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 - 소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이 지겨웠다. 멍 때리며 TV를 보는 것도, 유행하는 게임을 하는 것도 지겨웠다. 설에 본가에 다녀온 이후로는 동네 슈퍼나 약국 말고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두 달이 넘게 집에서만 지내려니 세상 모든 일이 다 재미가 없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할 때만 해도 회사를 안 가는 게 신나서 깨춤이라도 출 것 같았는데, 회사가 가고 싶어 지고 구내식당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쉬기 위한 공간인 집이 업무 공간이 되는 것도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일하기는 더 싫고,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어찌나 힘이 센지 그녀의 모든 일상을 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고 말았다. 날이 따뜻해지고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회사 근처 벚꽃 산책로로 책을 한 권 들고 혼자만의 점심시간을 즐기려던 아주 소박한 목표도, 재택근무와 산책로 폐쇄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현실 속 그녀의 대체 목표는 그녀의 작은 거실 건너편에 보이는 맞은편 건물 옥상에 애처롭게 꽃을 피운 나무를 가끔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집에도 못 가고 밤낮없이 일하는 의료인들이 있어서 그녀는 SNS나 메신저로라도 지겹다거나 답답하다는 말을 하기가 미안했다. 그중의 한 사람이 그녀의 엄마여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간호사로 일하는 그녀의 엄마는 몇 번을 통화해도 엄마 병원은 괜찮다고, 바쁘지만 엄마는 별 일 없다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해서 그녀는 괜히 미안하고 할 말이 없었다. 엄마도 보고 싶고, 보고 싶어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외롭게 집 안에 갇힌 것 같아서 그녀는 괜히 우울해졌다.
고요한 집에서는 우울해지기가 쉬웠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TV 예능 프로를 작은 소리로 계속 켜놓으며 사람 소리를 듣기도 했고, 좋아하는 음악 리스트를 3시간이고 4시간이고 틀어놓기도 했다. 그래도 TV나 음악을 끄고 나면, 혼자 있는 조그만 방이 그렇게 크고 쓸쓸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고독이 찾아올 때면, 어김없이 윗집이나 옆집의 쿵쿵거리는 소리나 뭔가를 끄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흩어놓았다. 평소처럼 일하고 와서 곯아떨어졌으면 느끼지 못했을 주변 이웃들의 움직임이 느껴져 그녀는 기분이 이상했다.
제일 이상한 순간은 어느 날 점심시간 즈음에 일어났다. 그녀는 매일 오전 업무를 하고, 긴 점심시간을 혼자 가지는 동안 요가매트를 깔고 운동을 조금 한 후에 샤워를 했다. 그녀는 기분 좋게 샤워를 하기 위해 늘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씻는 습관이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난 날도 어김없이 흥얼거리며 씻은 뒤에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는데, 웅얼거리는 노랫소리가 그녀가 틀어둔 음악에 맞춰 들려왔다. 그녀가 사는 집 욕실이 옆 집 욕실과 붙어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흥이 잔뜩 오른 옆집 여자의 노랫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녀는 그나마 옆집 여자와 음악 취향이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욕실을 나왔다. 우연한 일이겠지 싶어 그녀는 재택근무 기간에 생긴 샤워 시간을 바꾸지 않았지만, 다음 날에는 그녀 대신 옆집 욕실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둘만의 규칙처럼 번갈아가며 선곡하는 욕실 이웃 DJ들은 기묘한 샤워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DJ들의 신비는 며칠 뒤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년 반 동안 같은 건물에 살면서도 얼굴을 모르는 옆집 여자가 궁금했지만, 그녀도 옆집 여자도 굳이 서로를 알려고 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마스크를 쓴 채 택배 상자를 찾으러 문 앞으로 한 걸음을 뗀 순간 그녀는 마주치고 말았다. 옆집 여자는 배달 음식을 받으러 나와 있었고, 두 여자는 마스크를 쓴 채 문 앞으로 한 발짝씩 내민 상태로 눈을 마주쳤다. 하필 그 날은 두 여자의 신나는 샤워시간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그녀는 어색하게 목례를 하고 택배 상자를 질질 끌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옆집은 조금 더 있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마주친 것은 눈뿐이었지만, 얼굴을 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기가 민망했다. 어제는 옆집 여자가 선곡을 했고, 오늘 샤워 시간은 그녀의 차례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결심한 듯 노래를 크게 틀고 욕실로 들어갔다. 선곡한 노래는 톰톰의 '타이밍'이었고, 옆집 여자가 가사를 들을 수 있도록 1절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물을 틀지 않았다.
하필 그날 그 자리에 내가 있었고
하필 그날 그 자리에 너도 있었지
어쩜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는데
나는 궁금해져 우연일까 음-
자꾸 마주치는 두 눈을 피하지 마
이건 우연이 아니야
내가 원하면 우린 운명이 될 거야
네 생각을 말해봐
딱 맞는 타이밍 타이밍
그대 Tell me
내게 한마디라도 말해줄 수 없나요
지금 이 타이밍 타이밍
그대 Waiting
Curious about you
그대 망설이면 내가 갈게요
옆집 여자 웃음소리가 15cm의 욕실 벽을 건너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자 그녀도 흥얼거리며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받아온 택배 상자를 열자, 그녀가 화훼 농가에 주문한 꽃들이 신문지에 싸인 채로 잔뜩 나왔다. 꽃집이 아니라 농가에 주문을 한 것은 그녀도 처음이라, 이렇게 많은 양을 주문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집에서 봄을 느끼기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가지를 자르고 가시를 다듬어 화병에 꽃을 꽂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진 가장 큰 화병을 꺼냈음에도 금방 꽃이 가득 찼고, 아직도 신문지 안에는 꽂지 못한 꽃들이 잔뜩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화병에 담지 못할 꽃들을 마저 손질하더니 서랍에서 종이끈을 꺼내와 꽃다발을 만들어 묶고, 신문지로 꽃다발 둘레를 꼭 감쌌다. 그리고 메모지에 이렇게 썼다.
“꽃구경을 못 가서, 꽃을 좀 시켰는데 많아서요. 다른 뜻은 없어요. 오해 마시길. - 1602호"
그리고 열심히 만든 꽃다발을 들고 1601호 문 앞 복도에 슬쩍 내려놓고, 메모지를 그 위에 붙였다. 그리고는 괜히 긴장이 되어 심호흡을 하고, 1601호 문을 똑똑 두드리고 얼른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갔다.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괜히 긴장이 되었지만, 팀장님 전화가 와서 책상 앞에 가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몸은 집에 있지만 정신은 사무실에 있는 듯한 오후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여섯 시가 되어 그녀의 작은 거실로 비추는 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기지개를 펴고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작게 ‘퇴근’이라고 읊조리고 있는데, 그녀의 집 문을 누군가 살짝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옆집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빼꼼 문을 열고 밖을 살펴봤는데, 그녀 집 문고리에 작은 쇼핑백 하나가 있었다. 쇼핑백을 문고리에서 꺼내 집으로 들어오자, 갓 구운 빵 냄새가 작은 거실에 퍼졌다. 그 안에는 따뜻한 스콘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작은 메모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도 좀 많이 구워서요. 오늘 밤에는 슈퍼 핑크문이 뜬대요. 이현석의 ‘자기 전에 들어요.’라는 노래를 들으며 보시길 추천드려요. 저도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 마시길. - 1601호”
그녀는 오랜만에 소리 내서 웃었다. 그리고 이 괘씸한 바이러스가 모두 지나고 나면, 옆집 여자의 마스크 아래 얼굴까지 보고야 말리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