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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한 Jan 16. 2022

내가 믿음이 있는 이유

나를 바라보는 순간들

나는 믿음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강한 믿음이 있다. 신이 있다는 믿음이며, 그리고 나를 향한 신의 계획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얘기가 공감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불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거나, 혹은 숨기고 싶지 않다. 그만큼 강한 확신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목사님이시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도 목사님이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1900년대 초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통해 한국 땅에 개신교가 처음 들어온 순간, 그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집안이 우리 집안이다. 집안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자면 상당히 복잡하고 긴데,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과 같이 역사적인 사건들과도 연이 있다. 이처럼 나는 상당히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다. 


하지만 내 믿음, 그러니까 신앙이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나를 향한 주변 사람들의 진심 어린 기도, 그리고 길다면 긴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감정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내 믿음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 집안의 배경은 상당히 종교적인 집안이지만, 우리를 가르치시는 부모님은 신앙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교회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교회에 가는 것이 싫지 않았고, 내 삶의 일부분이라고 느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목사의 아들이어서 싫지 않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곤 한다. 하지만 내 대답은 항상 "아뇨, 전 너무 좋은데요"였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대부분 수요예배 혹은 새벽기도와 같이 일요일에 행해지는 종교행사가 아닌 추가적인 종교행사를 드린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목사의 아들인 나는, 놀랍게도 그런 종교행사에 익숙하지 않다. 가끔 우리를 해당 종교행사에 데리고 가시긴 했지만, 한 번도 강제로 데려가신 적이 없다. 부모님은 나에게 교회가 강제로 가는 곳이 아닌 자연스럽게 가는 곳, 그 공간 자체가 너무나 편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해주셨다. 이것이 내가 교회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을 가지지 않게 된 중요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교회가 너무 편해서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믿음의 발전은 여러 사건, 혹은 경험을 통해 이뤄졌다. 예를 들면, 급하게 필요한 물건이 있었는데 그 물건이 생겼다던가, 급하게 필요한 목돈이 마련되었다던가,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우연의 일치 같은 일들이 그 경험들이다. 그렇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우연의 일치가 나한테는 믿음의 증명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상당히 종교적인 이야기다.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는 그저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주장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종교적인 경험 때문만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믿음의 가장 큰 동력은 믿음을 통해 품게 되는 마음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향한 다른 이들의 기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나의 평안을 위해, 안전을 위해, 축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마음을 느꼈고,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행해지는 순간, 우리가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나를 향해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임을 알고 있는가?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신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나도 상당히 명확한 답을 얻는 것을 좋아하고,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기에 "내가 믿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하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향한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이다. 그래서 믿음은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줄 수 있다면, 만약 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전혀 후회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강조한다. 사실,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 기독교는 사랑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논리가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에 있다. 그냥 믿기만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믿음을 가지는 행위의 이유를 모르는 것과 동일하다. 경제적으로 표현하면, 열심히 일을 해 받은 월급을 소지한 채 저축도, 소비도 하지 않는 행위다. 조금 더 일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음가짐이 모여 나의 행동으로 나타나고, 나의 행동들이 모여 내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믿음의 가치다. 


신의 존재 유무가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더 확신을 가진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마음의 따듯함을 품게 되는 경험과 마음을 주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지금처럼 죽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도 나는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 


나는 내 삶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품어주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웠으면 한다. 이것이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2022.01.16.


커버사진 출처 : https://icgbooks.net/3064/%EC%9D%B4%EB%9F%B0-%EB%AF%BF%EC%9D%8C%EC%9D%84-%EB%B3%B8-%EC%9D%BC%EC%9D%B4-%EC%97%86%EB%8B%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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