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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존재와 삶, 한계와 허상과 움직임.

킬링 디어, 홀리 모터스

나는 모든 명제를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거짓의 문제‘와 ‘믿음의 문제’이다.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이라는 개념과 유사할 듯 하다. 하지만 이미 사용되는 용어이므로 이 글에서는 다른 표현을 기용할 것이다.) ‘참거짓의 문제‘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으로, 참 혹은 거짓의 진릿값을 가지는 명제를 의미한다. 이와는 반대로 ‘믿음의 문제’는 주관과 감성의 영역으로서 참 혹은 거짓이 아닌, 각자 다른 생각과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명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1+1=2’와 같은 명제는 1, 2, +, = 등 수학적 기호의 정의에 의해 밝혀낼 수 있는 ‘참거짓의 문제‘이다. 하지만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명제는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믿음의 문제’이다. ‘여기 사과가 존재한다‘라는 명제 또한 ‘믿음의 문제’이다. 반대로 ‘나는 지금 사과를 본다‘나 ‘나는 어떤 표면에서 반사되는 가시광선을 수용해 사과로 인식한다’라는 명제는 ‘참거짓의 문제‘이다.


신의 존재에 관해 생각해보자.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글에서 서술하는 바는 종교적 표현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순수한 논리적 접근을 통해 논증을 이어갈 것이고, 어떤 종교에 대해 주관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논리에 의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분명히 ‘믿음의 문제’이다. 단순히, 신의 정체와는 무관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참거짓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 논점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라는 명제이다. 이 명제는 분명히 ‘참거짓의 문제‘이고, 그 진릿값은 참이다. 여기에서 나는 위 두 명제에서 혼용되는 ‘신’이라는 어휘에 대해서 분명히 하려고 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의 ‘신’을 본질로서의 신이라고 하자. 다시 말해,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본질로서의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같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라는 명제는 ‘본질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라는 명제와 같다. 여기에서 후자의 명제는 ‘참거짓의 문제‘이므로 누구든지 이 명제의 진릿값을 참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본질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또한 말이다. 하지만, 만일 ‘본질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라는 명제에서 ‘신‘이 본질로서의 신을 의미한다면 이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 명제는 정의되지 않은 어휘를 포함하는 명제이므로 진릿값을 따질 수 없을 것이다. 고로, 이때의 ‘신’이라는 어휘는 본질로서의 신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개념으로서의 신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본질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라는 명제는 ‘개념으로서의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같아짐을 볼 수 있다. 결국, ‘신은 존재한다‘라는 믿음의 문제는 ‘본질로서의 신은 존재한다’와 동치이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라는 (진릿값이 참인) 참거짓의 문제는 ‘개념으로서의 신은 존재한다’와 동치이다.


즉, 우리는 이제 신을 바라볼 때 믿음의 문제인 본질로서의 신과 참거짓의 문제인 개념으로서의 신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다. (사실 본질로서의 신에서 개념으로서의 신을 추출해내 다루기 쉬운 부분만을 뽑아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 개념으로서의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때 개념으로서의 신은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는 극도의 작가주의적 작품인 동시에 실험극이고, 무엇보다도 실존주의 영화이다. <킬링 디어>가 실존주의 영화라는 말은, <킬링 디어>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한계이자 위협을 다루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 근원적 한계로는 대표적으로 죽음이 있다. 죽음은 인간의 존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어떻게 해서도 넘어설 수 없는 근원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킬링 디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뛰고 있는 심장의 모습과 매 장면마다 가지는 부자연스러운 카메라 앵글이 대표적이다. 위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바라보며, 자연스럽지 않은 시각으로 인물을 바라보는 행위는 마치 카메라 뒤에 어떤 절대자가 존재해 이 모든 비극을 관조하는 듯한 감상을 준다. 그리고 이 절대자의 시각이란 곧 작중 인물인 마틴의 시각이고, 이 절대자, 즉 마틴은 곧 <킬링 디어>에서 다루는 존재의 근원적 한계이자 연속적 위협이다. 마틴은 스티븐의 가족에게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을 선사한다. 스티븐과 가족은 그 비극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처절히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비극을 받아들이고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마틴이 스티븐에게 선사한 비극은 마치 절대자가 인간에게 선사한 죽음과 대구를 이룬다.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처절히 노력하지만 결국은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결국 <킬링 디어>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한계인 ‘마틴‘을 이야기하는 실존주의 영화인 것이다.


더 나아가, 마틴은 개념으로서의 신 그 자체를 상징한다. 인간이 아무리 닿으려 해도 닿을 수 없는(바벨탑), 극복하려 해도 극복할 수 없는(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 존재. 인간에게 이해하지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할 비극을 선사하며 그 비극을 벗어나려는 헛된 행동을 관조하는 존재. 인간 실존의 근원적 한계이자 전지적인 존재. 바로 마틴이며 곧 개념으로서의 신이다. <킬링 디어>는 개념으로서의 신을 형상화한 하나의 거대한 우화이다.


우리는 개념으로서의 신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또한 <킬링 디어>를 통해서 우리는 개념으로서의 신이 곧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임도 알고 있다. 잠시 생각을 돌려보자. 과연 니체의 개념인 위버멘쉬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위버멘쉬는 개념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거부할 것이다. 인간이 위버멘쉬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의 상승을 이뤄내며(힘에의 의지) 주체적인 철학의 삶을 살아가는 것(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여기에서 개념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의 모습을 규탄하고 질책하는 존재의 설정을 통해 스스로 도덕이라고 믿는 것(노예도덕)을 실천하기 위해 헛된 노력을 쏟아붓는 삶을 살게 할 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예수, 불교의 부처 등 종합적인 신의 공통점 중 하나로 인간에게 가르침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았을 때 우리는 개념으로서의 신이 인간에게 가르침을 전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형태가 성경이나 법문 같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킬링 디어>에서 등장한 마틴의 비극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객관적 평가 기준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며, 즉 주관적 판단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그렇기에 위버멘쉬는 개념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주관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위버멘쉬로 거듭나기는 불가능하다. 더 좋은 표현으로는, 모든 인간이 위버멘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인간은 신앙심, 윤리의식, 소속감 등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가치들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인간이 그럴 것이다. 니체가 비판하는 모든 것들은 고전적으로 인간의 우선순위에 들었던 것들이기에,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을 행하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버멘쉬의 아이디어가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상향은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성립한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은, 확장하자면 모든 인간은 위버멘쉬가 되어 개념으로서의 신을 거부할 수 없으며, 개념으로서의 신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어떤 존재가 그 존재 스스로를 끝없이 위협하는 근원적 한계를 포용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의 본질적 질문이고, 끊임없이 위협받는 우리의 실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서 찾을 수 있다. <홀리 모터스>의 주인공은 드니 라방 역의 ‘오스카’라는 인물이다. 영화 내내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며, 리무진 속 분장실에서 외형을 계속해서 바꾸어 기업가, 거지, 광인, 아버지,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 암살자, 아코디언 연주가, 모션캡처 배우, 침팬지의 가족이 된다. 아침에는 기업가의 모습으로 깨어나 리무진에 탑승하고, 리무진 속에서 거지로 분장한 후 공원에서 내려 거지 행세를 하며 구걸을 하고, 또 리무진에 탑승해 딸의 아버지로 변신하여 딸을 파티에서 집으로 데려다 주고, 또 리무진에 들어가 노인 분장을 한 후 어떤 집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연기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스케줄‘이라고 표현한다. 마치 영화를 촬영하는 배우가 스케줄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그리고 이런 스케줄을 소화하는 오스카의 모습은 인간 전체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자. 우리는 상황에 따라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적절히 변모시켜 살아간다. 회사에 출근할 때는 회사원의 모습으로, 학교에 등교할 때는 학생의 모습으로 우리 스스로를 변장하며 살아간다. 즉, 이 영화에서 리무진은 인간에 대한 아주 독특한 비유인 것이다. 리무진은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그 속에서 내면은 일종의 분장을 통해 외면을 구성하고 사회로 나가 자신의 외면에 맞는 행위를 한다. 이 영화에서 삶과 죽음은 그저 분장의 연속이다. 이는 연기와 배우의 삶을 관계 맺기도 하며 삶과 인간 자체에 대한 거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삶이란 벗고 쓰는 가면처럼 각자 그 순간 우리가 맡은 역을 연기하는 것뿐이다.


만일 삶이 연기의 연속이라면, 과연 무엇이 본질인가. 생각해보면 모든 공간 속의 모든 시간 동안 모든 인간은 연기하며 살아간다. 본질은 숨겨둔 채로 허상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엔딩에서 오스카의 비서 셀린이 푸른 가면을 쓰고 리무진에서 나간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 허상의 연속이다. 더 나아가, 이 허상의 세계에서는 ‘미‘라는 것조차 흐릿해진다. <홀리 모터스>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을 담은 작품이지만, ‘미’에 대해서도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기도 하다. 오스카가 모션 캡처 배우가 되는 부분을 살펴보면, 검은색 타이즈를 입은 오스카는 빨간색 타이즈를 입은 어떤 여성과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행동을 한다. 이때 이 인물들의 행동은 꽤나 비인간적이고 기이하며 동시에 관능적이다. 하지만 이때 기괴한 형체의 정체 모를 존재들이 성행위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모습이 오스카와 여성의 행동을 본따 만들어진다. 오묘한 분위기로 연출된 모션캡쳐 배우들의 행동과는 정반대로, 시각 효과로 만들어진 형상은 매우 혐오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모션캡처 배우들의 아름다운(‘미‘) 행위가 시각효과를 통해 기괴한(‘추’) 모습으로 치환된 것이다. 이때부터 레오스 카락스는 ‘미’와 ‘추‘의 경계를 흐리기 시작한다. 이후 오스카는 광인의 모습(‘추’)으로 나타나 공동묘지에 있는 꽃들(‘미‘)을 씹어먹으며 공원을 향해 걸어간다. 도착한 곳은 여성 모델의 사진 촬영 현장이었고, 사진 작가는 ‘아름답다’를 계속해서 외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광인이  사람들을 밀쳐내 사진 작가 앞에 등장하자, 작가는 이번엔 ‘추하다‘를 외치며 모델 사진을 찍듯이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광인은 여성 모델을 어깨에 들쳐메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하 동굴로 납치한다. 그곳에서 모델의 옷을 찢어 얼굴(‘미’)을 가리고, 광인(‘추’)은 나체로 모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한다. 결국 모션캡처 배우와 광인의 삶을 통해 레오스 카락스는 사라져버린 ‘미‘와 ‘추’의 경계를 표현한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대사가 많은 것을 설명한다. 리무진에서 분장을 하던 중 리무진 속에서 오스카는 어떤 한 남성과 대화를 나눈다.


남성 : 안녕하세요, 오스카씨. 오늘 밤 정말 수고하셨어요. 여전히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세요?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요?

오스카 : 처음 시작은 연기의 아름다움이었죠.

남성 : 그건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다른 거에요.

오스카 : 보는 사람이 없어지면요?


<홀리 모터스>에서 보여주듯이 인간의 삶이 연기의 연속이고 허상의 연속이라면, ‘미’란 무슨 의미인가. 남성의 설명대로 ‘미‘라는 것은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다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삶은 허상의 연속이다. 오스카의 말대로, 보는 사람이 없다. 결국 우리가 ‘미’라고 생각하던 것들은 허상 속에서 촉발하여 허상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와 ‘추’라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다시 개념으로서의 신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어떻게 인간은 개념으로서의 신을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던 중이었다. <홀리 모터스>의 제목을 생각해보면, ‘홀리’는 신성한, ‘모터스‘는 움직임이라는 의미이다. 신성한 움직임, 혹은 움직임을 찬양하는 듯한 제목이다. 이 제목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데, 영화의 오프닝에서 들리는 자동차, 배, 비행기 소리와 대비되는 내부의 정적, 갑자기 등장하는 달리는 남성의 모습과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영화관의 군중, 죽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오스카의 옛 연인 진과 대비되는 오스카의 도망치듯 달려가는 모습, 멈추지 않고 바쁘게 달려가는 리무진과 오스카의 스케줄과 영화의 엔딩에 등장하는 시동이 꺼진 리무진들의 신세 한탄. 결국 <홀리 모터스>는 움직이는 것들을 찬양하는 영화이다. 이때, 움직이는 것이란 영화 자체가 될 수도 있고,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날로그에 대한 감독의 애착이 될 수도 있고, 영화에서 움직임의 이미지를 사실상 독차지하는 리무진과, 리무진이 상징하는 인간의 삶 자체가 될 수 있다. 허상으로 가득 찬 인간의 삶을 찬양한다니, 어떻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홀리 모터스>에서 신성한 것은 움직임, 리무진, 오스카의 삶, 곧 인간의 삶이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리무진 속에서 분장을 하고 나와 연기를 한다. 연기가 끝나면 또 다른 연기를 한다. 그러한 인간의 삶은 <킬링 디어>에서 목도한 개념으로서의 신에 의해 실존이 위기를 맞는다. 연기뿐인 삶은 근원적 한계에 도달해 움직임을 멈추고 비극을 맞이한다. 이런 인간의 삶이 신성한가.


그 모든 인간이 겪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투쟁이기 때문이다.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것, 인간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세계 속에서 인간 스스로가 살아내기 위해 쏟아낸 노력의 흔적이고 투쟁의 흉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흉터는 보기에 흉하고 추하겠지만 매 순간이 허상의 연속인 우리의 삶 속에서 미와 추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아름다움과 추함, 모든 ‘색‘은 ‘공’이었고, 이 허상뿐인 가치들을 벗어나 연기를 이어나가는 것, 투쟁을 이어나가는 것이 곧 배우의 연기, 영화이며, 인간의 근본적 삶의 모습인 것이다. 개념으로서의 신의 존재는 참이다. 이 사실은 믿기 힘들고, 또한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에 대해 어떤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변모하는 허상의 연속뿐이다. 하지만, 변모하는 허상은 또 하나의 움직임이다. 모든 연기는 움직임이고, 죽음의 순간의 직전까지의 모든 것이 바로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은 투쟁이다.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투쟁이 아닌, 한계 속에서 연기하며 살아가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이 투쟁은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며, 개념으로서의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투쟁, 신성한 움직임은 곧 개념으로서의 신의 존재에 의해 방증된다. 결국 인간이란 근원적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그 삶이 신성한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2076220/mediaviewer/rm2969416960?ref_=ttmi_mi_all_sf_3


이전 09화 장벽 너머의 그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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