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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Apr 05. 2021

봄꽃비

열여섯 번째 엽편 소설

그 애는 정말 이상한 애였다. 마치 내가 그 애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보통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고, 내가 그들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선 인지조차 못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 애는 날 처음 본 그 날부터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그 애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서 돌아섰다. 내가 몰래 보고 있는 걸 다 모른 척해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날 내가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저 바람처럼 내 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애만 조용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나와 눈을 마주쳐 미소 짓고 사라졌다. 그 애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애가 다음에 오면 내가 좀 더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도록, 나는 내 키가 조금 더 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내게 관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쳐가는 것을 심드렁하게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보다는 그들과 함께 나온 동물 친구들이 내게 훨씬 관심이 많았다. 나는 대신, 조금 부끄럽지만 주변 친구들에 비해 동물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은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게서 나는 향기가  그 친구들이 가까이 오지 않고는 못 버티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키가 아주 작았고, 드물게 나와 눈을 마주치는 큰 강아지도 있었지만 내 흥미를 끌기엔 너무 산만했다. 나는 그 애와 눈이 마주친 그 날 이후로, 내게 다가오는 동물 친구들에게 더욱 흥미를 잃고 말았다. 나는 그래도 그 날 나를 향해 웃었던 그 애를 생각하며 좀 더 키를 키우기 위해 열심히 팔 끝과 발끝을 까딱이며 늘렸다.


내 키가 조금 더 자라고, 내 손도 점점 커져서 멋진 초록빛 옷을 뽐내고 있을 때 그 애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 애는 처음 왔을 때처럼 혼자였고, 또 조용히 서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애가 여기 다시 온 건 분명히 나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고 확신했다. 나는 어쩐지 다급해져서 그 애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열심히 손을 뻗었다. 그새 훨씬 커진 내 손 아래로 생긴 그늘에 그 애가 들어왔고, 그날따라 강한 태양으로부터 가려주고픈 내 맘을 알았는지 그 애가 나를 바라보며 맑게 물빛처럼 웃었다. 머리 위로 그 애의 그런 웃음이 샘이라도 났는지 빛이 한층 뜨겁게 내렸다. 그 애는 내게 천천히 다가와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애는 한참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나와 같이 구경했다. 그 날만큼 내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흥미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 애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내게 심장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애가 내 떨림을 알았을 것이다. 사람들처럼 심장이 없는 게 다행이기도 했고, 그 애에게 이 설렘을 전할 수 없는 게 아쉽기도 했다.


그 날 이후로 거의 매일 그 애는 아예 조그만 접이식 의자를 배낭에 넣어와서는 내게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거나, 초콜릿을 먹으며 멍하니 사람 구경을 했다. 그 애의 눈길을 따라 발견한 아기, 비눗방울을 든 엄마, 자전거를 가르치는 아빠, 세상에 둘 뿐인 것 같은 연인들은 나만큼이나 행복해 보였다. 비가 오는 날이나, 해나 너무 강한 날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 애도 날 보러 올 수 없었다. 일주일이 넘게 하늘에서 물이 엄청나게 쏟아지던 때엔 나도 심술이 나서 괜히 대거리를 하다가 구름이 부리는 태풍에 맞아 팔이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하필이면 그 애를 처음 가려준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 내 키는 커지고, 내 옷은 점점 더 색이 진해졌다. 너무 목이 마를 정도로 더운 날이 계속될 때 그 애는 해가 질 때쯤 내 옆에 와서 찬란하게 물드는 노을을 구경하곤 했다. 내 키가 더 커지자 그 애가 저 멀리 공원 끝에서부터 나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과 내게서 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애와의 시간이 더 길어진 것 같아서 기뻤다.


점점 공원엔 사람이 많아졌고, 하늘엔 구름이 없어졌다. 짙은 초록이던 내 옷들은 점점 노랗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애도 점점 내 옆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가끔 친구들과 돗자리를 펴고 앉아 한참 수다를 떨거나 누워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그 애와 이렇게 오래, 자주 만나는 것이 반가워 손을 흔들 때마다 힘이 빠진 내 노란 옷이 조금씩 그 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애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내가 떨어뜨린 조각으로 손을 뻗어 잡기도 하고, 읽던 책에 끼워두기도 했다. 노란 조각들이 내게서 자꾸 떨어질수록 잘 가려뒀던 내 볼품없는 모습에 그 애가 실망할까 봐 두려웠지만, 여전히 그 애는 나를 똑바로 보고 웃어주었다. 나도 그 애를 마주 보고 웃었지만, 이젠 손을 뻗어도 그 애를 눈부시게 하는 햇살을 다 막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 애도 점점 찾아오지 않고, 나는 앙상한 몸으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내 주변 친구들은 벌써 옷을 다 털어버리고 긴 잠에 빠지고 있었다. 나도 점점 눈이 감겼지만, 긴 잠 끝에 그 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까 봐 끝까지 옷 조각 몇 개를 가지고 기다렸다. 다시 그 애가 오면 내 노란 조각들을 받으며 지어준 빛나는 미소를 봐야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 공원에서 제일 키가 큰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친구들이 긴 잠에 빠질 때까지 그 애를 기다렸다. 차가운 바람이 내 온몸을 스쳤지만 그 애를 보지 못한 내 마음이 가장 시렸다. 발끝이 언 땅과 함께 얼어버린 것이 느껴지고, 손끝도 얼어서 바람이 흔드는 대로 으스스한 소리를 냈다. 그 애를 너무 보고 싶은데, 바싹 마른 내 몸에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이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잠이 들고 말았다. 춥고 시리고, 고요한 잠이었다.


손끝이 간질간질해서 겨우 눈을 떴다. 나른하지만 다시 잠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잠이 든 건지, 나는 아직도 노란 옷을 털어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왠지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새롭게 몸을 단장하는 일에 집중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얼마나 잔 건지, 목이 너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운이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물을  마시고, 옆에 선 친구들처럼 따뜻한 햇빛에 몸을 말렸다. 가장 먼저 해와 만나는 내 머리 쪽부터 나는 내 드레스를 짓기 시작했다. 밝은 흰색처럼 보이지만, 다 지어 입고 나면 분홍빛이 감도는 아주 멋진 디자인의 한정판 드레스인데, 왠지 이번엔 이 공원에 같이 선 누구보다도 돋보이고 싶어서 공을 들였다. 드레스가 완성되자, 사람들이나 사람들이 데려온 강아지들이 자꾸만 나와 사진을 찍었다. 나는 애쓴 만큼 뿌듯하긴 했지만, 어딘가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최고의 드레스를 입은 나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지만, 금방 떠나갔고 여전히 그들을 관찰하는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애써 지은 옷에도 금방 시들해져서 모든 것이 지겨워졌다. 왜 이렇게 심술이 나고 모든 일이 재미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똑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 그만 편한 초록색 옷이나 꺼내 입을까 싶어 슬슬 몸을 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상하게 시선이 느껴져서 아래를 내려보다 눈이 마주쳤다. 보통 사람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나와 마주친 눈은 한참 동안이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 애를 한참이나 보고 있는데 그 애가 웃었다. 그 애가 웃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슬퍼지고 마음이 벅차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토닥이는 햇살에 눈물이 터져버렸다.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꼴사납게 울어버렸고, 고생해서 지은 옷들이 조금씩 떨어졌다. 그 애는 내가 뿌린 꽃비를 맞으며 여전히 내게 눈을 맞춰왔다. 그 애가 웃었고, 어쩐지 찬란하고 그리운 그 미소가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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