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자유, 그게 뭐죠?
나에게 종교의 자유란 없었다. 일요일 아침 9시가 되면 보던 만화를 억지춘향 끄고 어린이 미사를 보러 성당에 나갔다. 그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 때가 되자 이번에는 황금 같은 주말 오후 7시 반 청년 미사에 나가야 했다. 혈기왕성하던 이십 대 청춘들이 부랴부랴 하던 데이트를 멈추고 또다시 억지춘향 모였다. 그러고 살았다.
자유민주주의국가인데 모태신앙 때문에 이런 불상사가 생겨났다며 종교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지만 엄마는 한술 더 떠 ‘결혼하면 배우자도 반드시 가톨릭 신자라야 우리 가족이 될 수 있다’ 고 하셨다. 나는 이건 그냥 저 위쪽 나라와 별반 다른 게 없다며 난리부르스를 쳤었다. 그런데 엄마가 죽고 이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관여하지 않지만 주말이면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하던 일을 멈추고 성경책을 챙겨 성당에 나간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심지어 제주에 와서는 악착같이 그이를 데리고 성당에 나가 성경공부를 시키고 한국의 가톨릭 신자로 만들어 냈다. 마법?과도 같은 이런 일련의 과정은 다음주면 떠나게 되는 구좌읍의 성당에서 일어났다!
일주동로에서 김녕성세기해변 표식을 따라가다 보면 좁은 도로에 김녕성당 표시가 작게 있고 골목 안 돌담 곁으로 홀리듯 들어가면 너른 들판에 우뚝 서 계신 예수님이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신 게 보인다. 흡사 브라질의 예수상 같지만, 그게 바로 구좌읍 소속 성당, 김녕 성당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지 않아도 이미 은총 충만하다. 당시 주임신부님의 도움으로 외국인 수녀님을 소개받아 영어교리로 수월하게 세례받았다. 아직도 첫 고백성사를 하고 울고 나온 그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다른 게 아니라 성당에 나가면 생전의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같이 미사 다니며 함께 불렀던 성가가 많아, 특히 엄마가 잘 부르시던 성가가 나오면 엄마의 목소리도 같이 나온다. 이러려고 엄마는 그토록 내 손을 잡고 성당에 함께 나가자고 했을까. 엄마와 성당에 오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포근한 기억으로 차디찬 오늘하루를 견뎠다. 이렇게 또 2월의 셋째 주가 찾아온 것이다. 가슴 시린 엄마의 3주기. 그러다 성당에 가면 엄마가 사랑의 송가를 불러주신다. 사랑하며 잘 살라고 내 옆에 앉아 계신다(고 믿는다).
사랑 없이는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