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cekim Aug 20. 2020

다섯 엄마와 다섯 개의 이름

열두 번째 엽편 소설

내 말이 잘 들리나요? 그래요. 내가 말하고 있어요. 꿈이냐고요? 아마 당신은 꿈이겠죠. 아쉽게도 당신은 내 엄마들 중 누구도 아니네요. 그래도 내 얘기를 듣고 내 엄마들에게 전해주면 안될까요? 부탁할게요. 조금 긴 얘기지만, 당신이 잠든 시간동안 들어주기엔 충분할 거예요. 괜찮다고요? 고마워요. 조금 길지만, 내 엄마들에 대해 말해줄게요.


첫 번째 엄마는 내게 이름을 주지 않았습니다. ‘니야아’ 혹은 ‘미야야’하고 불렀지만, 나와 같이 있던 형제들에게도 똑같이 불렀으니 그게 내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엄마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엄마였습니다. 나는 주로 어둡고 작은 틈에서 첫 번째 엄마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울었고, 겨우 몸을 굴려 그 틈에서 나왔을 때 두 번째 엄마를 만났습니다.


두 번째 엄마는 나에게 ‘나비’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길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애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네 번째 엄마에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두 번째 엄마에겐 나만 ‘나비’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두 번째 엄마는 첫 번째 엄마보다는 훨씬 컸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엄마가 어두운 틈에서 나온 나를 들어 올렸고, 나는 두 번째 엄마 손에 들려 마구 흔들리며 두 번째 집으로 가다가 토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어지럽다고 아무리 말해도 두 번째 엄마는 내가 내려달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첫날은 첫 번째 엄마가 보고 싶어서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두 번째 엄마는 그런 나를 내 몸만 한 손으로 토닥였고, 나는 겨우 잠들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작은 두 번째 엄마는 내게 자주 속삭이곤 했고, 간지러웠지만 늘 나와 함께 있어주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엄마는 곧 나를 익숙하게 안고 다녔고, 집에는 재밌는 게 많아서 나는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나는 두 번째 엄마가 좋아지기 시작했지만, 내가 엄마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 말을 못 해서 미안하네요. 두 번째 엄마와 헤어진 날, 엄마는 집에 없었습니다. 엄마가 없던 날, 작은 가방에 간식이 있길래 들어갔는데 커다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집에서 데리고 나왔고, 주변이 조용해서 가방에서 나왔더니 나는 더 이상 집이 아니었습니다.


가방에서 나왔을 때 두 번째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내게 밥을 주는 커다란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집에 가서 제일 좋아하는 책장 위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 안에서 보던 바깥과는 너무 다른 곳이었고, 무서운 것들이 많아서 나는 숨으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다가 나는 대장을 만났습니다. 나는 첫 번째 엄마 이후로 고양이 말을 쓰는 존재가 처음이라 반가웠지만, 대장은 대뜸 내게 발톱을 보여주며 날카로운 이로 나를 물었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마구 소리 질렀고, 대장은 태연하게 여기는 자기 구역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여기가 너희 집인지 몰랐다고 서투른 고양이 말로 말했죠. 대장은 빤히 나를 보더니 이제부터 대장이라고 부르라고 하곤 이제부터 집은 없으니 정신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무서운, 꼬질꼬질하고 꼬리가 없는 이상한 어른 고양이와 지냈습니다. 대장은 나를 고양이 말로 ‘꼬맹이’라고 불렀습니다. 집이 없었고, 더럽고, 항상 목마르고 배고픈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엄마를 만나던 날은 특히 배가 고픈 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너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왠지 수상한 곳까지 맛있는 냄새를 따라오고 말았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주변에 이상한 것들이 있었는데도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걸어 들어가 밥과 물을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쾅’ 소리가 나며 나는 갇혔고, 주변이 어두워졌습니다. 나는 너무 무섭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대장을 불렀지만, 대장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작게 들려왔습니다. 주변이 밝아지자 누군가 내 입을 벌리고, 앞발을 찔러 피를 뽑았습니다.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때 나에게 계속 말을 걸던 사람이 내 세 번째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 이상한 냄새가 나던 곳에서 세 번째 엄마는 나를 고양이들이 많은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긴 늘 시끄러웠어요. 대장처럼 강한 고양이는 없었지만, 우리는 늘 따뜻한 자리와 밖을 구경할 수 있는 자리를 두고 싸우곤 했습니다. 세 번째 엄마는 나를 ‘칠월아’하고 불렀습니다. 엄마가 나를 만난 날이 칠월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엄마는 나에게 자주 소리가 나는 기계를 들이밀었습니다. 나중에 그게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인간은 신기한 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 살아있는데 왜 이상한 기계에 내 얼굴이 있기를 바라는지 모를 일이죠. 내가 세 번째 엄마를 잃어버린 날은 엄마를 처음 만났던, 그 이상한 냄새가 나는 곳에 날 두고 간 날이었습니다. 엄마는 낯선 사람이랑 한참 얘기를 하다 거기 날 두고 갔습니다. 조그만 칸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고양이들이 들어있었는데, 엄마가 날 두고 갔을 때 그 애들이 말했습니다. 내가 곧 죽게 된다고요. 죽거나 너무너무 아프게 되거나. 나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나는 그때 대장을 생각했습니다. 대장은 내가 다른 애들보다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난 아직 대장 같은 어른은 아니지만 대장이었다면 여기서 꼭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나는 화장실도 안 가고 하염없이 엄마가 오는지 문을 보고 기다리다가, 누군가 문을 연 틈을 타 온 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문 뒤로 갇혀있는 애들이 나도 데려가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살고 싶었습니다. 세 번째 엄마가 미웠습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네 번째 엄마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대장에게 배운 대로 조용히 숨어다니기도 하고, 사람들이 사는 동네 근처에 숨어있다가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뭐든지 먹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나의 엄마가 될 수 있는지는 사람들을 아무리 오래 구경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네 번째 엄마를 만난 그 날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계속 계속 해가 뜨지 않고 비가 왔습니다. 나는 요리조리로 숨어봤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자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습니다. 나도 모르게 누구라도 부르고 싶어 점점 크게 울었어요. 세 번째 엄마도 불러보고, 대장도 불러보고, 두 번째 엄마도 불러보고, 기억이 잘 안나는 첫 번째 엄마를 부를 때쯤 나의 네 번째 엄마를 만났습니다. 내가 숨어있던 수풀 앞에 네 번째 엄마의 손이 나타났습니다. 깨끗한 물과 밥이 담긴 박스를 둔 엄마는 조금 떨어져서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내 엄마를 내가 정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내가 정한 엄마를 따라갔습니다. 엄마가 열어둔 문을 따라 들어가 보니,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 있어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냄새가 나는 것에 볼을 비벼보기도 하고, 신기한 빛이 나오는 물건도 툭툭 건드려 보았지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물건들이 더 신기해 보여서,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맹세하는데, 정말 나는 그러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때 그 위에 있던 물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내 꼬리도 같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제야 네 번째 엄마는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았는지 놀라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제 꼬맹이가 아니니까 꾹 참았습니다. 엄마는 내가 유리를 깨뜨리고 들어왔다고 ‘유리’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거기서 엄마가 내가 처음에 부숴버린 것들과 비슷한 걸 계속 만드는 걸 구경하고, 엄마 품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그곳을 ‘가게’라고 불렀고, 해가 뜨면 와서 해가 지면 갔습니다. 밤이 오면 엄마 몰래 엄마가 만든 것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조금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엄마랑 계속 있고 싶은데, 해가 없는 동안에는 엄마랑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슬펐습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엄마와 반짝이는 물건이 가득한 그곳이 가끔 다시 가보고 싶네요.


다섯 번째 엄마를 만난 것은, 네 번째 엄마의 가게에 반짝이는 물건이 점점 줄어들던 때였습니다. 네 번째 엄마는 내가 아무리 노래를 불러줘도 잘 웃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엄마는 내 엄마가 되기 전에도 네 번째 엄마의 반가운 사람이었습니다. 네 번째 엄마는 다섯 번째 엄마를 보고 웃었으니까요. 나는 처음엔 다섯 번째 엄마가 무서웠지만, 가끔 엄청나게 맛있는 걸 주기도 하고 엄마를 웃게 해 주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다섯 번째 엄마의 품에 마지막으로 날 안겨줬을 때, 네 번째 엄마는 울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늘 혼자 두고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어른 고양이었고, 네 번째 엄마와 사는 동안 엄마가 하는 사람 말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하는 말들을 다 기억할 수 있어요. 나도 사람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에게 말할 수가 없었죠. 난 유일하게 내가 선택했던 네 번째 엄마와 지냈던 시간이 너무너무 좋았으니까 울지 말라고, 어쩔 수 없이 고양이 말로 크게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네 번째 엄마가 내 말을 들어주면 좋겠어요. 어쨌든 나와 같이 살게 된 다섯 번째 엄마는 처음엔 네 번째 엄마처럼 나를 ‘유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나랑 점점 친해지고 장난도 치면서는 나를 ‘장꾸’라고 부르기도 했죠. 다섯 번째 엄마는 두 이름 다 나를 부를 때 썼습니다. 다섯 번째 엄마와 살게 된 집은 넓었고, 재밌어 보이는 물건에 올라가고 건드려도 혼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엄마는 내 말을 알아듣기도 했습니다. 내가 밥을 달라고 하는 말이나, 놀자고 하는 말도 알아들었습니다. 가끔 진짜로 고양이 말을 할 줄 아는 건지 궁금해서 대장이랑 있었던 일도 얘기해보고, 네 번째 엄마는 잘 지내는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네 번째 엄마가 보고 싶고, 대장도 보고 싶고, 그 전의 엄마들도 생각나서 나는 넓은 창을 바라보는 곳에서 시간을 자주 보냈습니다. 다섯 번째 엄마는 어른 고양이인 내가 할머니가 되고, 여기 고양이 별에 오기 전까지 나와 함께 살았습니다. 가끔 마지막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나는 ‘나비’였고, ‘꼬맹이’였고, ‘칠월이’였고, ‘유리’였고, ‘장꾸’였습니다. 고양이 별에 와보니 그래도 내가 이름이 가장 많은 편이더군요. 여기서 가장 기다리는 건 아마도 다섯 번째 엄마일 겁니다. 그리고 네 번째 엄마도요. 기다리고 있다가 엄마들이 오면 다 말해줄 거예요. 고양이 별 친구들 말로는 여기서 기다리다가 엄마를 만나면 서로 말이 통한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다섯 번째 엄마는 여전히 고양이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테지만요. 엄마들 이야기를 하니 더 보고 싶네요. 나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다니 고마워요. 네, 꼭 잘 적어서 나의 엄마들에게 전해주세요. 내 이름을 헷갈리지 않도록 엄마들에게 잘 전해주세요.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많이 보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성격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