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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y Kim Sep 15. 2016

부끄러움을 넘어서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제주에 내려와 사는 이유는, 필요할 때 언제든 조용히 숨어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108일간의 배낭여행을 통해 나 스스로가 가진 아픈 구석들을 직시할 수 있게 됐고 그렇게 얻은 결론 중 가장 중요한 건 '내겐 숨어있을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가진 상처들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행동들(교정을 필요로 하는)은 가족을 비롯한 외부인의 기대와 관습적 당위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병적 증상의 완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상처들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일단 그것들과 나를 철저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는 내게 딸 알맞은 환경이었다. 외국도 아닌 것이 외국에 있는 듯, 적당한 단절감을 주면서도 언제든 내가 자라 온 "서울”이라는 세상과 물리적/심리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데다, 그래도 나고 자란 나라인지라 외국보다는 생활하기에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멋진 자연 경관들과 여행작가/사진작가로서의 커리어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니, 이보다 좋을 순 없을 거란 생각도 든다. 


사실 엽서여행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떠난 여행을 무기한 중단한 이유는, 첫 여정을 통해 이런 방법으로는 나 자신을 소모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난 항상 내 자진을 큰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연약함과 아픔을 들키지 않으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였다. 분명 그렇게 짧고 강렬하게 발산되는 에너지는 여러가지 경험을 쌓는 데에는 도움이 됐으나,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꾸준히 성공의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데는 그리 적절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가진 에너지의 특징이고 사실은 꺼내기 굉장히 부끄러운 내 행동양식이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에 그래왔던 것 같다. 생각보다 큰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발산되며 뭔가 멋져보이는 일을 벌여 놓지만, 그걸 지속할 만한 심리적 뿌리(안정감의 깊이, 자존감의 크기일 수도 있고)가 깊지 않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고 주저앉게 되고, 그리고는 그 실패와 저 에너지 상태를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일을 벌이고, 그것이 다시 소모되고 바닥을 치고 나면, 또 다른 일을 벌이곤 했다. 그런 소모의 악순환은 결국 엽서여행이라는 프로젝트에 이르게 됐고, 다행히 조금은 철이 든 나는 그런 악순환과 부끄러움을 바로 볼 수 있게 된 터라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됐다.


물론 부모라는 사람들이 이런 심리상태를 만들어 준 원흉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들을 원망하는 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고 싶고, 느리지만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증오와 분노로 시작한 이 감정은 논리적 분석과 절제된 비판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나를 이전보다 더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렸을 적에 부모로부터 작은 실패들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심, 인내심과 자긍심 그리고 뿌리깊은 자존감을 키울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그러한 결핍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을 내가 용서하고, 나 자신을 내가 용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조금 더 수용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음 좋겠다. 지금은 조금 뒤로 물러서있지만, 다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정말 멋지고 톡톡 튀는 사람들을 내 주변에 꽉꽉 채울 수 있기를 바래본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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