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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시대의 격변, 세대의 갈등.

크루엘라, 아메리칸 뷰티

인간은 근원적으로 무지에 대해 공포를 가진다. 이때의 무지란 멀리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도리어 가장 가까이 다가오는 무지에 있어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자신의 무지가 초래할 어쩔 수 없는 결과에 대해 인간은 부정하려는 욕구 또한 지닌다. 어떻게든 자신이 버텨낼 수 있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착각은 곧 어리석은 방어 기제로 이어지게 된다. 이 방어 기제는 잠재적 위협에 대한 공격으로 작용한다. 이는 기성세대의 모습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구절을 떠올려보면, 모든 새는 알을 날아오르기 위해 세계를 파괴시켜야 한다. 다만 이때의 알이 그 속의 새를 구속하고 압박한다면, 새는 오히려 날아오르기 위함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알을 깨트려야 한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구속하고 압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인간은 파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파괴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동반한다. 그것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구속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신세대의 모습이다.


이 두 가지 모습은 인간의 근원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고, 우리 주변에 만연해있는 모습이다. 결국 세대 갈등이란 두 근원적 모습의 상충에서 벌어지는 가역적인 폭력의 구조인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두 편의 영화, <크루엘라>, 그리고 <아메리칸 뷰티>와 함께 세대 갈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에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에서 등장하는 악당 ‘크루엘라’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디즈니 영화 <크루엘라>는 스토리보다 연출을 더 중시하는 영화라는 점이다. 마치 에드가 라이트의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나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같은 작품처럼, 내러티브는 그저 훌륭한 연출을 위한 구실과 같이 기능한다. (그렇다고 예시의 두 작품이 약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크루엘라>는 이 비판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는 듯 보인다.) <크루엘라>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화려한 패션 산업과 문화를 소재로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특히나 의상이나 분장 등 디자인 분야에서 매우 훌륭한 기량을 선보인다. 특히 크루엘라가 백작 부인을 직접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퍼포먼스는 작중 인물의 충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또한 Nina Simone의 <Feeling Good>이나 John McCrea의 <I Wanna Be Your Dog>같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당시의 히트곡들을 삽입해 시대감과 역동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잡았다. 여기에는 편집도 힘을 가했는데, Ike & Tina Turner의 <Come Together> 리메이크 삽입 장면이 압권이다. 천을 박음질하는 손을 빠르게 따라가는 카메라 위에 신문 기사의 적절한 그래픽 처리와 음악의 리듬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장면이다. 촬영에서는 가끔 과도한 원테이크(에스텔라가 일하는 백화점), 전반적으로 토드 필립스의 <조커>가 연상되는 질감과 심도가 약간의 흠으로 다가오지만, 전체적으로 미세한 핸드헬드가 주는 몰입감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어 매우 인상깊은 완성도를 달성한다.


하지만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이 영화는 토드 필립스의 <조커>와 같은 고평가를 받지 못한다. 대표적으로는 원작과의 연계성이다. 원작인 <101마리의 달마시안>의 크루엘라는 달마시안 가죽으로 옷을 만드려는 인물인데, 본작에서 이 동기는 그저 농담 혹은 크루엘라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원작의 캐릭터와 본작의 캐릭터가 같은 캐릭터라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한 쿠키영상의 존재는 본작에서 원작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기보다 원작의 설정과 본작의 설정이 혼동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어떻게 보면 틀에 갇힌 시각일 수도 있다. 도리어 원작에서 모티브 정도만 차용한 오리지널 버전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거듭하지만, 마치 토드 필립스의 <조커>처럼.)


연계성을 고사하더라도, <크루엘라>의 매력을 깎는 포인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크루엘라>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 약점은 바로 스토리이다. <크루엘라>의 스토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의 갈등, 그리고 백작 부인과 크루엘라의 갈등이다. 특히나 전자 부분에서 영화는 크게 힘을 잃는데, 영화 후반 에스텔라의 장례 장면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어야 할 갈등 구도가 크루엘라의 주변 인물인 호레이스와 재스퍼의 관계에서 지저분해진다. 이 둘은 에스텔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크루엘라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크루엘라의 명령을 듣는 부하가 되었다. 이 점에서 그 두 인물의 서사가 비어있고, 전체적인 인물 설계에 또한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백작 부인과 크루엘라의 스토리 라인이 해진 내러티브를 이끌고 나아간다. 연출의 훌륭함도 이 부분에서 등장하기에 백작부인과 크루엘라의 갈등 구조는 <크루엘라>의 정수와 같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백작 부인과 크루엘라의 갈등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우선 백작 부인과 크루엘라는 당시 영국 패션 업계의 정상을 겨루는 경쟁에 있다. 결과적으로는 크루엘라가 경쟁에서 승리하며 백작 부인의 자리를 물려받는데, 이는 패션 산업 속 선구자의 세대 교체를 의미한다. 오랜 시간동안 명성을 축적시킨 기성을 파격적으로 무너뜨린 신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을 살펴 볼 수 있다. <크루엘라>는 크루엘라로 대표되는 신세대의 시각에서 백작 부인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가 어떠한 형태의 구속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해 매우 높은 설득력으로 이야기를 선사한다. 크루엘라가 백작 부인에게 느끼는 위협이나 위기의식은 관객에게서 신세대가 느끼는, 기성세대를 향한 시각으로서 재해석된다. 그렇기에 결말은 크루엘라가 백작 부인을 상대로 승리할 수밖에 없다. 모든 세대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가진 쪽은 시류에 탑승한 신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승리는 곧 패셔너블한 세대 교체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크루엘라와 백작 부인의 모녀 관계가 의미심장하다. 세대 간의 갈등에서 신세대는 기성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기성세대와 닮아가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신세대의 정통성은 기성세대로부터 비롯되기에, 신세대는 필연적으로 기성세대의 모습을 닮게 된다. 마치 크루엘라가 자신이 극히 증오하던 백작 부인을 혈연으로서 닮아갈 수 밖에 없던 것처럼 말이다. 이 둘의 모녀 관계는 이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생각해보면, 기성세대와 신세대도 모녀관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크루엘라>의 카타르시스는 세대 갈등 속에서 기성세대를 파괴시키고 승리를 쟁취한 신세대의 모습에서 나온다.


세대 갈등은 그 자체로 매우 폭력적이다. 이 갈등은 언제나 상호간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되기에, 자신이 이해하는 세계를 다른 정체에게 강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때 각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모습은 <크루엘라> 속에서 패션으로 여실히 드러난다. 백작 부인에게 세계는 자신의 컬렉션처럼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미에 대한 집착과 승리에 대한 편집증적인 강박이 기저에 깔려있는, 외면은 아름답지만 그 이면은 아주 잔인한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크루엘라의 세계는 자신의 드레스와 같이 매우 개성적이고 도덕보다 자존감이 우선되는, 그렇기에 자의식의 과잉 속에서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한 세계이다. 그리고 이 대비는 시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세대 갈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작 부인의 시각은 기성세대의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시각이고 크루엘라의 시각은 신세대의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시각이며, 즉 백작 부인과 크루엘라의 충돌은 곧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충돌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백작 부인이 크루엘라를 죽이려 하거나, 크루엘라가 잔인한 계획을 만들어내는 것은 곧 이 세대 갈등 구조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폭력은, 예를 들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 등장하는 폭력과는 달리, 그 자체가 갈등 구조 속에 녹아들어 경쟁의 일종으로서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세대 갈등과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폭력을 다시 돌아본다. 그렇기에 <크루엘라>의 내러티브를 깊이 들여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허점을 더더욱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세대 갈등 속 선택하는 행동을 들여다 보는 데에서 느끼는 우리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그 맥락이 같다.


<크루엘라>가 신세대의 시각에서 세대 갈등을 바라봤다면,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는 기성세대의 시각을 대변한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유려한 편집으로 복잡한 인물들의 관계를 엮어낸다. 많은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그 시점이 바뀌는 각본을 관객이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편집의 능력이었다. 예를 들어 레스터에서 캐롤린, 짐 커플로 옮겨가는 시점이나, 제인 가족의 이야기에서 리키의 이야기로 옮겨가는 흐름은 점프 컷이 아닌, 매우 참신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을 채택한다. 연출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데, 특히나 캠코더를 활용해 창문 사이를 같은 공간으로 배치하는 과감함이나, 장미꽃잎을 활용한 상징적이고도 몽환적인 연출은 각본이 가지고 있는 긴장감의 끈은 끊이지 않게 늘이는 역할을 한다. <아메리칸 뷰티>이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매우 놀라울 정도로 수려한 만듦새를 가진다.


<아메리칸 뷰티>는 블랙 코미디답게 이면에는 미국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제목 자체가 ‘아메리칸 뷰티’, 미국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미국 사회의 통상적인 ‘미’의 관념을 감독만의 비틀어진 시각으로 조명한다는 의미이다. 작중 레스터와 캐롤린의 변화가 대표적인데, 매우 불행한 삶을 살고 있던 레스터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자신의 딸의 친구인 안젤라를 향한 육체적인 욕망이고, 거기에 대마초와 운동, 직장 상사를 협박하는 폭력과 회의주의이다. 캐롤린도 다를 바 없이, 불륜과 인정욕구, 그리고 권총으로 자존감을 찾는다. 이는 인물이 활력을 되찾는 모습의 아이러니임과 동시에, 미국 사회가 현재까지 도달함에 있어 원동력이 되었던 ‘아메리칸 뷰티’를 가식없이 비춘 모습이다. 마치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와 같이, 영화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곧 레스터와 캐롤린처럼 왜곡된 욕망을 통해 성장했음을 지적한다. 이 맥락에서 제인과 리키는 레스터처럼 뒤틀린 인간들의 아들딸이다. 이들은 마치 <크루엘라> 속 크루엘라의 모습과 같이 자신의 정통성인 부모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삶을 꿈꾼다. 이들만이 서로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캠코더를 통해 세계를 깊이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리키가 말하듯, 그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관찰한다. 평범함을 거부하고 안젤라처럼 타인의 이해나 존경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전형적인 신세대의 모습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메리칸 뷰티>는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본 세대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두 부류의 가정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제인의 가정으로, 건강하지 못하며 건전하지도 않은 레스터와 캐롤린 부부이다. 두 번째는 리키의 가정으로, 가부장적이며 규율과 훈육을 강조하는, 폭력적인 군인 출신 아버지 프랭크 피츠의 가족이다.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영화는 사실 무엇보다도 이 두 가족의 충돌에 관한 영화였음을 알게 되는데, 이 충돌은 곧 두 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제인과 리키의 이야기와 레스터와 프랭크의 이야기이다. 우선 영화는 전자보다 후자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이는 각본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영화는 분명히 제인보다 레스터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비춰진다는 데에 있다. 레스터와 프랭크에게, 혹은 관객들 모두에게 제인과 리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처럼 말이다. 즉, 제인과 리키의 이야기는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무지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소재이다.


이에 대한 반응 격이 바로 레스터와 프랭크의 충돌이다. 이 둘은 기성세대를 상징하지만, 서로 다른 점이 존재한다. 우선 레스터 번햄을 보자. 레스터는 소위 ‘아메리칸 뷰티’를 받아들여 살아가는 인간이다. 매우 불안정한 삶을 살고, 현실은 절망으로 가득차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인간이다. 결말 부분에서 레스터는 안젤라와의 섹스를 멈추고 안젤라를 보살핀다. 그리곤 제인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안부를 이야기한다. 사실 레스터의 모든 변화의 핵은 안젤라를 향한 성적 욕망이었지만 레스터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무의식적 자아의 성장을 성취한다. 이때 레스터가 듣는 제인에 대한 소식은, 비록 안젤라의 목소리지만, 제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소식과도 같다. 이후 안젤라가 물어보는 자신의 안부를 ‘괜찮다’고 말하며 신세대와의 상호적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달함을 느낀다. 레스터는 신세대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를 극복해낸 기성세대이다.


영화 내내 리키와의 관계도 흥미롭게 그려진다. 파티에서의 첫 만남부터 레스터와 리키는 같은 사람인 것처럼 표현된다. 함께 대마초를 피우고, 동시에 제인을 사랑하며,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처지를 공유한다. 그렇기에 리키와 제인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레스터와 제인 사이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하며, 프랭크에 레스터를 죽이는 것 또한 리키를 죽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리키는 제인과 함께 뉴욕에 살기 위해 떠나는데, 이는 마치 레스터의 젊은 정신이 아직 남아 뉴욕에 뿌리는 내리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레스터는 자신의 의지를 세대의 흐름 속에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한 인물이다.


그와 반대로, 프랭크의 최후는 절망적이다. 프랭크는 참전 군인 출신으로서 집에 나치 접시를 전시해놓은 매우 보수적인 인간이다. 레스터가 자신의 딸을 이해한 데에 반면, 프랭크는 리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몰이해를 바탕으로 자기혐오를 리키에게 계속해서 비춘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곧 자신을 향한 혐오였으며, 레스터를 죽인 동기와 원동력 또한 그와 같은 혐오심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든이 레스터를 죽인 것은 자신의 아들 리키를 죽인 것과 같기에, 자기혐오를 투영시켜 아들을 살인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프랭크의 이런 행위는 리키에 대한 공포심에서 오는 방어 기제에 의한 것이다.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인 자기 자신을 닮게 된다는 착각에 빠져 이를 막기 위해 레스터를 죽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방어 기제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무지에 대한 공포심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즉, 레스터와는 달리 프랭크는 세대의 갈등 구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폭력을 휘두른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 둘의 마지막 차이는 결말의 연출에서 등장한다. 레스터가 죽은 후 주마등에 관한 레스터의 나레이션이 나오는 부분이다. 레스터는 지난 자신의 ‘멍청한 삶’을 돌아보는 데, 영화는 이를 남아있는 인물들의 모습 사이사이에 흑백으로 조율해 편집했다. 이는 레스터의 정신이 이 사람들에 남아있음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연출이다. 하지만 프랭크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정적 동요를 느낄 여유를 주지 않는다. 결국 이 엔딩은 폭력의 구조 속 잔류당한 기성세대보다, 불안정하고 단명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남긴 존재에 힘을 실어준다. 어쩌면 이것이 기성세대가 해왔던, 혹은 하게 될 숙명이 아닐까.


시대는 격변하고, 세대는 교체된다. 그 속에는 필연적으로 내재된 폭력이 몰이해의 장벽을 더욱 강화시킨다. 허나, <크루엘라>처럼, 또 <아메리칸 뷰티>처럼 결국 신세대가 승리하여 새로운 기성 세대로 변화한다. 이 과정은 당연한 것이며 항상 그래왔다. 이 점에서 <크루엘라>는 신세대에게 세대 갈등 속 폭력의 부조리를 지적한다. 기성세대와 닮지 않기 위해, 기성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맞서 싸우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임을, 그렇기에 이 당연한 사실을 수용하는 가치를 비춘다. <아메리칸 뷰티>는 기성세대에게 자신의 의미를 관철시키는 법을 알려준다. 신세대의 저항은 불가항력이므로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모습이 매우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아이러니하지만 아름다운지를 비춘다.


해소될 수 없는 차이와 갈등이기에 우리는 각자 스스로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서로의 세계를 강제하는 것이 아닌, <크루엘라>와 <아메리칸 뷰티> 속에서 찾아낸 사유를 바탕으로 현명한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169547/mediaviewer/rm1328128769?ref_=ttmi_mi_all_sf_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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