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 몽상가들
어떤 남자가 길을 건넌다. 어딘가에 늦었는지 급한 표정으로 길을 건너고 있다.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은 그는 길을 건너자 마자 손목시계를 잠시 쳐다보곤 급하게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혀도 멈추지 않는다. 땀을 흘리며 달린 그는 어떤 건물 입구에 갑자기 멈춰 선다. 유리 문에 비친 모습을 보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크게 심호흡을 한다. 비장한 표정의 그는 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선다.
이는 어떤 남자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다. 위 문단을 읽은 사람은 아마 이야기의 주인공인 어떤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이 남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고양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독자는 그 남자를 상상하다가 갑자기 고양이 이야기를 읽고 혼란에 빠지고, 결국에는 자신의 상상을 깨고 새로운 이미지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몰입을 잃게 된다.
우리는 독자가 왜 몰입을 잃게 되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로는, 이야기의 전개가 이어지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것들과 같이, 글이나 영상에서 인식하게 되는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연속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위에 나오는 남자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해보자. 사건들을 이어보면, 우리는 길을 건너고, 시계를 보고, 달리다가 옆 사람과 부딪히고, 건물 정문 앞에 서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이를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사건들이 시공간에 대해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갑자기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사건들은 불연속적이 된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몰입을 잃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글뿐만이 아닌, 이야기를 가지는 모든 예술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결론은, 시공간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두 사건을 함께 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갑자기 등장하는 불연속적 사건의 전개로 인해 몰입이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고전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만을 전달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서로 독립적인 내러티브를 담기 위해서는 영화 속에서 장을 나누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임정환 감독의 <국경의 왕>같은 경우 서로 독립적인 내러티브를 분리시켜 한 영화로 만들고, 그 내러티브 사이를 연출적으로 연결시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로 묶으려고 시도했다. 이 또한 장단점이 있는데, 한 가지의 주제의식에서 파생된 여러가지의 내러티브를 통해 영화적 재미를 얻을 수 있지만, 작품 전체가 난해해지고 불친절해진다. (사실 단점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영화 속에서 서로 독립적인 두 사건들을 한 작품 속에서 융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나열보다는 참신한 접근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첫 번째 영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다. (이하 <판의 미로>) 사실 <판의 미로>는 독특한 번역 제목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는다. 실제로 영화의 부제나 개봉 당시 마케팅을 보면 <판의 미로>는 동화 판타지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동심이나 판타지와 관련된 영화도 아닐뿐더러 잔인하거나 징그러운 장면들도 많아서 본의 아니게 영화에게 배신당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판의 미로>에 대한 오해 없이 관람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관객은 이 영화에 매료될 것이다. 우선 이 영화의 매력은 첫 번째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디테일한 디자인에서 나온다. <헬보이 2: 골든 아미>, <퍼시픽 림>,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등 현재 시점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감독의 창의적인 디자인 능력을 살펴볼 수 있고, 이 능력과 관련해서 대중에게 큰 임팩트를 준 영화 중 하나가 바로 <판의 미로>이다. 영화 속 판, 요정, 만찬 앞의 괴물의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연출과 매우 잘 어울리고, 실제 모델을 본떠 만든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외에도 주변 환경을 활용한 연출이나 공간 디자인 또한 매우 비범하다.
두 번째 매력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이다. 영화의 초반 장면에서부터 요정과 동화책이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게릴라전 중인 진지의 잔인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카메라에 담겨 관객의 집중을 세련되게 유도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매우 도드라지는데, 영화의 마지막에서 나오게 될 오필리아의 죽음 장면이 역재생되어 화면에 비춰진다. 오필리아는 바닥에 누워있고, 코에서 흐르는 피는 다시 오필리아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전체적으로 푸른 색채에, 매우 검붉은 피와 크게 대조되며 영화의 엔딩을 암시하는 동시에 아주 오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카메라 워킹도 비슷하게 작용하는데, 오필리아의 모습이 역재생될 동안 카메라는 천천히 회전하여 오필리아의 눈동자 속으로 점점 들어가면서 관객의 시선과 집중 역시 빨아들인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영화 전체에 퍼져 있어 관객은 영화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이 글에서 가장 집중할 플롯과 스토리이다.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진지를 점령한 세력은 비달 대위로 대표되는, 파시즘을 표방한 당시의 정부군이며, 게릴라군은 파시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세력이다. 오필리아는 비달 대위의 딸이며, 아들을 출산하기 직전인 자신의 어머니를 따라 진지로 들어와 생활하게 된다. 이때부터 <판의 미로>의 스토리라인은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게릴라군과 전쟁을 벌이는 비달 대위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판이 준 임무를 수행해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놀라운 점은 이 두 갈래의 이야기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이야기한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국경의 왕>과는 다른 방식이다. 예를 들어, 판이 나무 속에서 벌레를 잡아먹는 두꺼비와 마주쳤을 때, 비달 대위와 군대는 게릴라군과 마주친다. 판이 만찬에 있는 포도 두 알을 먹고 괴물에게 들켜 위기를 마주했을 때, 비달 대위는 메르세데스와 의사 페레이로가 스파이임을 알아챈다. 오필리아가 판에게 임무를 실패함을 들키고 절망해 빠질 때, 비달 대위는 페레이로를 사살한다. 또한 판이 오필리아에게 마지막 임무를 알려줄 때, 메르세데스는 진지에서 도망쳐 게릴라군의 아지트에 도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의 이야기를 병렬하여 엮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필리아는 두꺼비를 보고 “곤충들을 잡아먹으면서 이렇게 사는 거 부끄럽지 않니? 나무는 죽어가는데 혼자만 살찌고.”라고 말한다. 이는 오필리아가 두꺼비한테 말하는 것이지만, 두 스토리의 병렬 연결을 고려해보면 게릴라군이 비달 대위에게, 혹은 감독 자신이 비달 대위에게 전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독립되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같은 내용을 품고 있었으며, 비유와 상징의 방식으로 엮여 엔딩을 향해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오직 편집과 리듬만으로 표현해낸 것은 분명히 우리가 고민했던 참신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참신한 접근을 완성시킨 작품이 있다. 바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다. <판의 미로>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몽상가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 온 매튜가 영화에 빠져 영화광 쌍둥이인 이사벨과 테오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몽상가들> 또한 종종 오해를 받는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스타일이나 표현 자체가 자칫하면 외설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이고 <몽상가들>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저 야한 영화, 혹은 유사 포르노적인 전형적 예술영화로 오해받기도 한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분명히 표현의 그늘에서 벗어나 감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선 68혁명을 영화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표현의 수위 문제도 있고, 소재 자체의 상징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연출되었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몽상가들>의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매튜와 이사벨, 테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오프닝과 엔딩을 잇는 프랑스 전역의 시위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 스토리라인을 지지한다. 우선 첫 번째 가지부터 살펴보자. 인물 설정 자체부터 의미심장하다. 미국 태생인 매튜와 프랑스 태생인 쌍둥이 이사벨과 테오는 서로 사랑을 나누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부분에서 언쟁을 벌인다. 예를 들어 마이클 키튼과 찰리 채플린, 에릭 클랩튼과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예술적 라이벌에 관한 소재부터 베트남 전쟁, 마오쩌둥과 홍위병에 관해서도 의견 차이를 보인다. 이 의견 차이는 매튜와 쌍둥이의 삶의 방식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이사벨과 테오는 성이 다른 쌍둥이지만 매우 개방적으로 행동한다. 이에 대해 매튜는 어색해하다가 나중에는 싫증을 느끼고 둘을 떼어놓으려고도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엔딩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다. 시위대에 합류한 셋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갈라서게 된다. 이는 크게는 미국과 프랑스의 ‘자유’에 대한 견해, 혹은 68운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의 입장 차이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주를 이루는 매튜와 쌍둥이의 이야기는 영화, 정치, 그리고 성적 자유주의에 관한 미국과 프랑스, 혹은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대립을 상징하는 이야기이다.
이제 보조적인 이야기로 넘어가자. 영화의 초반 매튜의 나래이션으로 설명되는 당시 배경은 68혁명의 시작이 되는 시점이다. 당시 영화관이 정부에 의해 폐쇄되는 상황에서 프랑스 각지에서 영화광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매튜가 이사벨과 데이트를 하러 나갔을 때 연결되는데, 시위는 프랑스 시민 전체의 보수적인 정부에 대한 반발로 인해 규모가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때 68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엔딩에서는 경찰을 상대로 혁명을 시작한 시위대의 모습이 나오게 된다. 이 흐름은 68혁명의 시초와 전개 자체이다. 그리고 이는 <몽상가들>에서 주 이야기의 기저에 깔려있는 흐름이다.
이 두 종류의 이야기는 <몽상가들> 속 각본에서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매튜와 쌍둥이가 한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며 점점 집이 더러워지고, 나중에는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찾아 먹는 모습을 통해 감독은 68혁명의 주체의 실상을 표현한다. 또한, 엔딩과 이어지는 직전 장면에서 자신의 개방적인 생활을 부모님에게 들킨 이사벨이 매튜와 테오와 함께 자살하려고 하는 모습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가진 유아적인 사고 방식을 비유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몽상가들>은 서로 다른, 혁명의 이야기와 매튜의 이야기를 비유로 엮어 자유에 대한 철학을 펼친다. 특히나 테오와 매튜의 홍위병에 관한 대화는 마치 68혁명의 모티브를 꽤나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데, 이처럼 <몽상가들>은 독립적인 두 이야기를 두 인물과 두 세력의 대치를 통해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세계의 구축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구축은 하나의 연속적인 내러티브를 펼침으로써 이루어진다. <판의 미로>와 <몽상가들>은 한 작품 안에 두 가지의 병렬적인 내러티브를 훌륭하게 담아낸 작품들이며,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다만 이 영화들이 구축한 세계들은, 두 가지의 병존하는 세계들이 영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관객은 이 두 가지의 병존하는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어떤 주제의식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받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이는 우리가 고민했던 참신한 접근에 대한 <판의 미로>와 <몽상가들>의 놀라운 답변이 된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309987/mediaviewer/rm3900253952?ref_=ttmi_mi_all_sf_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