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들, 도그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떤 행위에 대한 의욕은, 기본적으로 그 행위를 통해 어떤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표현에 대한 의욕은 타인의 ‘공감’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말하는 행위에도 청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도덕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가령 장애인 등과 같은 소수자, 혹은 우리 주변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통념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위에서 언급한 논리로는, 타인의 이해에 대한 의욕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즉, ‘나는 타인의 고통과 장애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전제한 채 이해를 의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믿음은 과연 도덕적인가.
홍승완 감독의 2018년작 <배심원들>은 한국 최초의 국민 참여 재판을 각색한 영화이다. 사실 이 영화의 플롯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다양한 계층과 분야의 시민이 모여 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이며, 실제로도 <배심원들>의 각본은 우리의 예측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하고 뻔한 영화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연출에 있다. 모든 법정영화의 한계인 단조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배심원들>에서는 매우 세련된 카메라워크와 구도, 또 탁월한 음악의 배치를 활용한다. 특히나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초반부 배심원단이 법정으로 들어설 때이다. 마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를 보는 듯한 이 장면에서는 구도와 슬로우 모션, 그리고 클래식 음악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그 외에도 중간중간 스릴러적 요소를 넣어 시각적 긴장을 계속해서 조성했다.
그럼에도, <배심원들>의 꽃은 무엇보다도 각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실시된 최초의 국민 참여 재판을 소재로 하면서도 배심원단과 재판부, 두 세력의 상황을 동시에 풀어내는 <배심원들>의 각본은 매우 흥미로운 포문을 연다. 더 나아가, 국민 참여 재판이라는 제도가 가지는 특성도 법정 영화의 테마와 잘 들어맞는다. 국민 참여 재판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피고인에게 형량을 결정하는 시스템인데, 이는 배심원들이 피고인의 상황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재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말로 시민이 피고인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곧 시민이 피고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배심원들>에서는 피고인의 가족, 신체적 장애, 정서 등을 하나하나 들춰내며 배심원들의 이해에 대한 의욕을 관객에게도 전달한다. 마치 관객이 직접 피고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각본의 구조이다. 여기에서 법정 영화로서의 구조는 ‘이해’에 대한 내적인 논리로 작용한다. 배심원은 피고인을 이해해야 하지만,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규정된 법에 의거하여 피고인을 바라보고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론 소킨의 <트라이얼 오브 시카고 7>과 같이 감정은 제쳐둔 채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 논지를 이어나가야 한다. 이 점에서 <배심원들>은 너무나도 흥미로운 판을 세팅한 격이다. 대중이 한 인간을 매우 특정한, 논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은 쉽게 볼 수 없는, 쉽게 떠올릴 수도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자신이 깔아놓은 판을 감당하지 못하며 붕괴한다. 어느 순간부터 각본은 이성적인 법률적 접근에서 매우 감정적인 호도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주인공 격인 배심원들은, 그 모든 엄격한 수칙과 원칙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앞세워 결론에 도달한다. 매우 흥미로웠던 법정 영화만의 내적인 논리 속에서의 이해는 끝내 해내지 못했고, 감정으로서 판결을 마무리 짓게 된다. 이렇게 <배심원들>의 후반부는 마치 아예 다른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실패적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배심원들>은 그 제작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인문학적 방향으로 우릴 끌고 가고 있다. <배심원들>의 내러티브적 성공을 상상해보자. 이때 <배심원들>은 법정 상의 내적인 논리를 통한 대중의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성공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이는 즉 내적인 논리를 통한 타인에 대한 이해는 감정적 호도에 뒤처졌으며, 법정에서 가장 꺼내선 안 될, 왜곡되기 쉬운 감정이라는 도구로 피고인을 재단할 뿐이다.
<배심원들>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를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가 일반적으로 타인의 이해를 실패하는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타인의 상황을 모두 인지하고 그 상황 속에서 타인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또 실제로 그렇게 접근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저 자신의 잣대로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에의 의욕이 적절한 방법론을 배반하고 자기중심적 도구의 차용으로 자의적인 결론을 내는 레퍼토리는 사실상 모든 ‘이해’의 시도가 맞는 비극적인 결말이다. 이 근원적인 몰이해성은 사실 꽤 오랫동안 다뤄져왔던 문제이다. 그중 하나인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 흔히 ‘beetle in a box’라고 불리는 논증은 타인의 언어에 대한 이해란 필연적으로 불가능함을 밝힌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타인을 향한 이해에 대한 의욕이 전제하는, 온전한 이해의 가능이라는 믿음은 그저 하나의 고집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더 나아가, 이 믿음은 매우 오만하다. 마치 자신의 주관을 완전히 탈피하여 타인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결과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것에 대한 오만한 선민의식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은 이를 아주 잔인하고 냉혹하게 보여준다. 니콜 키드먼 역의 그레이스는 도그빌의 주민들을 질타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마치 그들의 사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들이 강제한 도그빌에서의 처참한 역할들을 이행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다다른 그레이스는 자신의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복수의 마음을 먹게 된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죄를 용서하려는 시도 자체가 가지는 오만함을 이해하고,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도그빌의 주민들을 처벌하기에 이른다. 그레이스의 이러한 모습은 타인의 이해에 대한 의욕이 가지는 필연적인 비극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만일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통해서라면,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의욕을 통해서라면, 그레이스는 도그빌 주민들의 어떠한 요구도 모두 받아주어야 한다. (또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후반부에 그레이스는 이 필연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자신의 이해에 대한 오만한 의욕이 도리어 도그빌의 부조리를 수용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선악에 대한 판별이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도그빌>의 후반부 그레이스는 작중 인물로서 기능한다기보다 감독의 메가폰으로 기능한다. 즉, 후반부 그레이스의 행동과 대사는 모두 곧 라스 폰 트리에 본인의 행동과 목소리가 된다. 이는 라스 폰 트리에의 작가주의적 인장 때문인데, 라스 폰 트리에는 사회의 어떤 한 면을 가지고 그 극단을 매우 냉혹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감독이다. 금기시되는 소재들의 부유 속에서 감독은 뒤틀린 가치들의 이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고전적인 내러티브로서도 작용하지만, 곧 라스 폰 트리에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논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떤 대사나 행동들은 마치 라스 폰 트리에 본인이 이 상황 속에서 택하는 오브제로 이해할 수 있다. <도그빌>의 후반부 그레이스의 모습도 이와 같은데, 도그빌의 붕괴와 그레이스의 도덕적 붕괴를 동시에 담아낸 후반부 그레이스의 선택은 라스 폰 트리에가 선택한 비극이다. 전자는 폭력적으로 이해를 강요하는 타자에 대한 응징, 후자는 오만한 도덕성에 대한 몰락이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또한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하비에르 바르뎀 역의 안톤 쉬거는 근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으로서 영화 속에 등장한다. 안톤 쉬거(Chigurh)라는 이름 자체도 근본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상에서 없었던 이름이다. 이처럼 안톤 쉬거는 고전적인 방법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렇기에 절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마치 2007년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이 안톤 쉬거라는 존재는 이해할 수도 없고 대비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맞닥뜨리는 비극을 다룬다. 특히나 제목의 ‘노인’을 상징하는 보안관 에드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행위의 씁쓸한 최후를 잘 보여준다. 에드는 자신의 경험과 추리를 통해 르웰린 모스와 안톤 쉬거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영화의 편집에서도 나타나듯이 영화 속 모든 인물들보다도 뒤처진다. 타인의 이해에 대한 의욕의 필연적 실패를 형상화한 듯 에드는 안톤 쉬거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데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혜와 경험의 집약인 노인조차 근원적 이해에 실패한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과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모두 이해에 대한 의욕의 오만함과 몰락을 시사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더 이상 공감이 아닌, 자기만족의 도구가 되어 오만한 도덕심을 자극한다. 타자를 재단함으로써 도덕적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배심원들>의 영화적 실패와 같이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들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빈곤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 대해, 마치 우리가 그들이 되어 그들의 문제를 함께 직면할 수 있다는 듯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도덕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도덕적인가. ‘이해’라는 단어의 엄중함을 경시한 오만함의 표출이 아닐까.
이해에 대한 의욕은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온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에드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와 반면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에드와 완전히 반대의 영역에 서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자전거를 탄 소년들이다. 노인과 소년의 대비는 물론 영화 전체를 통틀어 안톤 쉬거와 정상적으로 대화를 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이 소년이다. 소년은 중상을 입은 안톤 쉬거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본다. 안톤 쉬거는 그런 소년이 입고 있는 셔츠를 팔아달라고 부탁한다. 소년은 돈을 받지 않으려 하지만 쉬거는 소년에게 돈을 쥐여주고, 셔츠로 다친 팔을 고정한다. 영화상에서는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소년과 안톤 쉬거가 나눈 대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단순한 호의, 혹은 다친 사람에게 그저 손을 내미는 소년의 자세는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안톤 쉬거를 이해하려고 한 에드의 자세와는 다르다. 타인을 이해하려 든 인물은 처절히 실패했으나, 이해하려 들지 않은 인물이 그나마 이해에 성공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이해’라고 부르는 감정적인 행위는 그에 대한 의욕에 의해 추구될 수 없다. 이해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난 뒤에 이어지는 도덕적 행위에 대한 부수품인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려 든다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나마 이해에 가까워진다.
사진 출처: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177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