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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Feb 21. 2021

너의 체온

열다섯 번째 엽편 소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체온을 체크하는 기계나 사람이 있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녀는 체온을 잴 때마다 그 애 생각이 났다. 한 번도 입 밖에 그 애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늘 건물 입구마다 놓인 체온계를 보며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 애는 여기에도 들어갈 수 없겠구나, 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럴 때 내쉬는 한숨을 대개는 끝없는 체온 측정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한탄 정도로 사람들은 믿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한숨 속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끝자락은 언제나 그 애의 체온에 있었다.


그 애의 체온에 대해 처음으로 이상함을 느꼈던 날은 지금처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그게 처음으로 그 애와 닿은 날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애가 그저 더위를 좀 탄다고 생각해왔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그 애가 다르다고 느끼게 된 것은 전보다 그 애를 더 자세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자세하게 볼 수밖에 없을 만큼 그녀의 마음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낙엽이 지는 모양을 보며 그녀는 그 애와 오래도록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처음엔 시원하게만 느껴지던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차가움으로 변해 머플러를 챙겨 올걸, 하고 그녀가 후회하고 있었을 시점이었다. 그녀의 손끝과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그녀보다 먼저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그 애는 그런 그녀를 한참 지켜보더니 눈에 띄게 추워 보이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의 손에 닿은 그 애의 체온은 마치 뜨거운 손난로 같았다. 머쓱하게 웃는 그 애를 바라보며, 그녀는 그 애의 따뜻한 손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기초 체온이 높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녀의 상식 선에서, 기초대사량이 높거나 체질적으로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들은 기초 체온이 높았고, 겨울에도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곤 했다. 뜨거운 그 애의 체온을 처음으로 이상하게 느낀 날, 그녀의 기억 속의 그 애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 1년간 그녀가 아무리 첫사랑 필터를 끼운 듯 그 애의 모든 순간을 왜곡하였다고는 해도, 정말 추운 겨울에도 두꺼운 패딩을 껴입은 그 애를 본 기억이 없었다. 1년간 같은 학원을 다니다가 마침내 그 애와 손을 잡는 그 계절이 오기까지, 땀을 흘리며 남들처럼 손부채질을 하는 그 애의 모습도 본 기억이 없었다. 늘 여러 핑계로 정말 더운 여름날과 추운 겨울날 그 애는 사라지곤 했다.


처음 손을 잡은 그 날 이후, 날이 추워지고 아침의 하늘이 겨울의 회색빛을 나타내는 걸 볼 때마다 그녀는 이상하게 불안해졌다. 그 애와 잡은 손을 보면서도 정말 춥다고 느껴질 때에도 그 애의 난로 같은 손을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나온 계절처럼 패딩을 꺼내야 하는 시점이 오면 그 애가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했다. 그럴 때마다 크리스마스나 첫눈이 오는 날에 대한 얘기를 은근슬쩍 꺼내보는 그녀였지만, 그 애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어떤 계획에도 확답을 주지 않으며 빠져나갔다. 결국 학원에 오는 애들이 거의 다 패딩을 입는 계절이 오자, 학원에서 그 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문자를 보내도 답장은 뒤늦은 시간에야 미안하다는 말뿐이었고, 그녀에게 이유를 설명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 애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더 따져서 묻다가 그 애의 늦은 답장조차 받지 못할까 봐 애만 태웠고, 친구 집의 배관을 동파시킨 겨울이 끝나고 그 애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조금은 그 뜨거운 손에 끌리는 마음에 무감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꾹꾹 눌러 담은 마음과는 다르게, 그 애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흘러가버린 첫눈이나 크리스마스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제 보고 다시 오늘 얼굴을 보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그렇게 다시 그 애와 아무렇지 않게 학원이 끝나고 떡꼬치를 사 먹고, 손을 잡고 집에 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 애에게 주려고 방에 숨겨두고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열심히 떠서 완성했던 목도리를 주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날씨가 애석했고, 왜 내게 아무 말도 설명도 없이 그렇게 오래 사라질 수 있냐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그렇게 그리웠던 그 애의 따뜻한 손을 매일 잡으면서도 불안했고, 괴로웠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봄꽃이 올라오고 새싹이 올라오는 계절을 지나 춘추복과 하복을 혼용하는 시기가 되어서야 그 애에게 계절이 한참 지난 목도리를 꺼내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곧 그 애가 다시 사라질 폭염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자에서 두꺼운 실로 짜낸 목도리를 꺼낸 그 애의 표정은 복잡했고, 그녀는 준비했던 말을 한마디도 못한 채 울고만 있었다. 처음 손을 잡은 그 벤치에서, 두 사람은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 애는 그녀가 조금 진정될 때까지 조용히 손을 잡고 있다가, 나직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애는 그녀가 준 목도리 상자 안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찾아 읽고는 그녀가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침묵을 지켰다. 따뜻한 그 애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던 그녀는 울음을 그치더니 결국 ‘왜’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애는 늘 그렇듯 설명하지 못했다. 그 애도 울음을 삼키며 겨우 꺼낸 말은, ‘나는 남들하고 조금 달라.’라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손을 잡고 있다가, 그 애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미안해.’였다. 그리고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여름이 지난 후에,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교복을 입고 학원에 오가던 시절이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직장인이 된 그녀는 그 애에 대해서도 잊고 지냈다. 곳곳에 설치된 그 체온계들이 아니었다면 그 애에 대해 이렇게 많은 기억과 감정을 떠올릴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한참 그 애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는,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애에게 어떤 점이 남들과 달랐던 것인지, 어째서 이유조차 말해줄 수 없었던 것인지 묻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는 단지 다른 사람보다 따뜻한 손을 가졌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요즘 같은 때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그 따뜻한 손이 문득 그리울 뿐이었다. 언젠가 그 벤치에 가면 아무렇지 않게 빙그레 미소 짓는 그 애와 따스한 손이 그녀를 기다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소란하게 찾아왔다가 흐려졌다. 어쩌면 그 애도 그녀를 문득 떠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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