반을 말살하면 나머지 절반이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논리는 지나친 비약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논리이다. 다른 식의 논거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희생이 무조건 다수의 행복을 가져오리라는 보장은 인과론만큼이나 믿을 수 없고, 결국 이는 프로파간다에 그치게 된다. 


그렇다고 반대의 입장도 마냥 옳지만은 않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희생과 공동체의 가치 수호 사이의 연결이 높은 개연성을 가지기 위해 단기적인 증진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코로나 시대인 현재 각자의 자유를 조금씩 제한함으로써 공동체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상황을 보면, 약간의 희생은 분명히 단기적인 문제의 완화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기적 효과는 이 논리를 옹호하는 자들에게 장기적 효과가 존재한다는 실증적인 증거로 작용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보았듯이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소수의 희생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은 불확실한 대의보다 다른 가치를 수호하려 한다. 예컨대 자유, 생명, 혹은 인권같이 이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가치들에게 대해 연속성의 보존을 주장한다. 대의를 위해 이러한 가치들을 순간이라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매우 숭고한 자세로 이해될 여지가 있는 것이, (실제로 숭고한 경우들도 종종 있다) 작은 가치의 영속성을 깨뜨리는 것들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결과론적인 비극으로 상황을 전개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선택에 대한 도덕적 논거에 흠을 잡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대의를 위한 희생을 눈감을 수 없다는 명분으로 어리석은 자세를 고수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이러한 입장은 윤리의 문제와는 별개로 찾아올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점에서 현실과 꽤나 동떨어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양쪽 중 무결한 주장은 없다. 그리고 이는 이전 마블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나 위에서 이야기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이러한 윤리적 성찰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타노스와 어벤져스의 도덕적 대립에서 영화는 어벤져스의 손을 들어야 마땅하다. 이는 심히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이를 당연시하지 않는다. 타노스의 서사와 함께 그의 고뇌를 조명해 대의를 위함에도 고통이 따름을 보여주었고, 미시적 딜레마 설정에 대한 어벤져스와 타노스의 차이를 관객에게 각인시킴으로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논리적인 설득력을 부여했다. 게다가 희생을 용납하지 않은 어벤져스가 맞닥뜨린 당장의 비극에 대해 통감하고 책임을 지는 모습을 통해 어벤져스의 의견이 완벽히 옳지는 않음을 다시금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마블의 MCU 전체에 퍼져있던 파편들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결합되어 아주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아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으로 이어지는 마블의 필모그래피에서 이러한 철학적 사조로의 의지는 교묘하게 변질된다. 첫 번째는 악인의 설정에 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이터널스>에서는 이카리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는 닥터 스트레인지) 타노스와 비슷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어떤 하나의 거대한 목적이나 숙명을 이루어내기 위해 히어로와 각을 세우는 인물들이다. 여기에서 문제점은, 이들이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의 타노스에 대해서는 타노스가 가모라를 희생시켜 소울 스톤을 얻어낼 때 관객은 타노스의 고통과 고뇌에 잠시나마 공감할 수 있다. 정확히 하자면 작품이 그러한 순간을 제공한 셈이다. 허나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는 이렇게 악인의 동기에 대해 관객이 생각해 볼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터널스>에서 이카리스가 세르시 일당과 등을 돌리고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이카리스의 고뇌를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이카리스를 맹목적인 신봉자라고 생각하도록 작품이 관객을 강제한다. 그래야 스토리의 진행과 히어로의 활약이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이전 작품에서의 설정상 (혹은 본작에서도 볼 수 있듯이) 멀티버스에 대해 스파이더맨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일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임자의 위치에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악당들을 원래의 유니버스로 각자 돌려놓는 것은 고지식하거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아닌, 충분히 스스로의 논리에 입각하여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의 선택은 그저 스파이더맨의 주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설정으로 활용되었다. 여기에서도 악인에 대한 고찰은 배제되어 있다.


악인의 설정 문제는 보기보다 더욱 중대한 사안이다. 물론 작품 자체가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려 하지 않고 장르적 쾌감만을 위해 달려간다면 상관없겠지만,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와 같이 윤리적 딜레마를 품고 있는 영화에서 악인의 설정은 편향의 서술을 방지하기 위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두 작품에서 나타난 빈약한 악인 설정은 그 효과를 전혀 갖지 못한다. 다른 말로, 악인에 대한 공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특히나 윤리적 딜레마에서 특정한 한 입장을 악인으로 설정한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악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면, 이는 어떠한 설득의 노력도 없이 한 쪽의 입장을 악으로 규정짓는 것과 같다.


이에 이어지는 두 번째 문제는 히어로의 동기에 대한 서술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어벤져스의 행동 동기는 영화에서 제공하는 매 순간마다 등장해 힘을 얻는다. 작은 갈등들에 대해서 보였던 ‘중요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의 스탠스는 타노스와의 최종적인 갈등에 설득력을 가세한다. 반면에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히어로의 동기는 박애주의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뒤에 숨어 제창하는 비겁한 주장과 다름이 없다. 전자에서 세르시가 지구를 지키고 셀레스티얼을 제압하려고 하는 것은 세르시와 이전 리더였던 에이잭이 가졌던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허나 인류에 대한 사랑이 10억 년에 걸쳐 진행되었던 셀레스티얼의 계획을 파멸시키기 위한 이유라고 하기에는 심히 빈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의 스파이더맨의 동기도 마찬가지이다. 스파이더맨은 메이 숙모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움에 처한 자를 구하려는 사랑과 공감으로 닥터 스트레인지를 지탄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이상주의에 빠진 어린아이의 행동과도 같다. 작중 그린 고블린의 비판처럼 스파이더맨의 동기, 그리고 세르시의 동기는 감상에 빠져 충분히 논리적이지 못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히어로가 악인을 물리치고 자신의 결심을 이루는 데에 해야 마땅할 일을 방기하고 있다.


세 번째는 빈약한 악인의 설정과 허술한 히어로의 동기 서술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의 깊이가 충분히 깊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는 <이터널스>에서의 데비안츠 혹은 아리솀의 계획, 그리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그린 고블린으로 쉽게 볼 수 있다. 전자를 먼저 살펴보자면, 데비안츠의 존재를 비롯한 아리솀의 서사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방향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인상 깊다. 우리가 진화라고 불러왔던 것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맹목적인 신격화에 대한 회의를 던지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진화를 하지 않는 모델’의 구상은 인류에게 절대성이란 허상에 불과함을 내포하는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터널스>는 이러한 통찰을 활용하는 방식이 매우 어설프다. 도리어 작품이 제시하는 메인 딜레마를 위한 집중이 분산되는 인상을 심어줄 정도이다. 통제할 수 없는 곳까지 일단 손을 벌리고 보는 꼴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의 그린 고블린도 같은 위치에 있다. 그린 고블린의 대사는 작품 속의 딜레마에서 윤리 그 자체에 대한 담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메이의 신념이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환상이며 스스로를 구속하는 제약이라는 비판은 윤리 자체가 그 대상을 억압하는 고전적 도덕 논리의 허점을 찌른다. 온전히 새로운 갈등 구조로의 변환인 셈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이러한 논점을 녹여내 통찰을 심화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여러 이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 러닝타임의 조절 외의 다른 이유들은 거의 변명일 것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는 자의에 의해서 혹은 타의에 의해서라도 그 복잡하고 고전적인 논거를 공고히 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하나의 거대한 증상으로 융합한다. 영화의 자의적 서술, 특히 충분하지 못한 사유를 통해 악을 규정하고, 이러한 악에 대응하는 선에 대해서도 무책임했으며, 그 외의 짚고 넘어가야 할 점들은 모두 외면했다. 이러한 최근 마블 작품들의 선택은 사유의 제한으로 귀결된다. 정상 상태와 비정상 상태를 충분한 논의 없이 규명하며, 비정상 상태를 무조건적 교정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전제하고, 이에 따른 어떠한 철학적 논제도 무시한다. 그의 반향은 자유주의적 오만함으로 오역될 여지가 매우 크다. 그렇기에 작품은 관객이 충분히 사고할 여지를 남겨줌으로써 각각의 철학을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예술은 프로파간다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 누가 악을 규정하고, 그 누가 악을 교화하며, 그 누가 악을 교정하는가. <이터널스>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마블이 보여준 철학적 빈약함은 어쩌면 디즈니의 새로운 21세기 아메리칸 드림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이 문제는 절대 경시되어선 안된다. 그 이유는 디즈니와 마블이 PC주의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려는 의도와 일치한다. 디즈니의 영화 사업의 주 소비자 연령이 여타 예술의 주요 감상층의 연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음을 생각하면, 디즈니와 마블이 만들어내는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생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괄시 받아왔던 소수자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에 큰 문제를 두진 않지만, 본 글에서 다룬 맹목적 교화 정신이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스파이더맨의 대사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디즈니의 정치적 민감함은 한 쪽으로만 작용해서는 안 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에 등장한 프랑스의 청년이자 영화광인 테오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며 홍위병에 낭만을 투영한다. 마치 마오쩌둥이 하나의 위대한 영화감독이고 문화대혁명이 그의 걸작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그렇듯이 이는 프랑스 68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매우 박약한 철학을 진리로 받들게 된 젊음은 그들만의 낭만과 이상에 허덕여 스스로를 구덩이에 빠트리고 만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안다. 그 속내용 만큼이나 허술한 지혜로의 접근을 방치하고 심지어는 부추기기까지 했다.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에서처럼 이러한 젊음들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영원히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우리가 우리 젊음에게 원하는 모습일까. 거울이 되어버린 예술의 역사는 아담 맥케이의 <빅 쇼트>처럼 무능함과 멍청함, 그리고 무심함으로 비극을 되감기 한다. 최근 마블의 행보에서 보였던 뉴 아메리칸 드림이 그들의 방향성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9032400/mediaviewer/rm1492448769?ref_=ttmi_mi_all_sf_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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