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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story Aug 18. 2022

주자(走者)

잿빛이 되어버린 하늘이 내린

어둠 사이로 비치는 가로등은

유독 그 밝기를 더한다

해진 운동화에 차오르는 묽고 탁한 물은

나의 답답함과 억울함의 크기만큼을 삼켰고

좁아지는 보폭은 나의 두려움을 상기시켰다          



나의 생각은 비겁한 것이라

드러내기 부끄러웠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만큼 나는 내달렸고

반사적으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 힘도 없이

불규칙해지는 숨을 마시고 또 내뱉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무책임한 것을 택할수록 나는 나에 가까워졌다

현실을 등지고 이상으로 향할수록

숨겨졌던 기운들은 꿈틀거렸고

가끔씩 웃을 수도 있었다

분명 내가 웃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 선택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고

뿌옇게 퍼지는 새벽빛에 눈을 뜰 때

부유물처럼 그 생각이 떠올랐다          



도망치는 것이

무책임한 것이

재단된 공간을 오가며 사는 삶을 벗어던지는 것이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이

비겁한 선택이 되지 않는 유일한 순간은

허락된 시간만큼 나만의 뜀박질을 하게 되는 때     



가로등은 여전히 나를 비추고

내 크기만큼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담고 있던 부끄러움을 온통 검게 물들여버린다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도록 완벽하고 말끔하게



어디로든 달아날 수 있다 여기는 마음은

언제나 비현실적인 공간에 머무르지만

빠르게 흐르는 그림자 뒤에 가빠오는 호흡은

꿈에서도 볼 수 없던 그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하나의 얼굴이 스쳐가고

하나의 이름이 지나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이의 그림자는

나의 그것을 한없이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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