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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장벽 너머의 그 위대함.

너는 여기에 없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존재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부재이다.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종결시키는 부재는 존재의 실존을 희미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생명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죽음이다. 똑같은 이유, 똑같은 현상. 생명은 존재 중에서도 특별한 대상이며, 죽음은 생명의 실존을 앗아가는 부재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생명에게 동시에 영감과 경외의 원천이 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비극으로부터 도망치려 아등바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고,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블랙 스완>과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은 죽음을 바라보는 미지와 환상의 눈빛을 담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죽음을 통해 상실의 비극성을,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은 카타르시스를, 혹은 박찬욱의 <박쥐> 등과 같이 죽음에 대해 한없이 깊은 통찰을 담아낸 작품들도 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죽음에 대한 같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죽음의 비가역성이다. 열역학이 이야기해주듯 삶은 죽음으로 가는 비가역적인 과정이기에 죽음은 돌아올 수 없는 공포의 무언가로 자리 잡았고, 결국 이 비가역성은 죽음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작품들 모두 죽음의 비가역성에서 비롯된 인간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두렵거나, 슬프거나, 몽환적, 혹은 환상적인 직간접적 경험은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다양한 자세이다. 하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우리는 예술로서 이 거대한 한계에 도전한다. 죽음에서 삶으로, 부재에서 존재로 회복하려는 인간의 발걸음은 몇몇 예술 속에 담겨 비가역성이라는 장벽 너머의 위대한 가치를 밝힌다. 이 글에서 다룰 작품은 린 램지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다.


첫 작품은 린 램지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이다. 우선 독특한 제목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다. 이 영화의 동명 원작에서 원제 ‘You were never really here’는 알리바이의 한 마디이다. 사건 당시 부재를 입증하는 대사인 셈이다. 실제로 주인공인 조가 니나에게 제목과 같은 대사를 하기도 한다. 조는 성폭력의 피해 현장에서 니나를 구출한 뒤 이 대사를 하는데, 이는 니나가 받을 큰 상처로부터 구출시키려는 조의 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제목은 원작의 그것과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허나 영화의 제목은 원작의 제목 위에 한층 깊은 상징을 덮고 있는 듯하다. 원제를 다르게 보면 자연스럽게 그 뒤에 ‘Now you are.’이라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어진다. 과거에는 여기에 없었지만, 현재에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로서 실존하고 있음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제목의 상징성은 영화의 연출과 연기, 주제의식을 단번에 관통한다. 


린 램지 감독은 1999년에 <쥐잡이꾼>으로 장편 데뷔를 했음에도 아직 4편의 장편영화밖에 제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린 램지는 2011년작 <케빈에 대하여>의 흥행을 통해 명감독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6년이 지난 후 나온 린 램지의 최신작이 바로 <너는 여기에 없었다>이다. 비교적 친절한 스토리텔링과 연출의 전작과는 반대로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매우 함축적이고 시적인 것이 특징이다. 영화를 통틀어 매우 적은 대사량과 건조한 연출이 그러하지만, 특히 호아킨 피닉스 역의 주인공 조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내는 방식에서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시적인 매력이 집중되어있다. 전작 <케빈에 대하여>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한 인물의 트라우마적 내면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린 램지의 시그니처 연출은 치밀한 이미지의 산개로서 드러난다. 마치 현실에서 누군가가 트라우마를 떠오르는 것처럼 때와 공간을 가리지 않고 조각조각 등장하는 트라우마의 이미지는 대사 하나 없이 관객에게 거칠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 린 램지의 설계를 뒷받침하는 것은 조니 그린우드의 독특한 사운드와 호아킨 피닉스의 놀라운 연기이다. 조니 그린우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 보여주었던, 미세한 불협화음의 연속을 통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탁월한 방식을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훌륭하게 발휘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조의 시점 쇼트와 함께 들리는 불협화음은 관객에게 불편함과 긴장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관객이 처음 맞이하는 주인공 조의 모습과도 거리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 효과는 조의 트라우마를 표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로 당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이 작품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어느 정도로 놀라웠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호아킨 피닉스는 작중 인물인 조의 불안정한 심리를 얼굴과 몸으로 그대로 내비쳤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함축적인 표현에 맞춰 호아킨 피닉스는 아주 짧은 시간에 조의 불안정하고 자기파괴적인 심리를 관객에게 전달해낸다. 결과적으로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함축을 통해 조의 내면을 깊숙이 유영하는 작품이 되는 데 성공했다.

복잡한 영화의 만듦새에 반해 영화의 내러티브는 꽤나 단순하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닮은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조가 의뢰를 받고 니나를 구출하면서 생기는 사건들을 헤쳐나가는 내용이다. 사실 그 과정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다. 생각해보면 조가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영화는 복잡한 시퀀스를 동원하지 않는다. 작중 조는 니나를 두 번 구출하는데, 두 차례 모두 큰 문제 없이 간결하게 진행된다. 조의 폭력을 그려내는 방식 또한 CCTV 앵글을 활용하거나 점프컷을 연결하는 등 아주 미니멀하게 연출한다. 그래서 관객이 보기에 무미건조하거나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린 램지의 미니멀한 연출은 몇 가지 이유를 가진다. 일단 예산 문제가 있을 것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적은 예산과 짧은 제작 기간 동안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당시 제작 상황에 맞는 연출을 고심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적인 표현을 살리기 위함이다. 자세하지 않은 폭력 표현은 그 자극성을 줄이고 예술적인 감각을 취한다. 세 번째는 조라는 인물의 입체성이다. 조는 자신의 트라우마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으로 청부업을 하고 있다.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기에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심리이다. 하지만 조는 그럼에도 트라우마와 자살 충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누군가를 구원하려는 행위조차 제 역할을 하지 못함을 의미하기에, 영화는 관객에게도 조의 구원 행위가 실제로 구원이 될 수 없음을 각인시켜야 했다. 그 방법이 바로 폭력에 대한 독특한 연출이다. 보통 폭력은 카타르시스를 위한 도구로서 종종 사용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악인을 향한 폭력을 자세하게 그려낼수록 관객이 느끼는 도덕적 성취감이 높아지고 그 결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조의 폭력은 어떠한 성취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 묘사를 통해 관객 또한 어떠한 성취감도 느껴선 안 된다. 그러므로 린 램지는 조의 폭력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두어 카타르시스 대신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폭력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효과들을 위해 조가 저지르는 폭력은 낯설게 표현해 관객이 인물과 충분히 거리를 두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조니 그린우드의 사운드가 가진 미니멀리티가 융합해 이 영화는 인물을 바라보는 매우 세련된 방법론을 제시했다.


이렇게 복잡하고도 간결한 설계를 바탕으로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날개를 펼친다. 조의 트라우마를 그려내는 편집과 사운드의 탁월한 향연과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기는 이 영화의 포석을 거의 완벽하게 깔아놓는다. 그 포석이란 조의 내면 속 트라우마, 자기파괴의 충동 등으로 점철된 어떤 존재의 정체성이고, 이 위에는 니나가 등장해 영화 전반의 주제의식을 표출한다. 그 주제의식이란 곧 죽음의 비가역성에 맞서는 위대한 가치이다. 


이 글에서 바라볼 또 다른 작품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다. 우선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1969년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과 자식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찰스 맨슨 일당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엄청난 명성을 가지던 감독 로만 폴란스키에게 돌연 찾아온 비극이며, 할리우드의 모두가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다. (아마도 당시 할리우드의 모습과 미국사, 로만 폴란스키의 사건을 설명한 좋은 자료는 많을 듯하기에 넘어가겠다.) 그렇기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신작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고 발표하자 거의 모두가 걱정을 표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 불리던 쿠엔틴 타란티노였기 때문에 비극적인 실제 사건을 단지 자극적으로만 연출할까의 우려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그 제목이 가진 이미지처럼 전혀 무겁지 않은, 도리어 유쾌하고 순수한 매력의 작품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과거에 유명했던 서부영화 배우 릭 달튼과 그의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의 이야기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모든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인물들부터가 재미있다. 릭 달튼은 예전엔 잘 나갔었지만, 지금은 인기가 모두 식은 ‘옛날 배우’인데, 이 이미지를 위해 영화는 시작부터 릭 달튼의 배우 이미지를 완전히 짓밟고 시작한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알 파치노 역의 슈워즈가 릭의 현재 처지, 한물간 배우들은 새로 데뷔하는 배우들에 맞서는 악역만 연기하다가 패배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넘겨주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말을 직접 릭에게 얘기하는 장면이다. 첫 시퀀스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속된 말로) 찌질한 연기가 릭 달튼이라는 인물은 완벽히 설명한다. 클리프 부스는 릭의 스턴트맨이었지만 릭의 인기가 식어가면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있다. 클리프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전적이 있고,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도 아무 혐의도 받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클리프라는 인물은 이소룡과 촬영장에서 싸운 일화나 마가렛 퀄리 역의 히피 푸시캣과의 일화에서 비쳐진다. 그리고 릭의 옆집에는 폴란스키 부부가 살고 있는데, 로만 폴란스키보다도 본 영화는 그의 아내인 마고 로비 역의 샤론 테이트가 주로 등장한다. 샤론 테이트는 무명의 배우지만 할리우드에서의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물이다. 할리우드 거리를 거닐거나, 영화 티켓 판매원에게 자신이 저 영화에 나왔다고 소개한다거나, 그 영화를 재밌게 보는 관객들 사이에서 뿌듯해하는 등 할리우드의 배우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탁월함은 우선 이 인물 설정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대부분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 샤론 테이트와 그녀의 친구들이 찰스 맨슨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론 테이트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이상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특히나 샤론이 만삭으로 등장해 친구들을 밝힐 때는 환한 분위기의 상황임에도 짙은 서스펜스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서스펜스에 압도될 때쯤 영화는 릭이나 클리프로 시선을 돌린다. 영화 중반부에 세 등장인물의 하루를 교차시켜서 보여주는 부분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릭의 부분에서는 연민과 동정 혹은 우스꽝스러움이나 감동을 받고, 클리프와 푸시캣의 부분에서는 히피 마을에서 미세하게 쌓아올린 서스펜스를 느낀다. 릭은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심정 (어쩌면 쿠엔틴 타란티노 본인의 심정), 클리프는 당시 미국사와 히피 문화, 그리고 샤론은 할리우드에 대한 개인적인 트리뷰트의 역할을 적절히 분담한 셈이다. 


세 주요 인물의 탄탄한 밑그림에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나 <헤이트풀 8>에서도 보았던 나레이션의 등장과 만화를 연상시키는 듯한 시퀀스 간의 점프, 갑작스러운 시간대 변화와 뒤죽박죽으로 섞인 플롯의 중심을 지키는 경쾌한 리듬감, 릭 달튼이 등장하는 흑백 화면 작품의 삽입 등등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편집은 관객의 두 손을 모두 들게 하는 수준이다. 마치 작중 인물들이 술을 마시며 만담을 펼치는 것과 같이 쿠엔틴 타란티노 또한 화자가 되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읊어주는 느낌을 받는다. 구성, 순서 등 모두 말하는 사람 마음대로 뒤바꾼 이야기이지만 이를 러닝타임 내내 흥미롭게 만든 것은 편집의 공이 제일 크다. 전작들에서도 볼 수 있던 타란티노의 서스펜스를 자유자재로 빚어내는 능력도 주로 편집을 통해 구현되었다. 그 외에도 시각과 청각을 각각 장악하는 색감과 사운드(특히 사운드트랙) 또한 기대한 만큼의 퀄리티를 모두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그 주제에 가장 큰 힘을 쏟고 있다. 이 주제란, 놀랍게도 영화의 후반부 술과 마약에 취한 클리프 부스가 옆집으로 착각해 잘못 들어와 클리프를 죽이려 하는 엉성한 찰스 맨슨 일당을 아주 잔인하게 죽이고, 수영장에서 한적히 노래를 듣고 있던 릭에게 달려드는 히피를 릭이 화염방사기로 태워버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시그니처와 관련이 있다. 사실 찰스 맨슨 일당은 샤론과 친구들이 있는 옆집으로 쳐들어갔어야 했다. 그게 실제 비극적인 사건이며, 관객들이 영화의 막바지까지 예상했던 바이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는 조금 다른, 자기만의 버전을 소개한다. 바로 허구 인물인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듯한 이 주인공들이 찰스 맨슨 일당을 마주쳐 잔혹하게 제압하는 버전의 이야기이다.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와 같은 뒤틀린 영웅 서사와 같은 결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관객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비극을 단숨에 해소시킨다. 효과적이고도 영리했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선택 뒤에는 결국 이 작품의 주제, 그 장벽 너머의 위대한 가치가 있다.


그 위대한 가치란, 바로 사랑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조는 구원의 주체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구원의 대상이다. 가정폭력의 기억과 아프간 전쟁 참전의 상흔, 끊임 없는 자기 파괴의 충동 속에서 조를 구원한 것은 바로 니나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니나가 구출된 직후 다시 납치 당할 때 시작되었다. 니나는 납치당하며 조의 이름을 외친다. 마치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행위이기에 니나의 한 마디는 조에게 구원의 한 줄기와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걸쳐 오버랩되는 조와 니나의 카운트다운 소리는 같은 종류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며,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에서와 같이 이는 정신적 교감, 곧 사랑의 징표와도 같다. 니나가 처음 구출된 후 조의 차 안에서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따라 손을 움직이는 것도 사랑의 은유로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비슷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영화의 엔딩에서 니나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조의 모습은 어머니를 모방하는 아이의 모습이라는 점도 니나가 조를 사랑으로서 구원해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단편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닌, 넓은 의미의 사랑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란 죽음의 비가역성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대적하는 위대한 가치이다. 조라는 인물을 영화가 비추는 방식을 살펴보면, 마치 조는 그 자체로 죽음을 은유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에 조가 집에서 나와 길을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조가 나오기 전엔 온갖 사운드가 들리지만 조가 등장하는 순간 모든 사운드를 없애고, 또 길 건너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올 때 조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개의 소리를 바로 없애는 사운드 조율을 볼 수 있다. 호아킨 피닉스의 어눌한 말투와 낮고 느린 자세, 자신의 정체를 발설해 연락을 끊는 인물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로 ‘조’라는 인물이 곧 죽음, 더 나아가 부재 그 자체를 상징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상징성은 조가 자신의 어머니를 수장하면서 함께 자살하려고 하는 장면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이전까지 아무런 힘이 없던 조의 걸음은 물 속에서 니나의 환영과 환청을 경험한 후 힘이 실리게 되었으며, 눈빛 등에서 오는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다. 부재가 존재로서 실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니나의 사랑을 통한 구원은 조가 니나를 납치한 시장이 죽어있음을 발견했을 때 온전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부재에서 존재로 변화하는 첫 단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하는 첫 단계인 생명의 탄생을 말하듯 조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낀다. 그리고 이 구원은 니나의 품에서 마무리된다. 니나의 사랑은 부재를 존재로서 실존하게 한 것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점철된 사건인 폴란스키 가족의 살해 사건을 치열하고 재치있는 삶의 향연으로 변화한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작품 속에 담아낸 가치, 바로 할리우드에 대한 사랑이다. 릭, 클리프, 그리고 샤론의 하루에서 느꼈던 현장감은 곧 쿠엔틴 타란티노 본인이 느꼈던, 혹은 우리가 느낀 할리우드와 영화에 대한 돈독한 사랑이며, 이 사랑이 곧 할리우드 상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삶으로 회복시킨 것이다. 클리프 부스가 구급차에 실려간 후 남은 릭 달튼이 샤론의 집 대문에서 샤론과 인터폰으로 대화하는 순간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준비한 죽음의 비극에서의 구원, 할리우드와 영화와 당시의 미국 문화에 대한 사랑으로서 이뤄낸 구원이다. 이는 1969년 당시 비극의 시간을 살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당시 시대를 경험하지 않았던 관객까지도 엔딩에서 후련함과 감동, 그리고 애상을 느낄 수 있던 이유이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라는 영화의 영화사적 존재 가치이다. 죽음을 삶으로 되돌린 사랑의 위대함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모두 죽음을 삶으로, 부재를 존재로 회복시킨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더 나아가 존재의 근원적인 위협과 한계를 극복하는 우리의 방패로서 사랑이 있음을 미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는 실증적으로도 보여준 예술이다. 실존의 장벽을 넘어선 위대한 가치, 그리고 이를 영화라는 매체에 담아 선보인 작품들. 어떻게 보면 예술은 인간에게 일종의 훌륭한 도피처이지 않을까.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5742374/mediaviewer/rm2851847169?ref_=ttmi_mi_all_sf_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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