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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Mar 13. 2020

두고 온 가방

첫 번째 엽편소설

그녀는 두고 온 가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호텔에 들어와 혼자가 된 이제야 생각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가 되기 위해 유명하지도 않은 이 도시를 찾아 버스를 탔다. 들리는 말도, 보이는 풍경도,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생경했다. 모든 것이 낯선데, 이상하게 그녀의 마음은 편해졌다. 그녀가 속한 세상에서 요구하는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된 기분이었다. 이 장소도 어떤 이에게는 반복되는 삶의 현장이겠지만, 적어도 그녀에겐 완전히 새로운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까지 두 손으로 꼭 쥐고 온 가방끈을 놓았다. 그리고 이내 가방끈에 짓눌려 온 어깨의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가방을 벗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 밖으로 펼쳐진 야트막한 푸른 언덕들이 계속 새로 나타나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는, 버스를 울리던 엔진이 멈춘 뒤였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우는 손길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타지에서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이 급해져 내린 그녀는, 기사가 꺼내준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작은 정류장을 나섰다. 들판 사이로 펼쳐진 좁은 포장도로에서 그녀는 구글맵을 켜고 걷기 시작했다. 20m쯤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타고 왔던 버스가 그녀를 지나쳐 갔다. 불현 듯 그녀는 내내 꼭 쥐고 왔던 가방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방끈과 함께 사라진 가방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어디로 가야할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버스 기사 연락처는커녕 이 곳에서 가방을 되찾으려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조차 그녀는 몰랐다. 그 순간 그녀와 연결된 것은 직접 예약한 호텔 뿐이었다. 멈춰있던 그녀는 트렁크를 씩씩하게 끌고 호텔로 와, 체크인을 하고서야 가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그녀는 호텔에 비치된 메모지에 잃어버린 물건들을 적기 시작했다. 지갑, 여행안내서, 여권. 적어놓고 보니 그나마 스마트폰은 손에 꼭 쥐고 자느라 그 목록에서 겨우 빠졌다. 그녀가 스스로 두고 온 가방인데, 그 안의 물건은 잃어버린 것이라니. 완전히 혼자가 되려고 여기까지 달려와서 잃어버린 물건을 생각하는 스스로가 허탈해서 그녀는 웃었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던 프론트의 할아버지에게 손짓을 동원해 가방에 대해 설명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메모지 아래 선을 긋고, ‘내가 얻은 것들’이라고 적었다. 그녀는 그 아래 쓸 말을 찾지 못했다. 잠시 앉아있던 그녀는, “그렇게 죽어라 일하더니, 이렇게 있는 건 업무출장이지 여행이 아니지!”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외투를 챙겨 나갔다.


그 마을은 그녀가 무엇을 잃었건, 거지이건, 혼자이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풀어 키우는 소와 개 몇 마리가 멀리에 보였다. 키가 큰 나무들이 마을의 길을 따라서 서 있었고, 아래로 펼쳐진 포도밭을 인식하자마자 새콤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포도밭 사이로는 모자를 쓴 사람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거기까지 걸어가려던 그녀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망설였다. 어차피 서로 대화도 어렵겠지만, 노력조차 하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산책보다는 멀리서 관망하는 일에 가까운 행위를 마친 그녀는 곧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잃어버린 물건을 적은 메모지를 보자 그녀는 머리가 아파왔다. 트렁크를 열어 남은 현금을 계산하고, 여권은 돌아가는 길에 발급받기 위해 경로와 시간을 계산했다. 그러고 나니 ‘내가 얻은 것들’이라고 적힌 메모지 때문에 부아가 치밀었다. 메모지를 구겨버려야지, 그녀가 생각하자마자 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로비의 할아버지가 타국의 악센트가 강한 영어로 저녁을 먹겠냐고 물었다. 누가 써준 것인지, 메모지에 영어로 지금 저녁을 먹지 않으면 문을 여는 식당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5분 후에 내려가겠다고 다섯 손가락을 동원해 말하고 할아버지를 돌려보냈다.



두고 온 가방에 혼자 저녁을 먹을 것까지 생각하고 나니 서러운 기분이 된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로비로 내려갔다. 그녀를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손짓하며 호텔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와 할아버지는 마을을 향해 말없이 걸어갔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다가, ‘호텔 레스토랑이 이렇게 먼가’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불안감이 커져갈 때쯤 작은 레스토랑이 나왔다. 할아버지를 닮은 젊은 남자가 반갑게 나와 그녀를 맞더니, 세 명 자리가 세팅된 테이블로 그녀를 앉히고, 그녀 맞은 편에 할아버지를 앉혔다. 그녀가 당황하자, 젊은 남자가 유창한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객실에는 그녀 혼자라, 가족이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배도 고프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내오는 음식들을 보고, 그녀는 스스로의 결정에 찬사를 보냈다.


서투른 영어가 오가는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밖은 어두워지고 식탁 위에 켜진 조명이 더욱 밝게 느껴졌다. 남자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밖으로 나섰다. 밤에 보는 마을 풍경은 도착했을 때와 완전히 달랐다.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 어둡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시골길이 그녀는 처음이었다. 그녀에 비해 그는 익숙한 듯 손전등을 그녀의 발 앞으로 비췄다. 몇 걸음 걷다가, 그녀는 무심코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밤하늘에 감탄했다. 그는 싱긋 웃더니, 별을 더 잘 보고 싶냐고 물었다. 식사를 함께 한 뒤로 낯선 존재가 아니게 된 그에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을로 돌아가 어떤 건물 외벽의 계단을 함께 올랐다. 그녀가 다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그가 손전등을 끄자, 비어있는 줄 알았던 하늘에 존재감을 서로 과시하듯 빛나는 별들이 손에 잡힐 듯 했다. 그녀는 별을 눈에 담고 웃었고, 그는 그런 그녀를 보고 웃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머뭇거리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그녀에게, 그도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순간 어색해진 공기를 참지 못하고, 그녀는 낭만을 즐기려고 여기까지 와서는 두고 온 가방과 불안감 때문에 묶여있다가, 그 덕분에 원하던 것을 찾았다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는 그저 웃더니, “Don't worry, No problem."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왠지 간질거리는 기분이 되어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얻은 것들’이라고 쓴 메모지 아래에 ‘별’이라고 썼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한쪽 눈만 뜨고는 멍하니 생각했다. ‘왜 알람이 안울렸지, 이 이불은 뭐지, 여긴 왜이렇게 넓지?’ 그리고 두 눈을 모두 뜨고 커튼 사이로 가늘게 들어오는 빛을 보고 생각했다. ‘아, 나 지금 여행을 왔지.’ 일어나서 커튼을 걷고,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빛에 적응하느라 몇 번 깜빡이고 나니,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들판, 포도밭이 보였다. 그녀는 전날 밤의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 몽롱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보던 그의 눈빛을 떠올리자, 보는 이도 없는데 부끄러워진 그녀는 괜히 어제 써놓은 메모지를 집어들었다. 안타깝게도, 맨 위에는 여행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 잃어버린 물건들이 적혀있었기에 그녀는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쩐지 가난한 방랑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친절한 그가 있던 식당도 그녀가 가진 것으로 여행을 마치려면 더 이상 방문이 어려울 것 같았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에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싶지 않아진 그녀는, 아침산책에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마을에 온 것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곳으로 출발할 때, 모든 인간에 대한 정을 떼고 의욕없이 시골에 쳐박히려던 스스로를 떠올리자 그녀는 이 마을에서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매사 계획적이던 그녀가 충동적이고 낙관적으로만 상황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혼자 내면의 대화를 하며 걸었을 뿐인데, 발길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그녀는 어느 새 그와 올랐던 계단 앞에 서 있었다. 어제의 그가 떠올라 그녀는 미소지었다. 혹시 어제의 그가 이런 그녀를 볼까봐, 그녀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아는 길이 별로 없어, 그녀는 어제 내렸던 버스 정류장까지 걷기로 했다.


좁은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데, 빈 도로를 따라 그녀를 마주하고 거리를 좁히던 작은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조그만 차에서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그가 내렸다. 어색하게 인사하는 그녀에게 그는 웃으며 작은 빨간 크로스백을 건넸다. 밝은 아침의 빛 때문인지, 그가 내린 상황의 어색함 때문인지, 그가 내민 가방 때문인지, 그가 애써 감추려는 수줍은 꽃다발 때문인지 그녀는 오류가 난 기계처럼 잠시 멈춰있었다. 멍하니 가방을 받아든 그녀를 보고, 그가 웃더니 “You're welcome."이라 말문을 연다. 그녀는 가방을 보다가, 그를 다시 보고는 메모지 아래 추가할 말들을 생각한다. 두고왔던 가방, 별, 그리고 그의 이름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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