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센트럴파크뷰 호텔의 값어치란
마지막 날 밤은 평생 두 번 가보지는 못할 곳에서 묵을까?
뉴욕 여행을 계획하며 에리카와 가장 고민했던 게 숙소였다. 뉴요커로 살아본 적이 있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뉴욕의 호텔은 아주 비싸고 괜찮은 룸 컨디션이거나, 조금 비싸고 낡았거나, 비싸고 위험하거나. 셋 중 하나라고. 뭐 이런 선택지가 있나 싶었지만, 그나마 고를 수 있는 건 조금 비싸고 낡았어도 위험하지 않고 위치가 좋은 곳이었다. 그게 처음 묵은 하얏트 그랜드 센트럴 호텔이었다.
우리가 묵는 6박 중 5박은 거기서 하되, 마지막 1박이라도 좋은 곳에서 마무리하면 어떨까 하고 의견이 모아졌고, 그렇다면 무조건 센트럴파크 뷰 호텔에 묵어봐야 한다며 에리카가 추천한 곳이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뉴욕이다.
트럼프 호텔이라니! 전 미국 대통령의 그 호텔이라니!
"좋아! 트럼프 호텔을 내가 또 언제 가보겠어? 1박에 얼마인데?"
"1,100불이요."
".. 응?"
내가 뭘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천. 백. 불. 1박에요."
에리카가 씨익 웃으며 또박또박 다시 말해준다.
천 백 불. 환율이 하필 제일 높은 시기였어서 원화로 환산하니 15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와. 1박에 150만 원? 1박에?
머릿속이 멍해지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3박 4일 여행 경비를 다 합해서도 150만 원 이내로 다녀온 적이 있을 정도로 가성비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1박에 150만 원을 태운다고? 물론 에리카와 절반씩 내니까 75만 원이겠지만. 75만 원이라니. 전남편과 신혼여행을 갔을 때도 1박 40만 원대의 호텔에 묵었었는데,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에리카, 우리 신혼여행 가는 거니? 나 신혼여행 때도 이렇게는 안 가봤는데? 크크."
"어머, 팀장님이랑 저랑 허니문 맞아요. 당연히 킹 베드로 잡을 거라고요."
"응?"
에리카의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니, 어차피 내 말을 듣진 않겠구나 싶어서 그렇구나 했다.
그래. 어쩌면 이것도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해보지 못할 경험이다. 내가 내 의지로 1박 150만 원짜리 방을 잡을 일은 나중에 로또 1등이 되더라도 거의 없을 일이다. 로또 1등이 되어도 소박하게 일상을 살아가려고 생각 중인 욕심 없는 성격이니까.
이번 여행은 내가 안 해본, 새로운 경험을 잔뜩 해보고 돌아오는 여행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마지막을 평생 다시 경험하지 못할 5성급 호텔에서 센트럴파크뷰를 보며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구나 싶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좋아, 진행시켜!"를 외쳤다.
뉴욕에서의 5일은 금세 지나갔다. 다른 곳에 안 가고 뉴욕에서만 6일 간 지내면 별로 할 게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마지막 1박을 위해 숙소를 옮기고 있었다.
트럼프 호텔 앞에서 택시가 서자, 기다리고 있던 호텔 포터(벨보이라고 부르기엔 연세가 있는 분들도 있으니 이 단어가 적당해 보인다)들이 우리에게 인사한 뒤 캐리어를 들어줬다. 하얏트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서비스에 기분이 벌써 좋아졌다.
"굿 에프터눈, 레이디스."
컨시어지의 지배인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체크인을 하는 동안 로비에 앉아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중년의 무리가 보였다. 우리처럼 어쩌다 큰 마음먹고 묵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상처럼 5성급 호텔에 묵는 사람들 같단 생각이 드는 그 자연스러움. 언젠가는 나도!라고 생각하기엔, 작고 소중한 월급에 그건 어림도 없겠구나 싶어서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들어간 방은 들어서자마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우리 진짜 오늘 여기 묵는 거야?
거실 창 밖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센트럴 파크. 날씨도 기가 막히게 화창했다. 에리카와 나는 짐도 그냥 던져놓은 채 창가로 가서 "와..", "와.." 하며 서로 감탄사만 내뱉었다.
그렇게 거실과 침실에서 보이는 센트럴 파크를 감상하고 수없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은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다른 시설을 구경했다.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 타워 뉴욕은 5성급의 좋은 호텔이긴 하지만 오래된 호텔이기도 해서 시설이 최신식은 아니었다. 샤워룸도 오래된 건물 특유의 느낌이 났고, 환풍구도 예스러웠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세월이 흘러도 고급스러움은 낡지 않고 농익을 뿐이다. 모든 장소, 디테일, 가구에서 신경 쓴 티가 많이 나는 좋은 호텔이었다.
팀장님, 근데.. 좀 이상해요.
실컷 구경하며 사진을 찍던 에리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뭐가 이상해요?"
"이 방.. 우리가 예약한 방이 아닌 것 같아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얼른 예약 내역을 뒤져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우리가 예약했던 방은 디럭스 파크뷰 룸으로, 베드룸 1개만 있는 방이었다.
"어라.. 여기는 베드룸에 거실까지 있는 방이잖아?"
"그러니까요. 설마 룸 업그레이드 해준 건가?"
둘이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텔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 방의 정체를 확인했다.
우리가 지금 들어와 있는 이 방은 "1 베드룸 파크뷰 스위트 룸"! 무려 USD 1,400인, 한화 190만 원인 더 좋은 방이었다.
다시 한번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와!! 룸 업그레이드받았나 봐!"
"진짜 너무 좋아요! 190만 원짜리 방이라니!"
내 감동과 놀라움은 2배, 아니 3배로 커졌다. 룸 업그레이드를 하필 딱 이 호텔에서 받게 되다니! 역시 우리는 럭키걸이라며 서로 신이 나서 춤을 췄다. 원래도 멋져 보이던 방이, 이젠 눈부셔서 쳐다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간사한 거다.
오후 2시에 체크인을 했는데, 저녁 일정을 나가기 전에 호텔 방을 좀 누리자며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기로 했다. 침대는 그녀가 원한 대로 킹사이즈 베드였고, 창 밖 풍경은 역시 훌륭했다.
"잠드는 게 아까워. 우리 이따 꼭 나가야 되니?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싶은데."
"킥킥. 저도 그래요. 그래도 디너 예약해 놓은 스테이크 하우스는 꼭 가봐야 된다고요!"
에리카와 누워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금방 단 잠에 빠져들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 저녁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평일 오후 5시쯤이라 길거리엔 퇴근하는 직장인이 눈에 많이 띄었다. 거리는 주말보다 한산했고 공기는 선선했다. 트럼프 호텔에서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은 역시 핼러윈의 나라답게 수많은 핼러윈 장식을 구경하며 갈 수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다. 이제 떠날 때가 되고 보니 마리화나 냄새조차 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이었겠지만.
마지막 디너는 에리카의 추억 속 장소 킨즈 스테이크 하우스. 뉴욕에서 일할 때 친구들과 와서 양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던 추억이 지금도 생각난다며 에리카의 표정이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상기되는 게 느껴졌다. 매장 안은 전통이 있는 레스토랑답게 연식이 느껴지는 벽 장식과 소품들이 가득했고, 대부분 현지인들이 많았다.
주문한 와인을 테이스팅 하자마자 에리카가 "와.. 팀장님, 주스에요."라고 말하자 서버의 웃음이 터졌다. 한국어로 말했지만, 주스라는 단어를 들었을 테니까.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킥킥거리고 우리끼리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그래, 주스 맞네. 너무 맛있는 와인에 기분이 이미 들떠있었다.
스테이크는 기대보다는 살짝 아쉬웠지만, 지금 내가 에리카의 추억 속 장소에 함께 와있다는 사실에 이미 행복했기에 맛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식사가 끝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 흘러갔다.
뉴욕의 마지막 밤을 실컷 만끽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외출한 사이 룸메이드가 들어와서 우리가 어질러놓았던 침구를 다시 정리해 주고 가셨다. 그뿐 아니라 침대 머리맡에 물과 야식, 그리고 발아래 러너까지 깔아주셔서 완벽한 취침을 위한 준비를 마쳐주고 가셨었다. 조명 역시 저녁에 맞는 적당한 조도로 조절되어 있는 걸 보니, 이래서 5성급 호텔이구나, 세심한 서비스가 하나하나 차이가 나는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우리 진짜 내일 밤에는 공항으로 가는 거예요? 너무 아쉬워요."
"그러게. 이 여행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 더 머물고 싶다 여기에."
에리카와 이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때만 해도, 다음 날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채로.
윌라 오디오북에 <손을 꼭 잡고 이혼하는 중입니다>가 오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