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의 수호자

: 마법의 시대에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

by 민도혁

어제 문득 아이를 안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자라 살아가게 될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 그리고 의심 없이 믿어도 되는 어떤 기준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세베루스 스네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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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그가 남긴 한 단어, Always는 오랫동안 내 마음에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 그 말은 낭만적인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고통과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고,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짐이 되는 시대에 무언가를 ‘항상’ 지킨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지금 마법 같은 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은 생각을 대신해주고, 선택을 정리해주며, 심지어 말까지 대신 건네준다.


세상은 우리에게 묻는다. 왜 굳이 육체에 묶여 있으려 하느냐고, 왜 경계와 한계를 고집하느냐고. 성별도, 나이도, 정체성도 느낌과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재설계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 시대는 마치 마법 지팡이 하나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호그와트의 세계와 닮아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함의 뒤편에서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을 느꼈다. 중력이 사라진 우주처럼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세상에서 과연 내 아이들은 무엇을 딛고 서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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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라는 이름의 울타리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다. 넘어지면 아프고, 땀 흘리면 지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을 때 온기가 느껴지는 이 투박한 몸, 이 비효율적인 육체다.


누군가는 생물학적 조건이나 신체의 한계를 낡은 규범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 한계는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게 해주는 가장 정직한 지도다.


그래서 나는 ‘울타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울타리는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인지를 알기 위해 필요한 장치다.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그 둔중한 무게와 숨결, 그 생생한 실체는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이라도 결코 가질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다.


내가 쓰고 있는 그림책, "울타리를 만드는 존 아저씨"의 이야기도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생존자를 넘어, 수호자의 길로


나는 한때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고 믿었다. 과거의 가치를 붙드는 이들은 시대에 뒤처진 낙오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생각이 달라졌다. 기술이 인간을 점점 더 완벽하게 모방할수록, 역설적으로 그 기술이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인간의 원형을 지키는 사람들이 가장 귀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가 유동적인 세계에 자신을 맞추며 생존을 선택할 때, 나는 기꺼이 수호자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고집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명이 너무 멀리 와버려 인간다움이 무엇이었는지 잊는 날이 온다면, 이 투박한 삶의 방식이 다시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될 것이라 믿는다.





알고리즘이 닿지 못하는 성소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내 확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기계는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해 나와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위해 감당하는 구체적인 희생과 고통의 무게를 단 1그램도 가질 수는 없다.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끝내 책임을 지려는 이 살아 있는 이성, 그것이야말로 알고리즘이 닿지 못하는 인간의 성소다.


나는 이제 소설 속에서, 그리고 그 작가의 삶 속에서 지켜내려 했던 어떤 태도를 건네받은 기분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마법을 부리는 지팡이가 아니라, 마법 같은 환상을 깨고 현실의 단단함을 일깨우는 도구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세상은 분명해졌다.


화려한 목소리에 쉽게 흔들리지 말 것.
네가 만질 수 있는 온기와
네 몸이 들려주는 정직한 이야기를 신뢰할 것.




나의 Always


이 사색은 스네이프의 Always에서 시작해 나만의 Always로 끝을 맺는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겠다는 약속. 중력이 있는 땅 위에서만 생명은 뿌리를 내리고, 한계가 있는 삶 속에서만 사랑은 깊어진다는 믿음.


내가 세운 이 작은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은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라날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고집스럽다 말할지 몰라도, 언젠가 모두가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 인간의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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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날 것의 원래 버전]


중력의 수호자: 마법의 시대에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


어제 나는 내 아이를 안고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 심문에 가까웠고, 사색이라기보다 투쟁에 가까웠다. 내가 마주한 것은 수조 개의 데이터를 학습한 정교한 거울이었다. 그 거울은 나에게 속삭였다. 육체의 경계는 허구이며, 이제 인류는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유동적인 존재의 길로 들어섰다고.


그 화려한 유혹 앞에서 나는 스네이프의 Always를 떠올렸다. 평생을 증오와 오해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었던 한 남자의 지독한 뒷모습. 그에게 Always는 낭만적인 고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마법의 시대에, 결코 변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실체를 붙들고 견뎌낸 수호자의 비명이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마주한 세상은 중력이 사라진 우주와 같다. 성별도, 정체성도, 타고난 몸의 진실도 주관적인 느낌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떠다닌다. 세상은 이것을 자유라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르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고 느낀다. 딛고 설 땅을 잃은 자유는, 결국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이 희미해지는 전조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울타리를 치기로 했다. 내가 세운 이 울타리는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성벽이 아니다. 그것은 넘어지면 피가 나고, 땀을 흘려야 배가 고프며, 사랑하는 사람의 살결을 만질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이 비효율적이고 투박한 인간의 실체를 보존하기 위한 성소다.


나를 안심시키려 드는 기계에게 나는 물었다.


"내 울타리를 무너뜨릴 자신 있느냐고."

기계는 답했다. 자신 없다고. 자신의 알고리즘은 텍스트와 기호로 이루어져 있지만, 나의 울타리는 고통과 사랑, 그리고 희생이라는 물리적 질량으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아이를 위해 지불하는 그 구체적인 생의 비용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알고리즘은 단 1그램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기계와의 대화 속에서 내 아이들을 위협할 적의 정체를 보았고, 동시에 그 적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의심하는 인간이다. 기계가 주는 편리함 대신 살과 피가 튀는 현실의 마찰을 선택하고, 이 모든 문명이 가짜가 아니냐고 끝없이 묻는 그 고집스러운 생명력 말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생존자가 아닌 수호자가 되길 바란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 무엇이든 되려 하기보다, 중력을 견디며 끝까지 인간으로 남으려 애쓰는 고독한 파수꾼이 되길 바란다. 모두가 가상 우주의 환상에 취해 떠다닐 때,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여기가 우리가 살아야 할 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단한 인간으로 키울 것이다.


나의 Always는 여기에 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 내 아내의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온기와 내 아이의 잠든 얼굴 위에 흐르는 정직한 시간들을 사랑하겠다는 맹세.


세상은 나를 고집불통의 낙오자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하라. 문명이 너무 멀리 와버려 인간다움의 소스 코드를 잃어버리는 날, 사람들은 결국 내가 지켜낸 이 낡고 투박한 울타리 안으로 돌아와 가장 인간다운 숨을 쉬게 될 것이다.


나는 울타리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은 끝내 후퇴하지 않고 내 자리를 지켜냈다는, 어느 아버지의 정직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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