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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실존주의 실증.

위대한 레보스키, 공주와 개구리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 말만큼 공허한 말도 없는 듯하다. 참으로 슬프지만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 그래서 도리어 이 말 한마디는 이상한 냉소의 흔적이 있다. 최근 발매된 250의 앨범 <뽕>이 그렇고,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가 그렇다. 


<위대한 레보스키>의 주인공은 제프 브리지스가 맡은 ‘듀드(dude)’이다. 본명은 제프리 레보스키이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듀드라고 부른다. 벌써부터 코엔 형제의 유머가 드러난다. 스스로를 듀드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이름이 ‘형씨’인 것과 비슷하다.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를 뭉그러뜨리다니. 하지만 자신의 본명인 레보스키에게 발목을 잡힌다. 억만장자인 동명이인 레보스키에게 돈을 요구하는 건달들이 집에 들이닥쳐 러그에 오줌을 싸고 간 것이다. 듀드는 더 이상 쓰지도 않는 이름 하나때문에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사건은 억만장자 레보스키의 납치당한 아내를 위한 몸값을 지불하는 임무부터 시작해 당최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사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전부 읊지 않는 이상 이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 의향도 없다. 심지어는 이 사건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위대한 레보스키>는 녹록치 않다고 떵떵거리는 현실에 엎드려 절하듯 조소의 시선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듀드의 차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부서지는 것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위대한 레보스키>의 유머는 극중 인물의 사건 밖에서 진정한 빛을 발한다. 작중 볼링을 잘 치는 ‘지저스(jesus)’는 멕시코계 성범죄자로 등장한다. 거기에 대고 보란듯이 유대인 윌터는 안식일 이야기로 받아친다. 월터의 베트남전 레파토리 “we are entering the world of pain” , 작중의 페미니스트와 허무주의자, 말이 안 통하는 래리 등등. <위대한 레보스키>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사회의 단면들을 러닝타임에 걸쳐 코미디의 문법 하에 산개시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코엔 형제의 거대한 농담은 바로 제프리 레보스키, 듀드이다. 제프리 레보스키(주인공)은 스스로를 듀드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에게 몰개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대부분 몰개성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이나, <위대한 레보스키>에서는 한 인물이 자아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기발하면서도 참 처연한 것이, 이름이란 원래 부모님에게, 윗 세대에게 물려받는 자아의 첫 형태인데, 이 이름을 보리고 ‘듀드’라고 불리는 것은 윗 세대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기꺼이 저버리겠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것이, 윗 세대의 유물이 곧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차라리 이름없이 살겠다는 당시 사회의 어떤 기조가 라이트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듀드는 ‘화이트 러시안’이라는 칵테일을 마시는데, 이 칵테일은 ’코캐시언(caucasian)’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백인이 마시는 백인 음료. 듀드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혼돈을 살았던 백인(미국인) 일반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방백은 이 부분에서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듀드는 계속된다(Dude abides)”라는 대사에서 시작하는 카우보이의 방백은 ‘인간세상의 코미디가 이런 식으로 세대에 걸쳐 전달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듀드에 덧입혀진 일반성이 끝도 없이 확장되는 순간이다. 듀드는 항상 어딘가에 살아남아 삶을 살아간다던가, 아기 레보스키가 태어날 것이라는 말도 전부 일맥상통하다. 듀드는 계속 살아오고 있다. 듀드의 보편성은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 모두에게 번진다. 듀드의 삶이 곧 우리 일반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윗 세대의 유물인 ‘제프리 레보스키’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났는가. 억만장자인 레보스키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있다. 제프리 레보스키라는 아이덴티티는 장애를 가졌음에도 자신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하여 막대한 부를 벌은 억만장자이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이름이 같은 인물들은 유사 부자관계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사실 이름이 같은 인물이 나오는 영화도 흔치 않고, 성은 물론 이름도 아버지의 것에서 가져오는 경우도 있기에 거의 혈연관계이다.) 하지만 듀드는 억만장자인 레보스키와 전혀 다른 삶을 산다. 듀드가 질책당하는 장면을 보면, 듀드의 삶 속 억만장자 레보스키의 삶의 원동력인 열정이나 노력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듀드가 자신의 삶에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듀드의 삶이 이토록 망가진 이유는, 마치 듀드의 차처럼, 듀드 본인만의 잘못은 아니다. 듀드는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 단순하게 러그 하나를 원했고, 어떤 주어진 일 혹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듀드의 삶은 재건불가능하게 무너져간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나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처럼, 심연을 빠져나오려 하는 처량하고 우스꽝스런 발길질이다. 이것이 <위대한 레보스키> 속 듀드의 삶이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사회의 전형이고, 결국 돌고돌아 우리네 삶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분명 듀드, 우리는 열심히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에 자꾸 순응하고 만다. 무엇이. 아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잠시 시선을 돌려보자, 그것도 아주 멀리로.


한 공주가 어느 날 금으로 만든 공을 연못에 빠뜨린다. 그러자 개구리가 나타나, 자신이 금 공을 찾아줄테니 자신과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공주는 개구리의 도움을 받아 금 공을 되찾지만, 개구리의 부탁을 무시하고 성으로 들어가버린다. 이후 개구리의 일을 알게 된 왕은 공주에게 개구리와의 약속을 지키라 말하고, 공주는 개구리를 자신의 방으로 들인다. 개구리를 방에 들이는 것에 분개했으나 공주는 왕의 조언을 명심해 개구리에게 자신의 침대에서 자라고 이야기한다. 개구리가 침대에 몸을 눕히는 순간, 개구리는 원래 정체였던 왕자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공주와 개구리 왕자는 밤이 지난 후 왕자의 나라로 함께 떠난다.


그림 형제의 동화 중 하나인 <개구리 왕자>의 이야기이다. 약속의 무게를 명심하라는 교훈, 혹은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근시안적 행복의 탈피를 주창하는 동화는 2009년, <공주와 개구리>의 원형이 된다. 이 <공주와 개구리>는 2000년대 약간 주춤했던 디즈니의 필모그래피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작품이며, 여러모로 센세이션이었다. 처음으로 흑인 문화를 담은 기념비적 작품이며, 원작의 재해석을 초월할 정도의 작법을 선보인, 말 그대로 수작이다. 


<공주와 개구리>는 보다 실존주의적인 실증을 제시한다. 그 시작은 이분법이다. <공주와 개구리>의 각본은 이분법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해결해낸다. 그 중 한쪽은 파실리에로 대표되는 고전적 행복론이다. 주인공인 티아나가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 나빈 왕자가 자신의 부를 되찾으려 계략을 세운 것, 개구리로 변한 나빈과 티아나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이들 꼭대기에 “꿈을 현실로” 이루어주는 파실리에의 부두교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원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노력을 통해 현실로 이루어내는 고전적 방법론이다. 전혀 복잡하거나 낯설지 않다. 노력을 통해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것. 어쩌면 누구든 응당 지녀야 할 삶의 가치이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마마 오디로 대표되는 ‘현대적 행복론’이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어놓자.


영화가 전제하는 이분법을 보여주는 훌륭한 소재 중 하나가 바로 별이다. 일반적으로 별은 소망과 기원의 대상이다. 별에게 소원을 열심히 빌면 소원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작중 대사처럼, 별은 영화 초반에는 기원의 대상으로 작용한다. 티아나가 별에 소원을 빌어 나빈을 만나게 되거나, 인간의 모습을 되찾게 해달라고 별에 소원을 비는 모습들은 모두 별을 기원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다. 허나 반딧불이 레이가 에반젤린을 소개하면서 별의 상징성은 다른 쪽으로 기울게 된다. 레이는 별을 자신의 연인인 에반젤린이라고 이야기하고, 나빈과 티아나는 그런 레이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 이후 레이의 사고는 나빈과 티아나 모두를 동화시킨다. 이전까지 소원을 상징하던 별은, 레이의 죽음을 통해 사랑의 대상으로 전복된다. 


인간이 되고자하는 <공주와 개구리>의 메인 플롯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개구리로 변하고, 다시 인간의 모습을 찾으려하는 과정은 자연스레 인간과 개구리로 개인의 모습을 양분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티아나와 나빈은 개구리로서 인간의 모습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개구리는 불완전한 상태, 인간은 완전한 상태이다. 애초에 왜 나빈이 개구리로 변했는지도 재밌는데, 돈을 탐하던 나빈의 마음을 읽고 파실리에는 ‘It’s the green you need’라고 말한다. 이때 green은 돈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초록색 개구리의 모습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사로움을 탐했다가 파국을 면치 못한 꼴이라는 것이다. 즉 개구리는 욕망 발현의 실패로 인한 불완전함이며, 인간은 모든 욕망의 잠재적 발현, 곧 희망적 완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마저 반전된다. 나빈과 티아나 모두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개구리로 행복하게 사는 것을 택한다. 욕망의 달성에는 성공도 실패도, 불완전과 완전도 없다. 심지어는 악어인 루이스도 인간이 되지 않고 행복해지는 결말을 얻어냈다. 실존주의의 실증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분법들은 모두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데, 그것이 바로 마마 오디의 넘버, <Dig a Little Deeper>이다. 마마 오디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존재들에게 한 마디만을 건넨다. 그것이 바로 “Dig a little deeper”, 내면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마 오디는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분리가 필요하다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면을 깊이 돌아보았을 때, 무언가를 원하기에 생겨나는 상념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으로 전이된다. 그것이 나빈에겐 돈이었고, 티아나에겐 아버지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원하는 것’에 그치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마마 오디라는 캐릭터는 여기에서 한발짝 더 나간다.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범종교적 우화이다. 물론 톨스토이의 짙은 기독교적 이상주의의 색채가 넘쳐나긴 하지만, 분명 이 작품은 종교의 울타리 너머까지 손을 뻗고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세 가지 물음은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카엘이 구두장이 시몬의 일을 도우며 이 세 가지 물음에 진리를 찾게 되는 내용인데, 거두절미하자면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하나하나 곱씹어보자.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다. 측은지심. 티아나의 아버지 또한 사랑을 지녔고, 티아나도 마찬가지이다. 허나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든 존재는 자신이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사이에서 헤메는 것이다. 마치 부유한 신사가 절대 찢어지지 않는 장화를 필요로 한 것처럼, 나빈은 자신에게 돈이 필요하다 믿었으며 티아나는 아버지의 꿈을 이룰 레스토랑이 필요하다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꿈을 좇아 살아간다 믿지만, 그것은 오직 원하는 것에 그칠 뿐. 진정으로 필요한 것, 모든 존재의 원동력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마마 오디의 근원적 해답이자 실존주의 실증이며, 에반젤린의 존재이다.


결국 마마 오디의 현대적 행복론은 원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원하는 것에 사로잡혀 영원히 쫓기고 사는 삶엔 진정한 삶이 없다. 필요한 것에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기 때문이다. 꿈, 소원, 희망같은 단어들은 이상에 불과하다. 때때로 그들은 파실리에(facile, 손쉽게)의 손에 변질되고 뒤틀린다. 그러한 허상을 관통하는 것은 모든 존재가 필요로하는 것, 바로 사랑이다. 마마 오디는 잊혀진 인본주의를 새로이 써내려간다.


자, 그럼 이제 상상해보자. <위대한 레보스키> 속 듀드, 우리 스스로를 마마 오디에게 데려갔다고 말이다. 마마 오디는 뭐라고 이야기할까. 당연히 답은 정해져있다. “Dig a little deeper.” 듀드라면 아마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며 귓등으로 흘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 듀드에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해왔던가. 


듀드는 억울한 일에 휘말려 잃게 된 러그를 원한다. 방 전체의 분위기를 환하게 했던 러그는 듀드에겐 일상의 도피처이자 쉼터이다. 야구 경기 녹음을 들으며 러그 위에 누워있는 듀드의 모습이 얼마다 평온한가. 이런 듀드는 러그를 원했고, 그래서 레보스키의 아내의 사건에 더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듀드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다.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마마 오디의 해결책, 필요한 것을 좇는 것이다. 듀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찾아봐도, 듀드는 필요한 것이 없다. 듀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아마 화이트 러시안 한잔을 부탁하지 않을까. 그 자체로 충만한 삶을 사는 듀드는 이미 충분하다. 매일 친구들과 볼링을 치고, 여전히 집세는 내지 않고, 똑같은 옷으로 몇달을 사는 삶. 얼핏 들으면 현실과의 타협만으로 가득찬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여전히 고전적 행복론의 관점에서 듀드를 평가한 내용이다. 듀드는 이미 필요한 것을 갖추었고,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듀드의 허물어가는 삶은, 그에게는 그저 삶일 뿐이다. 도리어 다른 이들보다도 행복한 삶일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소망의 허상에서 끝없는 굴레에 빠져 좇고 쫓기는 삶을 사는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쏟아붓는 시간은 성스럽고, 노력은 결코 배신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는가. 허나 이것이 과연 행복으로 향하는 길인가. 아마도 우리는 모두 파실리에에게 속아 헛된 꿈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저주를 풀기 위해선 원하는 것 이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충분에 만족할 수 있는 삶. 그것이 행복한 삶인 것이다. 그것이 ‘위대한 레보스키’의 삶이고, 그것이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한 해답이며, 그것이 곧 우리 존재의 실증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118715/mediaviewer/rm1519598080?ref_=ttmi_mi_all_sf_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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