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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브레히트의 테크니컬리티.

빅 쇼트, 아네트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이야기하려면 먼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 중 시학 6장은 비극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6장에서 제안한 비극의 6가지 요소는 현재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불문율이다. 하나하나 짚어보진 않겠지만, 총체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은 곧 비극이란 재현을 통해 인간의 양식을 모방하며 반전을 포함해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는 완결된 형식의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살펴보면, <기생충>은 주인공 가족의 사건을 재현함으로서 보편적인 인간의 양식을 모방해 사상을 담아내고, 상황의 전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며, 하나의 완결된 드라마로서 존재한다. <기생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충실히 재현해낸 작품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바로 카타르시스이다.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6요소 중에서 네 번째로 들었지만, 이는 그만큼이나 이전의 요소들이 자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우리가 비극을 감상할 때 가장 강력하게 그 존재감을 느끼는 대상도 카타르시스이기에,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은 비극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카타르시스란 정신적 정화를 불러일으키는 비극의 언어이다. 카타르시스는 몇 가지의 기능을 하는데, 이는 각각 심리적 배설, 종교적인 정화, 그리고 질서의 확립이다. 예를 들어,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에서 카타르시스는 오락성의 극대화를 통해 불안이나 긴장을 해소시킨다. 이때 우리는 카타르시스의 배설적인 기능을 느낄 수 있다. 이 외에는 대부분의 작품에서의 권선징악 모티브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바를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우리는 ‘권선’을 통해 성찰과 정화를, ‘징악’에서는 질서의 확립을 느낀다. 이 세 가지 기능을 종합하여 ‘정신적 정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적 정화는 기본적으로 연민으로부터 파생된다. 우리는 감상자로서 작중의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 연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이다. 만일 연민이 없다면 정신적 정화도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비극의 장치들은 감상자가 작중의 인물에 대해 연민을 느끼도록 해야한다. <기생충>을 계속해서 예시로 들자면, 작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후반부의 기택(송강호 역)과 박 사장(이선균 역)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이때 감상자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기택에 대한 연민과 박 사장에 대한 연민이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것이다. <기생충>의 놀라운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이 곳이며, 감상자가 많은 인물에 대해 동시에 연민을 느끼게 함으로서 더욱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시학>에서의 기본 원리에 대한 출중한 재해석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카타르시스는 연민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생충>에서는 감상자가 각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도록 장치를 충분히 설치해놓는다. 전반부의 케이퍼 영화와 같은 분위기, 중반부의 반전, 그리고 계단과 홍수 등의 소재들 모두 우리가 작중 인물에 몰입해 연민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감정의 이입이다. 연민은 감상자의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된다. 작품이 감상자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도록 한다는 것은 곧 작중 상황에 대해 감상자가 이해와 공감을 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한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해, 작품은 관객이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서 감상자의 연민을 유도해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느와르 장르를 적극 표방한 이해영 감독의 <독전>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실 <독전>은 스토리를 펼쳐내는 데에 있어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소재로 작용하는 ‘이 선생’의 정체를 활용해 관객을 몰입시켜야 했지만 단조로운 인물 묘사와 탄탄하지 못한 스토리라인은 관객의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독전>은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도록 만들지 못했고, 결국 관객이 얻는 카타르시스도 적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는 완전히 다른 케이스이다. 이로 보았을 때, 결과적으로 감정 이입을 통한 연민, 그리고 연민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연결고리를 통해 작품은 힘을 얻게 된다. 감장 이입 없이는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관한 사고관이며, 지금까지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작품들이 이 원칙들을 따르며, 감정의 이입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추구는 어느 예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수명이 긴 생각 끝에는 항상 특이점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다. 


브레히트의 희곡은 다소 난해하게 다가온다. 연기자들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암전이 되고, 갑자기 사회비판적인 대사가 들려오며, 대사와 노랫말의 구분도 없다. 그렇기에 감상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분명히 어떤 작품을 감상했음에도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 듯한, 하지만 계속해서 작품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혼란은 충분히 계산된 바이다. 예를 들어, 브레히트의 작품 중 <서푼짜리 오페라>의 ‘연기자들을 위한 지침’ 첫 부분을 보자.


소재의 전달과 관련하여 관객은 감정이입의 길을 가도록 종용받아서는 안 되며, 그 대신 관객과 배우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생소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더라도, 배우는 결국 직접 관객을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배우는 자기가 묘사할 인물에 관해 “역(役)에 들어있는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관객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배우는 물론 사건을 이해하기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플롯의 사건들과는 다른 별도의 사건들과 관련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플롯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그녀(폴리, 작중 인물)가 관객과 맺는 관계에는 강도의 신부나 장사꾼의 딸 등에 대한 관객의 통념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브레히트 희곡선집 1>, 임한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p.133)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 속 연기자들을 위한 지침은 그 작품만큼이나 파격적이다. 한 문장씩 따라가보자.


우선 관객은 감정이입을 종용받아선 안 된다. 이 말인 즉슨, 작품이 관객을 몰입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의하면 작품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유도함으로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다. 허나 브레히트는 감정의 이입를 완벽하게 배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작품이 관객에게 감정 이입을 강요하는 것은 곧 관객의 사고를 방해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파이어아벤트의 사상과도 비슷하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전면 반박하며 등장한 파이어아벤트는 패러다임 이론이 과학자들에게 특정 선택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과학자들 각각이 스스로 타당해보이는 어떤 이론을 믿고 연구해나가는 것이 옳은 과학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작품이 관객에게 특정 사고를 강요할 수 없으며, 관객은 작품을 토대로 스스로 사유를 펼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감정 이입을 배격하는 대신 관객과 배우가 특정한 교류를 이루어 낼 것을 요구한다. 이 교류란, 배우가 자신의 역에 주어진 행동과 지문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관객들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뜻한다. 이때 ‘더 많은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서 브레히트의 혁신이 크게 드러난다. 브레히트는 작품이 “플롯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그와는 별도의 사건들과 관련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롯은 거칠게 말하면 내러티브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다. 이 플롯은 <시학> 6장에서 최우선시되던 요소이며, 비극의 본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던 것이다. 그럼에도 브레히트는 작품이 플롯 이외의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위 인용의 끝 부분을 살펴보면 브레히트가 직접 예시를 든 문장을 볼 수 있다. 이 예시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등장인물 이자 주인공의 아내인 폴리는 그저 플롯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대신 ‘폴리’라는 배역은 관객의 통념을 비판하는 내용을 관객과 교류해야 한다. 다시 말해 ‘폴리’는 작품의 스토리 속에서 어떤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관객 개개인의 삶과 연관된 어떤 사유를 전달하도록 기능해야 한다.

이 점은 브레히트의 작품이 감정이입을 고의적으로 막는 것과도 연결되어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 예술이란 카타르시스의 매개체가 아닌, 감상으로서 사유의 촉발을 담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감상자는 작품에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된다. 감정을 이입했다는 것은 작품이 보여주는 것만을 받아들이며, 작품이 허용하는 사유만을 향유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감상자는 작품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작품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기에 작품은 플롯 너머의 영역을 관객과 연결시켜야 한다. 베르히트의 시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6장은 아마도 고리타분하며 권위적인 예술론이었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철학은 ‘소격 효과’라는 방법론으로 결실을 맺었다. 소격 효과는 관객의 몰입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유지시키기 위해 작품에 적용된다. 배우들의 대화 도중에 암전이 되거나 작품 중간중간 사회비판의 내용이 삽입된 것도 모두 소격효과의 맥락에 있다. 다른 예시로는 브레히트가 정립했던 ‘제 4의 벽’의 함락이 있다. 작품의 세계와 관객의 세계를 구분짓는 가상의 벽을 ‘제 4의 벽’이라고 하는데, 몇몇 작품에서는 제 4의 벽을 허물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팀 밀러의 <데드풀>에선 주인공인 데드풀이 스크린을 넘어 직접 관객들과 대화하는 것도 소격효과를 위함이다. <데드풀>에서 소격 효과는 관객이 작품에 빠져들기보단 만화책을 보는 듯한 감상을 주어 오락성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소격효과는 다양한 작품들에서 생각보다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 다룰 두 작품, 아담 맥케이의 <빅 쇼트>와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가 브레히트의 정신을 계승한 작품들의 예시이다. 


<빅 쇼트>는 주식 영화로 이미 유명한 작품이다. 특히나 최근 몇년동안의 주식에 대한 하입에 힘입어 의도치 않게 새로운 유명세를 맞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아담 맥케이의 <빅 쇼트>는 훌륭한 영화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이 작품으로 감독도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우선 <빅 쇼트>가 훌륭한 지점은 단순한 재미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 최악의 경제 공황의 시발점이었던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아주 무거운 소재를 가지고도 경쾌하고 신나게 울려퍼지는 영화를 연출해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같은 소재를 다루었지만 그 분위기는 완전히 반대이다. 하나의 소재로 이렇게나 명확하게 갈리는 뛰어난 작품들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아담 맥케이와 코엔 형제의 위대함을 반증하기도 한다. 다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달리 <빅 쇼트>는 비교적으로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감상할 수 있는, 비교적 편한 작품이다. (가끔 이렇게 힘을 뺀 작품에 대해 저평가를 하는 경향을 본다. 개인적으로 완전히 터무니없는 평가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들여다보자. <빅 쇼트>는 하나의 사건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눠 전개한다. 미국 경제의 기반이었던 모기지론에 결함이 있음을 미리 깨달았던 집단들이며, 각각은 마이클 버리(크리스찬 베일 역),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 역), 벤 리커트(브래드 피트 역)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전부 월가 속 각각 다른 위치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모기지론에 엄청난 결함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나 그 이후 행동도 다채롭다. 이 지점에서 <빅 쇼트>는 그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여러 시점으로 나뉘어있는 플롯은 각각 다른 영역을 상징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상징들은 각 인물의 배경과 엮여 관객인 우리에게 다양한 관점에서의 시사점을 던진다. 

<빅 쇼트>의 큰 틀, 플롯을 보면 각본 과정이 생각보다 험난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플롯도 단순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대부분은 이해조차 하지 못할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이후에 있다. 만일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소재를 잘 풀어내서 당시의 경제 위기를 헤쳐나가는 인물을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렸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빅 쇼트>의 존재 가치는 무엇인가. 아무 생각없이 그저 인물들이 당시의 멍청하거나 부도덕적인 통념을 비웃고 엄청난 돈을 버는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관객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영화를 보는 대다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일 것이고, 그런 소비자층에 “당신들이 경제 공황으로 힘들 때 이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정도의 뉘앙스를 던지는 아무 의미없는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 맥케이는 보다 영리한 전략이 필요했다. 거기에 감독은 <빅 쇼트>를 만드는 데에 있어 하나의 견고한 목적이 있었다. 당시의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켰던 제도권의 문제점이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현재 상황을 살펴보면, 아담 맥케이 감독은 복잡한 플롯에 무거운 소재를 가지고 사회고발적인 경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이고 관객들의 심기를 건드려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 <빅 쇼트>는 구상 과정에서부터 엄청난 딜레마와 직면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암울한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데도 경쾌해야 하고, 하지만 너무 경쾌하면 관객의 아픈 경험을 비웃는 꼴이 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담 맥케이가 제시한 해결책은 바로 브레히트의 테크니컬리티이다. <빅 쇼트>는 브레히트의 예술론에 정확히 드러맞는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지하면서 작품의 안내에 따라 사유를 펼칠 수 있는, 사회 비판적이고 지극히 이성적인 브레히트의 예술은 <빅 쇼트>의 모든 딜레마를 해결해주었다. 무거운 소재이지만 이를 가볍게 다룸으로서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함과 동시에 카타르시스의 배격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빅 쇼트>를 가능하게 한 브레히트의 정신이다.


결국 <빅 쇼트>는 소격 효과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첫 번째, 영화가 경제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빅 쇼트>에 등장하는 복잡한 개념을 관객에게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중간에 갑자기 관객에게 직접 설명하는 장면을 넣는다. 예를 들어 갑자기 마고 로비가 거품 목욕을 하며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해 설명하고선 다 했으니 이제 꺼지라고 말한다거나, 아니면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셀레나 고메즈와 경제학자 리처드 탈러가 관객들에게 CDO가 무엇인지 게임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제 4의 벽을 파격적으로 허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삽입은 스토리라인과 아무런 관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자연스럽지 않다. 영화의 전반적인 리듬감에 따라 간단한 설명을 재미있게 듣는다는 인상을 줄 뿐 흐름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삽입은 관객이 인물의 스토리라인에 지나친 감정 이입을 막아주는 효과도 가진다. 항상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아닌, 그 인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특히나 <빅 쇼트>에서는 더욱 그렇기에) 감독은 역동적인 내러티브에 완전 흡수되지 않게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두어야 하고, 이러한 방법은 소격 효과의 목적을 위해 완벽하게 적용되었다.


두 번째, 편집이다. 사실 고전적으로 편집은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빅 쇼트>의 편집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 점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마크 바움이 부인과 대화하며 자신의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인데, 우리가 처음 본 마크 바움의 성격을 가지게 된 매우 충격적인 동기임에도 영화는 마크가 부인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잘게 조각내 마구잡이로 붙여버린다. 사운드까지도 파편들을 덧댄 모양새로 빠르게 지나간다. 이런 특별한 편집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완전히 차단한다. 더 나아가 이 패턴은 처음 벤(브래드 피트 역)이 등장할 때, 벤과 베넷(라이언 고슬링 역)이 라스베이거스 이야기를 꺼낼 때 등등 자주 반복된다. 심지어는 갑자기 흑백으로 변하거나 화이트 아웃이 되는 편집 또한 소격 효과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장면을 끝내는 방법도 인물들의 대화 중간에 갑자기 장면을 전환시킨다. 브레히트 희곡에서도 본 것과 같은 결의 편집 방식이다.


세 번째는 촬영이다. 처음 <빅 쇼트>를 보면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자유로운 핸드헬드와 줌의 사용 때문이다. 특히나 <빅 쇼트>는 줌 인과 줌 아웃을 매우 빈번히 사용했는데, 일반적인 장면에서도 줌 인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줌 아웃과 함께 패닝을 하는 등의 다채로운 느낌을 카메라만으로 연출해냈다. 이는 라스 폰 트리에의 몇몇 장면과 같이 실제 인물의 시각을 모방한 느낌은 아니다. 다만 줌과 핸드 헬드에서 오는 특유의 불안정함과 기본적인 영상와 비교했을 떄의 이질감이 관객을 작품으로부터 밀어낸다. 전형적인 소격 효과인 것이다. 네 번째는 각본이다. 특히나 <빅 쇼트>가 플롯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레드 베넷의 나레이션이다. 스크린을 넘어 관객과 직접 대화하는 베넷과 그 외 인물들의 나레이션은 제 4의 벽을 성공적으로 넘나든다. 심지어는 작중 상황이 그대로 흘러가는 중인데도 특정한 인물만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위에서 말했듯 이질감을 배로 증대시킨다. 제이미(핀 위트록 역)이 마이클 버리의 칼럼을 읽고 나서 카메라에 “실제로는 이러진 않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좋은 예시일 듯 하다. 또한 중간중간 사진들이 보이다가 인용이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브레히트의 희곡의 대사 중 사회비판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것과 같이, 심지어는 터무니없는 인용문을 집어넣어 유머도 동시에 챙긴 연출이다.


<빅 쇼트>의 음악도 소격 효과를 다분히 노린 흔적이 퍼져있다. 마이클 버리의 장면에서 갑자기 지나치게 크게 들리는 헤비메탈 사운드가 그렇고, 라스베이거스의 미국 증권화 포럼 장면의 첫 부분의 음악이 그렇다. 사실 이 부분의 음악 사용은 압도적이다. 처음은 갑자기 <오페라의 유령> 테마 음악이 들리고, 이후에는 카지노의 소리, <That’s Life>, 등등 약 다섯 가지의 음악과 음향이 중첩되어 20초 가량 이어진다. 전형적인 음악 사용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걷는 <빅 쇼트>의 음악은, 특히나 음악은 소격 효과의 파격적인 면모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빅 쇼트>의 소격 효과는 모두 엔딩에 집중되어있다. 사실 영화를 관람한 사람 중에서 <빅 쇼트>의 엔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빅 쇼트>의 엔딩은 그의 목적을 가장 잘 대변하는 형태임에 틀림없다. <빅 쇼트>의 엔딩은 시스템에 환멸을 느낀 마크 바움이 자신의 공매도를 매수하라는 지시를 하는 순간인데, 아마도 영화의 러닝타임을 모두 통틀어 가장 건조한 장면일 것이다. 마무리도 바움이 앉아있는 건물의 테라스를 익스트림 와이드로 비추며 갑자기 영화를 끝내버린다. 그렇기에 관객은 엄청난 힘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하던 영화가 갑자기 맥없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위에서도 설명했던 <빅 쇼트>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만일 <빅 쇼트>의 엔딩이 작중 모든 인물이 큰 돈을 벌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 계속해서 그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면 <빅 쇼트>는 실화를 비췄다는 것 외에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 영화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담 맥케이는 소격 효과를 차용했던 것이다. 소격 효과의 핵심은 감정 이입의 배격, 즉 카타르시스의 배격이다. 엔딩에 다다라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대신 감독은 아주 건조하게 영화를 마침으로서 관객이 카타르시스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정반대로 당시의 미국의 시스템에 대해, 이 일을 알고도 방조하던 제도에 대해, 그리고 공매도로 큰 돈을 벌여들였던 이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빅 쇼트>를 보고 통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작중 인물을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경각심을 가지며, 우리의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있는 부분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이것이 바로 브레히트의 정신이다. 아담 맥케이는 이런 정신 나간 아이디어를 끌어모아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차용함으로서 훌륭한 하나의 고발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공은 순전히 브레히트의 몫이다.


두 번째 영화는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이다. 사실 레오스 카락스만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아네트>의 오리지널 각본은 미국의 듀오 밴드 스팍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원래 스팍스의 다른 프로젝트로 진행될 뻔한 <아네트>는 대신 레오스 카락스와 손을 잡고 뮤지컬 영화로 탄생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한 감독에 귀속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실 모든 영화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가장 존재감이 돋보이는 둘은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 스팍스이다. 우선 스팍스는 영화의 모든 오리지널 넘버를 작곡했다. 스팍스는 글램 록을 주로 하는 밴드로서, 단순한 코드 진행과 반복적인 모티브 속에 보다 직접적이고 파격적인 가사를 넣어 음악을 만드는 모습을 많이 보여줘왔고, <아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송스루 뮤지컬인 <아네트>는 거의 모든 대사가 음악과 함께 나오는데 아주 직접적이고 간결한 가사는 작품 전체에 스팍스 세계관의 색채를 불어넣었다. <아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아네트>의 음악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스팍스의 터치는 매우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라고 하는 이유는 그만큼이나 창의적인 철학을 통해 영화를 훨씬 다채롭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아네트>의 연출을 지적한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요트 장면이나 목각인형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레오스 카락스의 고유한 능력을 그대로 발산해내는 듯했다. 더 나아가 <아네트>의 주제의식에서도 레오스 카락스만의 독특하고 깊은 사유가 드러난다. 다만 본 글의 주제와는 벗어나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글에서 다뤄보도록 할 것이다.


<아네트>는 단순하게 보았을 때 꽤나 지루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네트>에서는 가장 극적인 몇몇 순간들이 있는데, (연출의 스케일이 비교적 큰 요트 장면을 제외하고) 아네트의 출산, 헨리가 지휘자를 죽이는 장면, 아네트가 헨리의 살인을 고백하는 장면 등등 모든 클라이막스 부분이 에너지를 터트린다기보단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느낌이다. 거기에 스팍스의 음악이 가지는 난해함이 더해져 전체적으로 마음 놓고 즐길 수 없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빅 쇼트>와 마찬가지이다. <아네트>가 일반적인 시각에서 무미건조할 수 있는 이유는 <아네트> 또한 브레히트의 정신을 계승한 서사극이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송스루 뮤지컬인 톰 후퍼의 <레 미제라블>을 보면, 여기에선 송스루라는 특이한 접근이 영화의 전반적인 몰입감을 증폭시킨다. 노래를 하지만 말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넘버들은 관객이 작중 인물의 상황에 빠져들고,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쉽게 만들었다. 하지만 스팍스의 넘버는 애초에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 듯하다. 모든 악기가 하나의 멜로디라인을 연주하는 작법이나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어투의 가사는 관객이 쉽게끔 감정 이입을 하도록 하지 않는다. 아네트가 목각인형으로 등장하는 것 또한 개연성을 극도로 낮춤으로써 소격 효과를 주기 위함이다. 영화의 연출도 같은 방향성을 공유하는데, 레오스 카락스 특유의, 공간의 제약이 없이 펼쳐지는 사실적인 몽환의 연출도 같은 기능을 한다. 다만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과 같이 표현의 추상성을 높여 몰입도를 높일 수도 있겠지만, <아네트>에선 도리어 몰입도를 낮춘다. 작중 인물들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나 안무를 하는 듯한 모습들은 모두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향성은 영화의 엔딩으로 향한다. 영화의 엔딩을 담당하는 ‘Sympathy for the Abyss’은 이전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과 헨리의 인격을 그대로 나타내는 넘버이지만, 엔딩의 연출은 비교적 건조하다. 심지어 헨리는 최후의 대사로 관객에게 ‘이제 그만 좀 쳐다보라’고 말한다. 관람을 하며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엔딩은 영화의 감상 전체를 매우 지저분하게 흐린다.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 말은, 깔끔하게 떨어지는 권선징악의 보편적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만일 헨리가 그 죗값을 치르는 모습이나 죄의식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매우 평범하게 계도적인 엔딩이 되었겠지만, <아네트>의 엔딩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까지 찝찝함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는 우선 첫 번째로, 선악의 프레임을 벗어난 감독의 사고를 보여준다. 만일 헨리의 처벌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면 관객은 헨리를 악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는 선과 악에 관한 이야기이기보단 예술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선악의 프레임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아네트>의 엔딩은 헨리를 악으로 규정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 스스로를 투영하게, 혹은 다양한 추상적 관념을 투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두 번째는 카타르시스의 배격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만일 <아네트>가 그렇게 끝났더라면 관객들은 헨리에 대한 징악을 목격하며 정신적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아네트>는 카타르시스를 위한 작품이 아니다. <아네트>를 감상한 관객들은 정신적 정화보다 이성적인 판단을 통한 자유로운 사유로 가야 하기에 영화는 브레히트적 자세를 고수해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아네트>의 오프닝이다. <아네트>의 오프닝은 레오스 카락스와 그의 딸, 스팍스 듀오, 주연배우 셋과 코러스가 길을 걸으며 ‘So may we start?’를 부르는 장면이다. 당연히 원테이크이고 라이브 퍼포먼스이다. 우선 노래 자체도 매우 좋다. 스팍스의 시그니처적인 박자의 반복과 변주, 거친 보컬과 단순한 음악, 후반부에 색소폰까지 넘어가는 유려함이 돋보이는 음악이다. 거기에 레오스 카락스와 스팍스, 배우들까지 나와 ‘이제 시작할까’라는 노랫말을 뱉는 것 자체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에 가장 처음으로는 이 시퀀스 자체가 압도적이다. (브레히트의 <예의와 관습>의 첫 부분에 배우들이 모두 나와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지극히 브레히트적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이다. ‘So may we start?’ 넘버의 가사가 매우 독특한데, 마치 <아네트>의 주제의식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we sing and die for you, (…)if you want us to kill too, then we may agree.’, ‘but where’s the stage you wonder, is it outside or is it within?’이 가장 핵심적이다. 여기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배우와 제작진이고 청자는 관객인 우리임을 생각하면, 영화가 우리에게 ‘노래도 부르고 죽어도 주며,’ 심지어는 ‘우리가 원하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네트>에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이 가사는 결국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무대가 스크린 안인지 밖인지’ 묻는 것은 <아네트>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술가-관객의 관계의 확장을 뜻한다. 예를 들어 헨리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와 관객들의 관계는 곧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와 우리의 관계이다. 이러한 <아네트>의 대칭성을 질문하는 것이다. 결국 오프닝 넘버의 역할은 <아네트>가 보여줄 이야기의 주제의식을 앞서 살짝 선보이는 것이다. 마치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와 같이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드소마>의 벽화는 가지(可知)에서 오는 공포를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면 <아네트>의 오프닝 넘버는 영화의 관람을 돕는 가이드의 역할을 한다. 사실 <아네트>의 스토리 라인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매우 간결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단순히 스토리만을 따라갔다가 감상을 끝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다시 말해 플롯만에 집중할 상황을 막기 위해 오프닝 넘버에서 귀띔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 예술관의 중추를 담당하는 부분이다. 탈-플롯을 통한 자유로운 사유를 유도하는 브레히트의 희곡과 같이 <아네트> 또한 단순한 플롯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향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브레히트의 도전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우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과 더불어 감상과 감정의 이입을 완벽히 분리해낼 수 없음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그렇기에 메이저한 영역의 예술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브레히트의 예술관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통념의 온전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정신적 정화를 저버렸다는 것은 정화의 무용을 의미한다. 정화가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브레히트는 인간의 감상론을 더러움과 깨끗함의 이분법에서 탈출시킨 셈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발자취는 곳곳에 남아있다. 브레히트의 테크니컬리티는 아직까지도 예술에 대한 모더니즘적, 구시대적 통념에 침을 뱉는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1596363/mediaviewer/rm3186614528?ref_=ttmi_mi_all_sf_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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