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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Dec 05. 2023

당신 비행기가 출발했습니다

나 홀로 뉴욕에


트럼프 호텔에서 곤히 잠든 밤. 새벽 5시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져서 눈이 떠졌다. 몇 시쯤인가 확인하려고 폰을 켰는데, 카톡이 하나 와있었다.


작가님, 오늘 비행기를 타지 않으셨다는 연락이 와서 걱정돼서 연락드려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죠?


잠결에 본 문장에 잠시 멍해있다가, 다시 눈을 끔뻑거리며 카톡을 읽었다.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고? 누가요? 저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하며 항공권을 다시 확인했다.

10월 XX일 00:35.

그리고 핸드폰을 켜고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10월 XX일 05:10.


어라? 뭔가 잘 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이건 뭔가 잘못된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비행기표 날짜를 헷갈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내가 저지를 리가.


그 상태로 10분 정도 현실을 부정하다가, 일단 화장실을 갔다. 볼 일을 보고 나서 물을 한 모금 마시니, 그제야 이 현실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와.. 나 비행기 시간 착각한 거야?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하지?


이제 와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쳐봐야 상황이 달라질 건 없다. 에리카를 바로 깨우지 않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을 한 다음 깨워야겠다 싶어서 비행기표 앱을 켜서 오늘 갈 수 있는 비행기를 검색해 봤다. 에어프레미아는 이틀에 한 번 운항하기 때문에 1.5일을 더 뉴욕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대한항공 표는 약 8시간 뒤에 표가 남아있었다. 그래, 이거라면!


"에리카, 에리카, 갑자기 깨워서 미안한데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부스스하게 눈을 뜨는 에리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길래,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날짜를 착각해서 비행기를 놓쳤어요. 우리가 탈 비행기가 이미 5시간 전에 출발했데요."


"... 네?"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계를 보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어서 비행기표 파일을 다시 확인하는 그녀를 보니 역시 나랑 비슷한 ESTJ 답다 싶었다. 나와 똑같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상황을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와.. 아니, 내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지.."


그래, 에리카는 미국을 한 두 번 온 사람이 아니다. 학교도 미국에서 졸업했고, 뉴욕에서 일했던 현지인이니까. 시차가 헷갈리거나 착각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응,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착각하다니, 뭐가 씌었었나 봐요. 크크."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일단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검색해 봤는데 에어프레미아는 이틀에 한 번 비행이라 하루 더 있어야 하는데, 임박해서 티켓팅하는 거라 금액이 많이 비싸더라고요. 나는 다행히 항공사 통해서 약간의 추가금만 내면 변경이 가능하다고 해요. 에리카는 그게 안 되는 티켓이니까, 차라리 대한항공을 타는 게 어때요? 그건 마일리지가 있지 않아?"


내 말을 듣곤 대한항공 앱으로 들어가서 마일리지를 적용해 항공권을 검색해 보더니 자기는 그렇게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한다. 유일한 문제는 그 대한항공 비행기가 7시간 뒤에 뉴욕 공항을 출발한다는 것.


"팀장님, 근데 저만 먼저 가면 팀장님은 뉴욕에 이틀 동안 혼자 있는 건데.. 어떡해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 거리며 괜찮다고 말했다. 물론 완전히 괜찮지 않았다. 난 기초 영어회화도 더듬으며 하는 영알못이고, 뉴욕은 이번이 처음이며, 겁이 아주 많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무서우니 너도 이틀 더 같이 있어라. 비싼 비행기표값을 내더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리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난 전혀 상관없고, 이 참에 가보고 싶던 미술관 더 구경하고 가면 되니까 오히려 좋아요. 내 걱정 말고 일단 당장 짐부터 싸요."


새벽 6시 쯤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이미 글러버렸기 때문일까, 이 와중에 사진을 찍을 여유가 있었다.


"팀장님, 저 준비 다 했어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문 앞에서 날 바라보는 에리카를 꼭 껴안아 주며, 조심해서 공항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나도 이따 이동하면서 수시로 연락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에리카를 보낸 뒤, 호텔 방에 정적이 맴돌았다. 덩그러니 남은 내 캐리어와 짐들. 그래, 나 정말 뉴욕에 혼자 남겨졌구나.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었다. 플랜 B, C, D에도 들어가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건은 벌어지곤 한다. 또 한 번 깨닫는다. 인생에 절대는 없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내 캐리어만 덩그러니 남은 호텔방. 이 와중에 커피와 사과라니, 나도 꽤 돌발상황에 강하구나 싶었다.


배가 고파져서 호텔에 준비되어 있던 사과와 커피를 먹었다. 이 비싼 호텔을 맘껏 누리고 가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에 수영장을 가려던 계획도 헬스장에 가려던 계획도 일단 접었으니 먹을 거라도 남김없이 먹고 가겠다는 거지근성이 다시 튀어나왔다. 에리카도 설마 내가 사과 3개를 다 먹고 체크아웃할 줄은 몰랐을 거다.

사과로는 배가 차지 않아서 주섬주섬 대충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이 근처에 매그놀리아 카페가 있다는 걸 어제 알게 되어서, 좋아하는 레드벨벳 컵케이크를 하나 먹기로 했다. 카페에서 포장한 뒤 바로 숙소로 들어가기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커피도 마실 겸 센트럴파크를 잠시 산책하기로 했다.

밤의 센트럴파크는 너무 위험하니 절대 가지 말라고 했지만, 아침의 공원은 건강한 뉴요커들이 가득했다. 조깅하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서 아침을 먹는 대학생들, 손을 잡고 산책하는 노부부까지. 공원의 가장자리를 조금 걷다가 적당한 벤치에 앉아서 카페라테를 홀짝였다. 뉴욕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이제 꽤 즐겁기 시작했다. 에리카랑 둘이 다녔다면 느껴보지 못할 기분이라 생각하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순간을 맘껏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센트럴파크의 아침




혼자 뭐 하고 놀지?


원래대로면 에리카와 함께 자유의 여신상 크루즈를 타러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 없이 혼자 멀리 가기엔 약간 걱정되어서 최대한 브루클린 근처에서 돌아다니기로 했다. 다행히 내겐 뉴욕이 자랑하는 2개의 미술관이 남아있었다. MOMA와 The MET.

혼자 다니는 첫날은 MOMA(뉴욕현대미술관)를 가고, 내일은 MET(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워낙 미술관을 좋아해서 한국에서도 혼자 전시관람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하물며 전 세계 최고의 미술품을 모아놓은 두 미술관이라니! 하루를 통으로 써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MOMA는 센트럴파크에서 멀지 않은 위치라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할 수 있었다. 관광객이 이미 많이 입장해 있었지만 5층으로 되어 있는 큰 미술관 내부는 전시를 관람하기에 매우 여유로웠다. 몇몇 유명 작품 앞에서만 약간의 밀집이 있을 뿐, 대부분 아주 한적하게 구경할 수 있어서 4시간 정도 돌아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현대미술의 보고답게 멋진 작품이 가득했던 MOMA


몇 시간 더 구경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슬슬 다시 배가 고파졌다. 지하에 있는 기념품 매장에서 늘 사는 엽서와 자석, 볼펜을 구매한 뒤 밖으로 나왔다. 에리카와 다닐 때는 그녀의 식성에 맞춰 고기, 고기, 그리고 와인으로 저녁을 먹었다. 한 끼에 20만 원 넘게 먹으며 호화로운 식사를 했지만, 혼자는 그만큼 먹을 수 있을 리 없으니 간단한 걸 포장해서 호텔에 가서 먹기로 했다.


지나는 길에 가볍게 구경하기 좋은 레고스토어.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여신상 레고.


내가 부자라면 트럼프호텔에 연박하며 편안히 하루를 더 보냈겠지만, 가난한 월급쟁이의 사치스러운 일탈은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트럼프호텔에서 체크아웃한 뒤 캐리어를 끌고 근처의 4성급 호텔로 이동했다. 여기도 유명한 전통 있는 호텔임에도 5성급에 머물다 온 내게는 모텔같이 느껴졌다. 좁은 내부에 꽉 막힌 뷰인데도 1박에 50만 원이라니. 혼자 숙박비를 부담하게 되니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가 와닿았다. 이미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을 에리카가 문득 보고 싶어졌다.


옮긴 숙소는 앞의 두 숙소보단 빈약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료 조식과 해피아워 간식이 맘에 들었다.




혼자 보낸 밤은 시끄러운 룸 클리닝 청소기 소리에 끝나버렸다. 체크아웃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비어있는 방을 청소하겠다고 청소기를 시끄럽게 돌리다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숙소에서 나온 건 오전 11시쯤. 무료 조식으로 나온 바나나와 빵을 가방에 넣은 뒤, 캐리어를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에 이어 뉴욕 나 홀로 여행 이틀 차.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가기 위해 어차피 다시 센트럴파크를 가야 했기에, 이번 여행에서 가보지 않은 구역의 공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난 시간이 많고 걷는 걸 좋아하는 여행자니까.


멋진 잼을 보여준 밴드. 그리고 요가하는 뉴요커들.


센트럴파크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매력적인 공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칭 공원 전문 여행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틈만 나면 공원을 걷는 편인데, 이곳의 규모는 좁은 한국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내부에서 길을 잃는 건 물론이고, 시체가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에리카의 경고가 사실이겠구나 싶은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한 시간 정도 걷다가 전망이 예쁜 호숫가에 앉아 아침에 싸 온 조식 빵과 바나나를 먹었다. 배고픈 이유도 있었지만, 곧 도착할 미술관에 가기 전 가방을 가볍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빵과 바나나는 한국에서 먹는 것과 똑같은 맛이었지만 이 맛이 그리워질 순간이 분명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멋쟁이 커플을 몰래 찍어봤다. 나도 다음엔 연인과 함께 센트럴파크에 오고 싶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집트관과 중세미술품관이 가장 유명한 곳이다. 지도를 꼼꼼히 보며 하나하나 번호를 체크하지 않으면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작품이 많아서 아쉬울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역시 난 시간은 많고 체력이 좋은 여행자니까. 하나하나 모든 관을 둘러보며 5시간가량을 관람했다. 어제 MOMA까지 합하면 이틀간 10시간 가까이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품을 끝없이 보다 보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 저녁을 먹고 캐리어를 찾으러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다.


하루 늦어버린. 아니, 하루 더 선물처럼 받게 된 뉴욕에서의 나 홀로 여행도 끝나가고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의외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며칠 째 한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젊은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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