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며 생긴 일
이사를 하면서 잔짐을 버릴 때마다 ‘이걸 왜 버려? 너 이렇게 살림하면 못 써, 두면 언젠가 다 쓸 일이 생길 텐데?!‘ 하며 핀잔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난 또 지지 않고 ‘쓰긴 뭘써, 쓰지도 못하고 일찍 죽었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부모가 죽어서도 꼭 이겨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못난 자식에게 이렇게 또 엄마의 3주기가 찾아온 것이다.
어느 정도 정돈이 됐다 싶으면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거나 신랑에게 전송했다. (신랑은 내가 뭣을 하든 대게는 다 좋다는 사람이고) 사람들의 하트를 받으면서도 채워지지 않은 그 무언가는 엄마의 응원이라는 것을 안다. 엄마의 육성을 꼭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그럴 때가 있다. 2월은 특히 그렇다.
맏이고 눈치 빠른 딸이라 결혼을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고 수시로 카톡을 주고받던 게 습관이 되어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것을 못하게 되었을 때 한동안 심한 우울증 같은 것을 겪었다. 딸에게 의존하는 엄마는 아마추어라고 성가셔하던 게 부메랑이 되어 나를 겨누었던 것이다. 엄마의 사사건건을 못마땅해하던 나는 엄마가 떠나시고 나서야 내게는 누가 프로고 누가 아마추어인지 혹은 누가 옳고 그른지 결정할 능력도 권한도 없다는 걸 뉘우쳤다.
어쨌든 나는 엄마를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가시밭 같은 시간을 피해 어쩌다 제주에 와서 좀 살만해졌고 지난주에는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당의 담이 낮아 주변 귤밭이 다 내 땅 같은 장점이 있다면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꼭 한 마디씩 말 붙이는 그런 정겨운? 점이 약간의 단점이 될 수도 있는 동네, 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도 이른 아침부터 개를 데리고 나와 산책시키시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마음씀씀이가 보통이 아닌 제법 괜찮은 (아직까지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이삿짐을 풀면서는 엄마를 많이 만났다. 의식 저 어딘가에 자리하던 궁상맞은 생활방식, 양말이 구멍 나면 그냥 버리지 않고 꿰매 신던 엄마를 한심해하던 건 누구였는지? 다른 한 짝이 멀쩡하다는 이유로 과감히 버리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지금 뭐라고 할까? 라디오에서는 정지영 씨가 ‘엄마에게 전화하실 수 있는 분들 오늘은 꼭 통화해 보셔요’ 란다. 엄마 없는 사람들 생각은 안 하나? 목소리는 머 저렇게 달달하대? 집 정리를 하다가 급 오열했다.
봉투에 돈을 넣어 생일선물이라고 주시면서 아픈 엄마 때문에 고생이 많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꾹꾹 눌러 적어주신 걸 액자에 담아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아 고이 두었다. 그게 엄마에게 받는 마지막 선물이 될 줄 몰랐던 나는 처음에는 이걸 지나치며 볼 때마다 대성통곡했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울보는 아니다. 이것조차도 여기에 둘까 아니면 저 자리가 좋을까? 생전의 엄마처럼 정리의 신이 되어 궁리하는 중. 허리 아프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시간은 정말 치유의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