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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Oct 20. 2024

여우와 함께 (2)

“야. 너 진짜 웃긴다. 그거 원래부터 깨져 있었어.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난 그냥 딱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그녀가 내게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리고 난 처음부터 따질 생각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어……. 여기 깨졌네?” 이 말 한마디였다. 아니, “원래는 안 그랬는데?”라고 한 마디 더하기는 했다. 고작 그걸 가지고 이렇게 화를 낸다고?


다른 애들한테 보일 생각도 없었다. 어제 사온 CD를 정말 잠깐 책상 위에 올려두었을 뿐이다. 제우스의 새로 나온 싱글 CD였다. 요즘 세상에 누가 CD를 사서 듣겠냐마는, 팬은 장식을 위해서라도 CD를 사 모은다. 콘서트를 앞두고 있는 마당에 음반을 하나라도 더 팔아주고, 음원 사이트에서는 열심히 곡을 스트리밍 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돌 팬의 사명이요, 아이돌 팬의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혼자 옥상에 올라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어제 산 CD를 보려고 학교에 가져왔는데, 잠깐 책상 위에 올려둔 사이에 이미나가 다가오더니 그것을 잡아드는 것이었다.


“이거, CD네? 제……. 뭐라고 읽는 거지?”


“제……. 제우스.”


“아, 제우스? 누구야? 아이돌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미나는 ”이거 잠깐 봐도 돼?”라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정쩡하게 “어…… 봐도 돼.”라고 대답했다.


그때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이미나는 CD를 들고 교실을 나갔다. 점심시간도 지나고 5교시가 끝난 뒤에 이미나가 내게 CD를 돌려줬는데 케이스에 금이 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그저 읊조렸을 뿐인데 그 말을 들은 이미나가 갑자기 흥분을 하며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나는 그냥……. 여기가 깨져서 깨졌다고 말한 것뿐이야. 너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그랬다는 거잖아. 그거 원래부터 그랬다고.”


이미나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그런 소리가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네 말대로 원래 깨져 있었겠지.”


이미나의 얼굴에는 일종의 승리감이 엿보였다.


“야, 넌 뭐 그런 애들을 좋아하냐? 컨셉도 존나 유치하던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이 대화의 목적이 나를 조롱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리에 앉아 예전처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무색무취한 공기처럼 떠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반 아이들 시선이 나와 이미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주목받는 건 싫다. 가능하다면 먼지가 되어 이 교실 안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타노스(마블 어벤저스)가 손가락을 튕겨 사람을 먼지로 되돌리듯, 나도 손가락을 튕겨 나 자신을 먼지로 만들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왜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조롱하고 짓밟으며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걸까? 그래, 나도 내가 이 교실의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있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티 안 나게 풀을 씹으며 바깥을 배회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결국 육식 동물은 약한 놈을 물어뜯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가 없는가 보다. 본능이니까.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이미나의 등뒤로 현민의 모습이 보였다.


“야. 너 이러는 거, 너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뜻하지 않은 현민의 말에 이미나는 당황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뭐?”


“너네 할아버지. 고기 잡다가 물에 빠져서 돌아가신……. 너 할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지랄병이 도지는 거 아니야?”


놀랍게도 현민의 말투에는 어떤 조롱도, 어떤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랄병'이란 단어조차 사실 그대로를 차분하게 말하는 느낌이었다.


“이 미친년이 뭐라는 거야?”


이미나의 외침에도 현민은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너 한 달에 한 번은 그러잖아.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갑자기 혼절하고 그러잖아. 그거 다 너네 할아버지 혼령이 니 목에 타고 있어서 그래.”


너무나 차분한 목소리라 이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히 다른 사람한테 업을 옮기지 말고, 액막이를 하든가 살풀이를 하든가 해서 해결해.”


그때 현민이의 손에는 팩으로 된 얇은 초코우유가 들려 있었다. 내게는 그 모습이 다소 초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손에 초코우유를 들고 무당 같은 소리를 하는 여자아이.


“씨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안 그래도 평소에 미친년 같은 게…….”


이미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현민을 밀치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갑자기 땅바닥에 엎어지며 쓰러졌다. 아이들이 놀라서 그녀의 곁으로 달려왔고, 한 아이가 이미나를 등에 업고 양호실로 달려갔다. 앞줄에 앉아 있던 반장은 담임 선생님을 부르러 급히 교무실로 달려갔다.


“거봐. 저렇게 갑자기 쓰러진다니까.”


어수선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현민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혼잣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담임은 나와 현민이를 불러 야단을 쳤다. 현민이가 이미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녀가 충격을 받아 쓰러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담임이 다그치는 동안에도 현민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선생님은 현민을 노려봤고 결국 현민이도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담임은 귀찮은 눈치였다. 그녀 역시 반의 누가 사교성이 떨어지고 겉도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두 아싸가 이렇게 나란히 불려 와 훈계를 듣고 있는 꼴이라니.


이미나는 반에서 입지가 좋은 편이었다. 바닷가에 터를 잡고 사는 집안은 큰 고기잡이 배를 여러 대 운영해서 돈을 꽤 벌었다고 했다. 원양 어업도 하고 있다고 했다. 읍내에는 통조림 공장도 운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가세를 불려 온 집안인데 할아버지는 이미나가 어린 시절에, 동네 지인들과 배를 타고 재미 삼아 낚시를 하러 갔다가 풍랑에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익사했다. 당연히 내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나와 이미나 사이의 일이 있고 난 후 반에 떠돌던 풍문을 들고 알게 된 것이다.


그런 해프닝이 있고 난 후, 이미나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이 딱히 내게 말을 걸거나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이미나는 이틀 정도 결석을 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뭔가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민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현민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진짜 귀신 보는 거 아닐까? 엄마가 무당인데 딸도 신기를 가지고 태어난 건가?”


“난 미나네 집 이야기 이번에 처음 알았어. 걔는 그런 걸 다 어디서 듣고 알았던 걸까? 진짜 귀신이 보여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미나네 할아버지 귀신이 걔 눈에는 보이는 걸까?”


여전히 나는 먹이사슬 최하층부에서 조용히 풀을 씹으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현민이는 역시 현민이만의 세계에서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며 지내고 있고.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눈에 띄게 누군가를 괴롭히는 아이도 없었다. 은근하게 누군가를 자기보다 아래로 깔보고, 기회만 되면 조롱을 할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므로, 노골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 아이는 없었다. 일종의 도덕적 세력 균형이라고 할까?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비웃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사람이란 이야기도 듣고 싶은 마음. 우리 반에는 그러한 아슬아슬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잡아먹히지 않은 초식동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고, 가끔 현민이 내게 와서 말을 걸면 그럭저럭 말을 섞으며 지내고 있었다.




“아………… 엄마………… 왜 안 되는데에…………?”


장사 준비를 하며 식기를 마른행주로 닦고 있는 엄마를 내가 계속 닦달하자 엄마는 손바닥으로 내 팔을 때리며 말했다.


“아휴, 귀찮아. 안 된다고 했잖아. 서울까지 너 혼자 어떻게 가? 엄마는 장사해야 하잖아. 주말인데.”


“아, 나 혼자 갈 수 있다고. 가기 전에 알아보고 가면 되잖아. 인터넷에 다 나와 있다고. 왜 안 되는데? 혼자서도 갈 수 있다고.”


“서울이 얼마나 복잡한데? 엄마도 혼자 가면 길 잃기 다반사인데 너 혼자 거길 어떻게 가?”


“아, 진짜, 갈 수 있다니까. 나 혼자 갈 수 있다고오.”


엄마는 내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는 절대 안 되니까, 현민이랑 같이 가든가. 현민이네 엄마한테 말해서 주말에 잠깐 문 닫고 같이 좀 갔다 오라고 물어볼 테니까, 그러면 갈래?”


“아, 싫어. 현민이랑 가는 거 싫어. 나 혼자 갈 수 있다고오. 그냥 나 혼자 갈래.”


“아휴, 그럼 가지 마. 안 돼. 쬐끄만 게 혼자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아, 왜 갑자기 키 얘기야? 키 작다고 서울 못 가면, 엄마도 서울 못 가지.”


엄마는 참다 참다 손바닥으로 내 등을 찰지게 때렸다.


“안 돼. 말했어. 현민이네랑 가면 보내줘도, 너 혼자서는 절대 못 가.”


방에 들어가 두 시간 정도를 발을 동동거리며 짜증을 내던 나는 결국 엄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현민에게 내 취향을 말하는 것, 현민이는 관심도 없는데 나 혼자만 들떠서 가야 한다는 것, 무당인 현민이네 엄마랑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가슴이 답답했다.


마이너 아이돌이라 그런지, 공연 날이 다 되어 티켓팅을 했는데도 여유 있게 예매를 할 수 있었다. 나랑 현민이, 두 장의 표만 예매했다. 아줌마는 나와 현민이가 공연을 보는 동안 근처에서 서울 나들이나 하겠다고 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아줌마가 차를 몰고 우리 가게 앞에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아줌마는 평소 점집에서와는 달리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회색 원피스를 입은 현민이네 엄마는 사십 대 아줌마보다는 삼십 대 아가씨로 보였다. 현민이가 엄마 얼굴을 많이 닮아서, 평상복을 입은 현민이네 엄마는 터울이 큰 언니처럼 보였다.


“은지야. 얼른 타.”


아줌마가 뒷좌석을 열어주었고, 뒤에는 현민이가 타고 있었다. 현민이는 나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아줌마는 엄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서울 가서 공연 보고, 그다음에 같이 저녁 먹자. 잠은 호텔에서 자고 내일 동네로 돌아오자.”


아줌마는 운전석에서 돌아보며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무당의 그 짙고 이상한 화장을 하지 않은 아줌마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전에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냥 평범한 아줌마였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결혼을 안 한 처녀로 보일 것도 같았다.


“뒷좌석도 다들 안전벨트 매세요.”


현민이와 내가 안전벨트를 매자 차에 시동이 걸렸고, 아줌마의 자랑임이 분명한 외국산 자동차(난 차 메이커는 잘 모르는데 벤츠인가 BMW-버스,메트로,워킹?-인가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사실 난 그 두 개밖에 모른다)는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차가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갈 때 즈음, 현민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나 이거 며칠 전에 샀어.”


제우스의 화보집이었다. 당연히 나도 하나 가지고 있는 애장품이다.


“넌 누구를 제일 좋아해?”


현민이의 질문에 나는 쭈뼛쭈뼛 대답을 못하다가, 화보집에 나와있는 다섯 멤버 중 텔레마코스 진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나도 이 친구 괜찮다고 생각했어. 다른 멤버들 하고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


그녀의 말에 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넌 얘네 좋아하지도 않는데, 나 때문에 괜히 따라가는 거 아냐?”


현민이는 얇은 손가락으로 화보집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아냐. 나도 오늘 서울 가는 거 너무 기대 돼. 서울에는 한 번도 안 가봤고, 요새 제우스 노래 들어봤는데 좋은 곡이 많은 것 같아. 멤버들도 잘 생겼고.”


차는 어느새 읍내를 벗어나 한적한 2차선 도로로 들어섰다.


난 현민이의 말을 들으면 그 안에 늘 진심이 담겨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남들 눈치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을 감추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이 나랑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감추고, 하기 싫은 말은 남의 기분을 위해서 억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그리 좋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울로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서 새우튀김 우동을 한 그릇씩 먹었고, 호두과자랑 호떡을 사서 차에 올랐다. 현민이도 간식을 조금씩 먹었는데 그녀는 새처럼 조금씩 음식을 먹었고, 나는 코끼리처럼 우걱우걱 단숨에 먹을 것을 먹어치웠다. 이런 식성 차이 때문일까, 태생이 아니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지만, 다이어트가 하루 만에 실패한 이후로 나는 그냥 모든 것을 놔버렸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먹고 싶을 때는 열심히 먹었다. 내게는 공부가 있으니까……. 쩝쩝.


공연장은 ‘대학로’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다. 4호선 혜화역 근처.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서 지하철 역을 어디서 갈아타야 하는지 알아봤는데 아줌마 차를 타고 오는 바람에, 그냥 졸다가 깨다가 하니 공연장에 도착했다. 최정상급 아이돌 그룹은 이것보다 훨씬 큰 공연장에서 콘서트를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제우스는 ‘최고신’의 이름과 달리 인기가 거의 없다. 남다른 취향을 가진 소녀들을 위한 아이돌이라, 소박한 대학로 극장에서 생애 첫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아줌마는 우리를 극장까지 데려다주고, “이 근처에서 시간 보내고 있을 테니까 공연 끝나면 전화해”라며 현민이에게 말했다. 아줌마는 회색 원피스 위에 흰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가 지나가는 길마다 남자들이 힐긋거리며 그녀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신기가 있는 사람은 잘 늙지도 않고 요기가 흐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현민이네 엄마도 그런 것 같다.


공연이 시작되기 30분 전. 나와 현민이는 야광봉을 들고 공연장을 바라봤다. 진형을 실물로 영접하게 되다니, 이게 생시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현민을 바라봤다.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등뒤로 흘러내려 있었고, 그녀는 그림이 그려진 검정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몸에 매끈하게 달라붙은 청바지 차림. 나는 그녀의 어디에 여우의 혼령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잠시 현민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 현민이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에 같이 여기저기 놀러 다니던 거 생각난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나는 현민이와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며 함께 뛰어놀았다. 집이 가까웠고 엄마들 사이도 친했다. 여자 혼자 딸을 키운다는 점도 같았다. 우리는 둘 다 외동딸이었다. 그래서 엄마들도 자매 같았고, 현민과 나도 자매 같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며, 그리고 2차 성징이 나타난다는 중학생이 되자, 현민이와는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 민감해지던 시기, 나는 왠지 우리 둘이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것이라 생각했다. 술집 딸과 무당집 딸. 거기에 현민이는 워낙 특이한 애였으니까. 나는 절대적으로 ‘정상인’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들과는 척을 지고 살려고 했다. 그중 하나가 현민이었던 것 같다.


“그래. 초딩 때 생각나네. 읍내 여기저기 안 다닌 곳이 없었는데…….”


읍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가면 바다가 있었다. 현민과 나는 자주 바다로 가서 조개를 잡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뛰어놀다가 근처 횟집 아줌마에게 부탁해 횟집에서 발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아무리 특이하다고 해도, 현민이도 바다가 보이면 감탄을 하고, 조개가 보이면 놀라면서도 나와 함께 손으로 조개를 잡던 아이였다. 도대체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냥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 누구보다 더 여중생 같고 평범한 아이인데…….


공연이 시작되고, 영웅들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나는 팬클럽의 공식 응원법에 따라, 제우스의 시()를 목놓아 따라 불렀고, 주술사처럼 응원봉을 흔들며 그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현민이도 아는 노래들을 따라 부르며 공연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좌석이 배정되지 않은 스탠딩 공연이었고, 널널한 객석에서 우리는 몸을 흥겹게 흔들며 공연을 즐겼다.


많은 수의 팬들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취향과 마음을 가진 팬들 앞에서 그리스 최고신의 이름을 딴 다섯 아이돌은 모든 것을 뿜어내며 노래하고 춤췄다. 세상은 그들이 가진 끼와 열정을 알지 못했으나 나와 이곳에 모인 팬, 그리고 아직 덕질의 레벨이 낮기는 하지만 현민이까지, 우리만큼은 그들의 서사시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찬란히 노래하여라, 영웅들이여. 비극을 딛고 일어서는 나의 텔레마코스 진형이여. “넌 내꺼 내꺼, 어디 있어도 내꺼. 우리 둘 사이는 누구도 갈라놓지 못해.” 음…… 최고신의 시라고 하기는 조금 유치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나와 현민은 이런 노래 가사를 열심히 따라 부르며 1시간 30분 동안 몸을 흔들고 콘서트를 즐겼다.


화려한 불빛이 꺼지며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극장에서 나왔다. 10월의 어느 주말, 땀에 젖은 몸에 바람이 불자 약간 추위가 느껴졌다. 현민과 나는 가지고 간 후드 점퍼를 입었다.


“응. 공연 끝났어. 어디? 스타벅스? 응 알았어. 우리가 찾아갈게.”


현민이 전화를 끊고, 우리 두 사람은 대학로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길을 걷다가 문득 손으로 현민이의 손을 잡았다. 어릴 때는 늘 그렇게 다녔으니까. 현민이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현민아.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미나네 할아버지 일? 누구한테 들었어?”


현민이는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머리에서 떠오른 걸 말했는데…….”


“그래? 정말 너한테는 여우의 혼령이 깃들어 있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예쁘고, 그런 것들이 다 눈에 보이고 그러는 걸까?”


현민이가 내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너는…….”


“그래, 알아. 나한테는 코끼리의 혼령이 깃들어 있겠지.”


현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넌 꼭 여우의 숲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나 같은 사람이랑은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 나 같은 코끼리는 그 숲에 들어가지 못하겠지? 꽃을 다 밟아 죽이고, 다람쥐도 무서워 도망갈 테고…….”


문득 현민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고, 내가 한 걸음 더 내딛자 연결된 우리의 두 팔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렇지 않아. 코끼리가 얼마나 온순하고 듬직한데. 그리고 강하고……. 그런 숲이 있다면, 넌 그 숲을 지켜주는 사람일 거야.”


“난 강하지 않아. 늘 남들 눈치 보면서 하루하루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그건 네가 네 힘을 모르니까, 믿지 않으니까 그렇겠지. 네가 좋아하는 거, 네가 하고 싶은 거, 네가 되고 싶은 거, 그런 것들을 믿지 않으니까 그래. 난 네가 좋아. 네가 코끼리라면, 난 그 등에 올라타고 어디든 가고 싶어. 코끼리가 앞을 막는 것들을 다 부숴줄 것 같거든.”


치.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현민이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동화 속에 나올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결국 내가 코끼리라는 말이네?”


“응. 듬직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까르르하고 웃었다. 아, 이건 어렸을 때 많이 봤던 웃음이다. 내가 갯벌에서 조개를 주워 현민이에게 던지면, 그녀는 돌고래처럼 비명을 지르며, 그러나 얼굴 한가득 웃음을 담고 그것을 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는 내가 조금 작지만, 확실히 내가 현민이보다는 듬직한 데가 있어서, 나는 어디를 가든 현민이를 여동생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때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아렸다. 그동안 현민이는 어떻게 지낸 것일까? 표정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고 지냈는데, 왜 나는 현민이가 외로울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줌마가 있다는 대학로 대로의 스타벅스로 가는 길,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래, 코끼리의 혼령이 내게 있다면 난 지금 코끼리로 변해서 이 여우를 등에 태우고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 뿌우,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앞을 가로막는 게 있으면 ‘어 요놈 봐라’하고 살짝궁 발을 올리기만 해도 겁을 먹고 도망가겠지. 그렇게 나는 여우와 함께 대학로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바람이 여우의 부드러운 털을 훑고 지나가는 어느 가을밤에.



(끝)


2024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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