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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시대를 응시하다.

매트릭스, 파이트 클럽, 돈 룩 업

아주 오래 전 들었던 수업의 기억을 꺼내보자면, 모든 철학은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꽤나 단순하다. 자신과 그 주위를 이해하고 규명하려는 욕구는 모든 형태의 철학을 촉발시킬 만큼 강력하다. 그리고 그 욕구의 발산은 성찰로써 이루어진다. 나는 나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서 나의 사상을 돌아보고 내 주변을 관찰한다. 내 안에 어떤 결함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도 성찰에서 비롯된다. 물론 의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을 피할 순 없겠지만, 어찌 됐든 성찰은 내면과 외면 모두의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때의 성찰이란 각개의 향유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성찰은 하나둘씩 모여 집단적 성찰을 이루어내고, 이는 집단의 변혁을 일으킨다. 국민주권의 역사가 좋은 예시일 듯하다. 평등과 자유라는 이념에 대해, 또 집단의 이상향과 사회적 관념에 대해 돌아보며 집단이 집단 스스로를 반성하는 집단적 성찰의 행위는 역사의 거대한 발자취를 만들어냈다. 순탄하지만도 않았고 비극적인 순간도 존재했지만, 결국 현대사를 이끈 것은 집단적 성찰이었다. 즉 집단적 성찰은 그 집단의 자가비판이며 자아성찰, 그렇기에 자가 진단인 셈이다.


집단적 성찰은 종종 예술로서 드러난다. 다른 말로, 예술은 종종 집단적 성찰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보기보다 자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예술의 구조는 창작자와 감상자로 구분되어있고 예술은 창작자의 사유를 통해 만들어진다. 감상자는 감상으로서 그 작품에 자신의 사유를 덧붙인다. 허나 집단적 성찰의 주체는 창작자와 감상자 모두 포함하기에 예술이 집단적 사유를 담아낸다는 것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귀결로 들린다. 예술은 창작자가 만드는 것이지, 집단이 만드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는 예술감상론을 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제한하기에 생기는 과도한 단순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시적인 관점에서 창작자와 감상자의 구분은 명확하지만,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그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그 이유는 창작자와 감상자가 모두 존재로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창작자는 감상자의 견해에 영향을 받고, 감상자는 창작자의 사유에 영향을 받는다. 마치 무작위하게 만들어진 수많은 파동이 전부 합쳐저 하나의 파동을 형성하는 것처럼,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예술 감상은 각각 연관이 없어 보이나 한발 물러나 보면 그 모든 것이 뭉쳐 하나의 거대한 사유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사유들 중 몇 가지는 집단적 성찰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 상 집단적 성찰을 담아내기에 용이함이 있다. 거대한 자본과 제작 규모, 지배적인 시청각적 전달, 대중문화와의 융합, 폭넓은 소비자 풀과 높은 접근성을 생각해보면 영화는 어느 다른 형태의 예술보다도 거시적인 스케일에서의 예술감상론이 필연적으로 적용된다. 이는 곧 창작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개개인들의 의견과 사상이 담길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집단적 성찰의 매개이기 위한 적당한 필요조건이 된다.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크고 작은 정치/경제적 사건들이 여러 영화 속에 자취를 남겨놓은 모습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 사조의 변화, 신진 철학의 등장과 같은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이 지점에서 워쇼스키 형제의 1999년작 <매트릭스>는 매우 특별하다. 인간의 삶과 기계 문명에 대한 기존의 산개되어있던 아이디어를 모아 처음 영화라는 매체로 표현해낸 상징성을 지닌 <매트릭스>는 공개 당시와는 다른 임팩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2022년의 시점에서 <매트릭스>를 보면 일종의 계몽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세계이며, 실상은 기계가 인간을 가상세계 속에 집어넣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모두 코드 몇 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이다. <매트릭스>의 독특한 설정은 우리에게 깊은 사고를 요구한다. 심지어는 열댓명의 철학자들이 모여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을 집필했을 정도이다. 물론 <매트릭스>는 철학적으로도 가치가 빛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적인 맥락에서 이 작품은 작품의 완성도나 철학의 깊이를 넘어선 다른 곳을 조명한다.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화적 도래이다. <매트릭스>에서 등장하는 ‘사실’에 관한 대담이나 자유의지-운명론의 결합, 고전적 예술에 대한 현대적 오마주 등은 모두 이성주의의 권위를 벗어나 해체로 향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류의 삶이란 너무나도 맹목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세워져있다. 그것이 곧 ‘사실’로의 믿음이다. 마치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은 나의 감각적 인식을 통해 사실임이 단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믿음은 곧바로 우리 존재로 퍼져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된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믿음이 몇 백년 전에는 심지어 ‘믿음’이라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음을 생각하면 <매트릭스>가 얼마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지 쉽게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매트릭스>는 우리가 당연시해온 모든 것들에 의문을 던진다. 아주 기초적인 것들에 의심을 하는 것이 해체적 사유의 첫걸음이며, 그러므로 <매트릭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신이 된다.


더 나아가 <매트릭스>는 인간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증거이다. 자신의 세계와 기계 문명에 관한 의심은 곧 자아와 그 주변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성찰이다. 자신이 믿는 것이 모두 그대로 존재하는가, 또 인간은 진리에 닿을 수 있는가. <매트릭스>는 집단적 성찰,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데카르트적 반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지금 이 시점에서 <매트릭스>에 대한 그 어떤 분석보다도 중요하게 다가올 것이다. 물론 <매트릭스>의 과감한 색감 조율과 시각효과, 디자인 컨셉 등등 기술적인 성취도 중요하다. 하지만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매트릭스>가 등장한 것은 마치 새로운 21세기를 정의한 격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21세기는 기존의 가치와 믿음을 해체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시대였던 것이고, <매트릭스>의 발표는 이에 대한 선포의 상징이다.


같은 해에 개봉한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을 보자. <파이트 클럽>은 데이빗 핀처의 맥시멀리즘적인 연출과 플롯이 돋보이는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이며, 많은 사람들의 소위 인생영화로 꼽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우선 연출적인 완성도에서 볼 수 있다. 작품 초반부에 등장하는 컴퓨터 그래픽 부분은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예고하는 듯 분위기를 압도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자유로운 구성에 특유의 리듬감이 가미된 데이빗 핀처의 스타일은 <파이트 클럽>에서 완전히 발산한 듯 보인다. 


그래도 <파이트 클럽>의 매력은 대부분 각본에서 나온다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선 <파이트 클럽>의 캐릭터를 보자. 에드워드 노튼 역의 주인공은 무기력하게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직접 쇼핑한 온갖 가구를 집에 채워 넣는 것에 만족을 느끼며, 매일 치료자 모임에 나가 삶의 위안을 얻는다. 속물주의적인 허울 속에서 병리적이고 취약한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한 상징들이다. 이 인물은 작중 중요한 반전 직전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보통 문학에서 활용하는 방법으로 인물의 일반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주인공을 보면 우리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 구석으로는 처연한 감정이 드는 것은 아마도 그의 모습 속에 아무 생각없이 물질주의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관찰했기 때문일 것이다.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은 집이 폭파당하면서, 비행기에서 우연히 마주친 타일러 더든과의 동거를 시작한다. 브래드 피트 역의 타일러 더든은 거의 허물어져가는 집에 살고 있으며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다. 영사 기사로 일하면서는 애니메이션 필름 중간마다 포르노 영화의 한 프레임을 끼워넣고, 웨이터로는 음식에 더러운 장난을 일삼는다. 또 성형외과에서 버린 사람들의 지방을 훔쳐 비누를 만들기도 한다. 주인공과는 완전히 반대에 서있는 외면과 내면을 지닌 타일러 더든은 주인공에게 일생일대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바로 파이트 클럽의 창설이다. 주인공은 술집 지하실의 파이트 클럽에서 몸이 부서질 정도로 싸우며 치료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직장 상사에게 듣는 꾸지람을 참지도 않는다.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이 삶을 ‘살게’ 되는 순간이다. 


<파이트 클럽>의 반전은 여기에서 등장한다. 사실 클리셰적이기도 하고 복선의 양도 많기 때문에 눈치채기 어려운 편은 아니다. 파이트 클럽은 몸집이 계속해서 커지다가 타일러 더든의 지시에 의해 테러집단으로 변모하게 되고, 주인공은 타일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잃게 된다. 파이트 클럽의 인원은 계속해서 불어나지만 주인공은 파이트 클럽의 테러에서 소외되며 타일러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사실 타일러 더든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스스로가 계획한 테러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파이트 클럽>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 줄거리가 곧 글의 테마이니 너그러이 봐주시라.) 관객은 영화를 보며 쉽게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일부가 투영된 듯한 인상을 받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삶을 버리고 보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지만 자유로운 삶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복제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겐 닿지 않는 선악과와도 같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의 정서는 꽤나 복잡해진다. 파이트 클럽이 만들어졌을 때까지는 단순히 현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파이트 클럽이 갑자기 테러를 일으키고, 주인공은 사실 타일러 더든이었으며, 주인공이 타일러와 치고박고 싸우며 테러를 저지하려고 하는 흐름은 관객에게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혼란은 작품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엔딩은 생각보다 별 것 없는 장면임에도 러닝타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장면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이트 클럽>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첫 번째는 당연히 현대인의 병리적인 삶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모두 주인공과 같은 꼴이라는 것이다. 이케아에서 산 가구들에 써져있는 상상의 가격표와 있지도 않은 병을 가진 채로 초면인 사람들 품 속에서 울며 삶의 위안을 갖는 모습은 데이빗 핀처의 현 시대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다. 두 번째는 주인공과 타일러 더든과의 파이트 클럽이다. 생각해보면 주인공은 자신의 집이 폭파되기 이전에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을 해방한 것은 어떤 깨달음이 아닌, 물리적인 폭력과 고통이었다. 마치 문명과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타일러 더든과의 삶은 주인공을 제도로부터 분리시킨다. 허나 그것은 단순히 해방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것이다. 파이트 클럽 이후 주인공은 항상 흉터와 피를 머금고 살며 삶을 사는 자세 또한 야만적으로 변모하였다. 양날의 검과 같이 타일러 더든의 파괴적인 본성이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향한 꼴이다. 그러므로 이는 온전한 해방이라고 할 수 없으며, 허무주의적 삶의 극단적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변화를 매우 자극적이고 낭만적인 시각으로 비추고 있다. 실상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품에 안겨 우는 대신 서로를 죽일 듯이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에 불과하지만, 영화는 이를 마치 모두가 원하던 해방과 자유의 원 형태인듯 카메라에 비춘다.

세 번째, 주인공과 타일러 더든이 동일 인물임이 밝혀지는 순간 영화는 이전보다 더욱 차가운 시선으로 인물들을 바라본다. 왜냐하면 무기력에 허덕이던 현대인과 허무주의와 야만적 파괴본능의 타일러 더든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이 시대를 살던 현대인들이 곧 자기파괴적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있다는 말로도 들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이트 클럽의 구성원이 점점 늘어나 주인공의 주변 모두가 파이트 클럽의 일부가 되었을 때 영화는 현대인의 자기파괴가 매우 중독적이면서 보편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파이트 클럽의 목적이 은행사 건물을 폭파해 모든 사람의 신용 기록을 지우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주 멍청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방과 구원을 외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엔딩에선 주인공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쏨으로서 타일러의 존재를 없애고  자신이 사랑하는 말라를 지켜낸다. 현대인의 자기파괴는 자아를 너머 사랑과도 같은 외부세계까지 뻗어나간다. 이를 막아내고 이성을 찾아내기 위해선 극심한 파멸을 경험하는 것뿐이다. 그후 주인공은 말라의 손을 잡고 빌딩이 하나둘씩 허물어져가는 모습을 조용히 목격한다. 완성된 해체의 테마, 파괴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해방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결국 <파이트 클럽> 또한 <매트릭스>와 같이 시대에 대한 집단적 성찰을 담아낸 것이다. 1999년에 개봉한 <파이트 클럽>은 당시까지의 사회와 이후 펼쳐질 세기에 대한 뜨겁고도 차가운 정의를 내린다. 문명에 빠져 허덕이다 지친 우리는 이제 허무 속에서 모든 제도와 문화를 파괴함에 이르렀고, 그 파괴를 통한 연대는 곧 내면으로의 파멸로 뻗어나간다. 시스템과 사회, 집단과 자아를 거쳐 사랑마저 파괴하려 했으나 이는 파괴되지 않은 단 하나의 가치였고, 데이빗 핀처가 <파이트 클럽>으로 남긴 21세기의 정의는 이 사랑만이 하나의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과 히피, 68운동과 첨단 산업화로 산업혁명 당시의 인격적 매장이 반복되었고 사회는 급기야 구원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대의 높은 자살률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 등등, 껍데기 뿐인 인간의 속에 파멸로의 욕망이 자리잡으며 사로를 끌어내렸다. 타일러 더든의 ‘우리는 특별하지 않아’는 현실의 허무주의에 눈을 뜬 사회를 닮아있다. <파이트 클럽>에서 보여준 광기와 파국은 20세기에 대한 데이빗 핀처의 냉혹한 진단이다. 


2022년을 맞이한 지금도 사회는 다르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시대에 대한 집단적 성찰은 지금까지도 숨쉬고 있다.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위대한 비웃음을 던진 <빅 쇼트>에 이어 아담 맥케이의 표적은 우리가 되었다. <돈 룩 업>에서 그리는 블랙 코미디의 세계는 불쾌할 정도로 우리의 세계를 닮아있다. 정치학의 멍청함과 디스토피아적 자본주의의 횡포, 기계와 언론에 사고력을 넘긴 듯 이성을 찾지 못하는 대중들까지. <돈 룩 업>의 각본은 정말 어제의 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지독한 리얼리즘을 품고 있다. 배우들의 열연(특히 메릴 스트립)과 아담 맥케이의 압도적인 시그니처 연출을 제쳐두고 보면, 분명 할 말이 많았다가도 어느새 전부 사라져 있다. 왜냐하면 <돈 룩 업>이 옳기  때문이다. <돈 룩 업>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아주 날카로운 단도로 찌르는 듯하다.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칼날은 우리가 정신없이 웃고 있는 사이를 틈타 막을 수 없는 일격을 날린다. 이렇게나 강력하게 다가오는 영화는 없었을 정도이다. 이 작품은 우리의 세대와 우리의 시대를 꿰뚫는다. 무엇이 중요한 지도 모른 채 말도 안되는 논쟁만 늘여놓는 어리석음. 도리어 운석이 눈부시게 아름답다.곧 우리의 시대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과학을 비웃는 정부와 사실을 비웃는 언론, 정의를 비웃는 기업. 기시감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기시감이 든다. PC주의에 물들어 본질을 호도하는 사상과 두 부분으로 나뉘어 서로를 물어뜯는 사회는 심지어 경제적 이익에 의해 움직임에도 그 부질없는 싸움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학과 이성은 낡아빠져 잉크가 나오지 않는 펜촉이며, 사람들은 이성 대신 공허한 스크린만을 바라보며 사고한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나 자신도 이에 자유롭지 못하다.) 아날로그를 버리고 디지털에 몸을 바친 것이다. <파이트 클럽>과 같은 결의 통찰을 가진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은 허름해진 우리의 사회를 아주 냉철한 눈으로 응시하며 시대를 진단함으로써 현재의 집단적 성찰을 놀라운 깊이로 담아낸다. 


<돈 룩 업>은 <파이트 클럽>처럼 시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주인공인 랜달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과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 역)이 맞이하는 인류의 종말은 <돈 룩 업>의 러닝타임 중 가장 평화롭고 평온하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저녁을 차리고 함께 수다를 떨며 식사를 즐기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돈 룩 업>에서 보여주는 사회의 대안이다. 지구로 날아오며 인류를 멸종시킬 운석은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돈 룩 업>의 엔딩은 지루하지만 동시에 클래식하다. 이로써 <돈 룩 업>은 시대에 대한 집단적 성찰과 함께 우리가 나아갈 방향로 완결된 사회극이 된다.


이번 글에서 다룬 세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반증함과 동시에 우리의 시대가 스스로 바라보는 모습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고 우리의 시대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의 철학은 거울이 되며, 영화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담아낸다. 창작과 감상은 그 경계를 흐린다. 성찰은 팽배해있으나 찾는 것은 오직 우리의 몫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137523/mediaviewer/rm1117157632?ref_=ttmi_mi_all_sf_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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