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손님을 다시 끌어들이는 건, 커피의 맛이 아니라 기분 좋은 기억이다
얼마 전 멘토님과 함께 카페에 갔다. 멘토님은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이신데, 벨맨으로 시작해 평생을 호텔에서 일하셨고, 지금은 호텔과 테마파크를 운영하는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고 계신다. 스무살 되고 처음으로 잡은 직장의 사장님이시기도 하고. 내가 지금 알고 이해하는 고객서비스에 대한 모든 것들을 멘토님께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9월에 제주에 다시 내려온 후로, 자주 뵙고 이야기를 나눴다.
새해 첫날 저녁 10시쯤. 그날 일이 아주 바빴는지, 카운터 바로 뒤에서 돌아서서 트레이를 정리하던 직원은 실례합니다 하고 세 번을 부르니 그제야 대답을 한다. 여기까진 뭐, 그럴 수 있다. 정신없는 날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 직원이 멋쩍게 웃으며 돌아서서 주문을 받는다. 진이 빠진 표정이다. 죄송하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오늘 엄청 바쁘셨나 봐요? 하고 뼈 있는 말을 한마디 던졌다. 내가 기다린 이유를 넌지시 알려주면 아까 못 받았던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죄송하다는 말 대신, 그 직원은 점심을 7시에 먹었다는 대답을 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플랫 화이트와 캐모마일 차를 주문했다. 저녁을 먹고 온 터라, 빵은 주문하지 않았다.
이곳은 플랫 화이트를 손잡이가 없는 투명한 유리컵에 준다. 이곳뿐만 아니라, 플랫 화이트는 얇게 깔린 우유 거품을 감상하며 마실 수 있도록, 뜨거운 음료임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 서빙하는 게 보통이다. 물론 깊은 뜻이 숨어있기는 하지만, 잔이 뜨거워서 불편했던 점이 떠올랐다. 이곳은 얇은 유리잔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청했다. 손잡이가 있는 잔에 줄 수 있겠냐고. 플랫 화이트는 유리잔에 나가는 게 규정이라 할지라도, 머그잔으로 바꿔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직원은 그건 원래 그렇게 나가는 것이라며 말을 얼버무리며, 손잡이가 있는 잔으로 바꿔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잘 하지 못했다. 플랫 화이트가 무엇인지, 왜 유리잔에 서빙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면, 얼마든지 수긍했을 것이다. 규정 위반이라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든지, 음료 만드는 직원에게 따로 부탁해야 하는 일인데, 그 과정이 번거로워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그래요..? 하며 아쉬운 티를 내니, 같이 주문한 캐모마일 티라도 손잡이가 있는 잔에 주겠다고 했다. 차는 되는데 커피는 같은 잔에 못 주는 이유는 무엇인지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또, 냅킨이나 컵홀더같이 뜨거운 잔을 편하게 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물품을 챙겨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쯤에서 포기하고, 굳이 더 따져 묻지 않았다.
멘토님은 자리에 앉기 전에 같은 직원에게 핸드폰 충전을 요청하셨다. 아직은 대중적이지 않은 Type-C단자를 쓰는 핸드폰이라 젠더도 같이 맡겼다. 카페를 나서며 핸드폰을 받았는데, 충전히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핸드폰을 건네준 건 아까와는 다른 직원이었다. 그러나 직원은 아 예.. 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마치 자기가 꽂아놓은 것도 아닌데 잘못을 뒤집어쓴 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받은 직원이나, 핸드폰을 건네 준 직원이나, 한 번이라도 더 확인했다면 이런 실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바쁜 날 마감을 앞둔 시간이라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사소한 두 가지 사건을 두 명의 직원에게 연달아 겪으면서 그곳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빵도 괜찮고 커피도 잘 만들지만, 자주 가지는 않을 것 같다.
"Grey-Zone을 커버하라"
전쟁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투를 할 때, 가장 뚫리기 쉬운 곳은 두 부대의 구역이 맞닿는 경계선이라고 한다. ‘그곳은 저쪽이 맡아주겠지..’하면서 애매한 지역에 대한 방어를 서로 미루기가 아주 쉽기 때문인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은 한국군과 미군 사이의 경계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고 한다. 어쩌면 한 팀으로 뭉쳐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선에서 뛰다 보면 내가 해도 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 업무는 아닌 일들. 혹은 내가 맡기에도, 다른 업무를 맡은 동료에게 토스하기에도 애매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누군가는 그 애매한 회색 지역을 커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애매해서 나서지 않고, 처리해두지 않으면 결국 그곳에서 문제가 생긴다. 내게 주문을 받은 직원은 음료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문을 받은 사람이니, 음료 담당 직원에게 주문을 전달하며 부탁할 수는 있다. 그런 그에게 나서기에 애매한 미션이 주어졌고, 그는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업무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야 하는 것, 내가 해도 되는 것, 내가 해도 되지만 허락 없이 했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애매한 것 그리고 내 직급에서 할 수 없는 것. 서비스업은 특히 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애매한 일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무조건 규정대로만 밀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좋은 서비스맨은, 고객을 위해 회색 지대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을 위해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내부적 합의가 깔려있어야만 한다. 앞접시 하나 더 주는 것에도 허락이 필요하고, 허락 없이 주었을 때 책임이 따른다면 문제가 생겨도 모두들 망설이며 쳐다만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비스의 퀄리티는 개개인의 업무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선 조치 후 보고'가 합의된 조직인지, 아닌지에 달렸다. 어떤 클레임이 발생했을 때, 처리 시간이 늦어지는 만큼 고객의 불쾌도는 올라간다. 관리자의 승인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의 범위를 넓혀 두면, 현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결국 고객과의 접점에 서 있는 직원에 대한 신뢰다. 관리자가 직원조차 신뢰하지 않는 조직에서, 좋은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년 전, 제주의 한 호텔의 프런트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호텔의 대표는 여행사를 경영하던 사람이었는데, 여행사 일이 꽤나 잘 돼서 호텔로 사업을 확장했다고 한다. 그는 실력 좋은 경영자이지만, 지배인으로서는 최악이었다. 그는 돈에 극도로 민감했다. 그는 서비스를 위해 돈을 조금 쓰더라도 고객의 마음을 얻으면, 그 고객이 돌아와 더 큰 수익을 안겨준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고객 리턴율이 낮고, 리턴 주기가 긴 패키지 여행사의 특성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어느 날 저녁, 방금 체크인한 손님으로부터 방에 수건이 없다는 전화를 받았다. 객실을 두 번 체크하기 때문에 그런 실수가 나오기는 힘들었지만, 일단 사과하고, 수건과 생수, 티백 등을 넉넉히 가져다 드렸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왔더니, 대표가 버럭 화를 내며 전화를 했다. 무슨 수건을 한가득 가져다주냐고, 그건 돈 아니냐고 고함을 쳤다. 물론 대표의 말을 따박따박 지적하며 따졌지만 그 후로, 내 서비스가 매우 소극적으로 변한 건 사실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자를 테면 자르시든가'하며 들이받는 성격인데도, 괜한 싸움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카페에서의 일도 그런 배경에서 발생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유리컵에 서빙하는 것이 규정이고, 오너가 규정에 민감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다만, 뜨거운 잔에 대한 불만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것을 서비스에 반영하지 않은 건 분명한 실수다. 사실, 빵을 주로 파는데 간단하게 음료도 제공하는 동네 빵집였다면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을 거다. 그러나, 인테리어와 유니폼, 빵의 종류와 가격까지 호텔급 수준을 표방하는 매장에서 이런 큰 빈틈을 보인다는 점이 참 아쉬웠다. 결국 손님을 다시 끌어들이는 건, 커피의 맛이 아니라 기분 좋은 기억이니까.
소비자와 서비스 제공자가 만나는 접점은 아주 짧다. 이렇게 큰 아쉬움을 남긴 사건에서, 직원과의 대면은 딱 두 번이었다. 좋은 서비스를 받았던 사실은 무난한 기억이기에 금방 지워진다. 각각의 직원들이 담당한 방어선 사이에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공백이 있었고, 결국 그 빈틈이 뚫렸다. 참 운이 나쁘게도, 한 손님에게 두 번이나 연달아 실수가 터졌고 말이다. 회색 지역을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는 소통과 신뢰다. 네 일과 내 일을 칼같이 나누려다 보면 결국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의 팀으로 어우러지면, 자연스레 업무의 경계선은 사라진다. 물론 개개인의 노력과, 회사의 내부 방침이 어우러져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주문을 받은 직원과 음료를 만든 직원 간의 소통, 그리고 관리자와 직원들 간의 충분한 신뢰가 있었더라면, 기분 좋게 따뜻한 머그잔에 플랫 화이트를 마시고 다 충전된 휴대폰을 가지고 카페를 나서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