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기만하던 우리, 처음으로 다툰날?

호르몬이 문제야

by 조조

사귀는 동안 단 한 번의 트러블이 없었던 K와 나는 약 6개월이 지났을 즈음 갈등의 순간을 만났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일방적인 꼬장, 시비에 가까웠다.

이유는 생리 때문이다. 생리 전후로 급격히 예민해지는 때가 왕왕 있다. 이따금씩 그 정도가 심할 때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정도로 주체가 안된다. 그래서 나는 K와 사귀는 초반, 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라고.


다행히도 그와 만나는 동안 호르몬 파워는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터졌다.


별 다를 바 없던 일상이었다. 다만 그는 과도한 업무량에 치이고 있는 때고 나는 생리 전 증후군이 발동하는 때였다. 나는 그가 연락이 늦었다는 이유로 약간의 꼬장을 부리기 시작했다. 비꼬아서 사람 빡치게 하는 대회 같은 게 있었다면 나는 아마 상위권이었을 거다. 그러한 나의 못난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다 지났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는 그에게 나는 카톡을 보냈다.



“자기 오늘 많이 바쁜가 봐요”


- “정신없이 일 하고 있었어요. 자기는 집이에요?”

(나는 익일 시험을 위해 카페에서 공부하고 들어간 날이었다.)

“그럼 시간이 몇 신데 집이겠죠. 조금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 “잠깐 통화할래요”


나는 통화하자는 그의 카톡을 보란 듯이 ‘읽씹’ 했다. 물론, 읽씹 다음에는 뭔가 심각성을 깨닫고 전화가 오겠지.


어? 그런데 전화가 오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그냥 재운다고? 짜증 난 티를 낸 카톡을 보고도 전화를 걸지 않는다고? 나는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분명 먼저 잔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과 서운함에 뒤척였다.


다음 날 아침.


잠못이루던 새벽 동안 나의 호르몬은 더 극단적으로 흘렀다. 만약 K가 자존심을 부리고 오늘 연락을 안 한다거나 퉁명스럽게 나오면 나는 그와 헤어지는 시나리오까지 짜 두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 “자기야 시험 잘 봐요. 조금만 힘내고 끝나면 연락 주세요”

"오늘 볼 거예요? 바쁘잖아요"

- "난 보고 싶어요. 자긴 나 보기 싫어요?"


“바쁜데, 나 만날 시간은 되겠어요?”


- “알았어요. 시험 잘 보고 생각 바뀌면 연락 주세요”


알았어요 - 라니 나는 기가 차서 쏘아댔다.


“알았다는데 생각이 바뀌겠어요? 내가 지금 연애를 하는 건진 모르겠어요. 그렇게 바쁘면 연애 안 하는 게 맞지 않아요?”



평소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마치 그가 엄청난 실수라도 한 것처럼 서운함을 토로했다. k랑 연애해서 행복하다고 할 땐 언제고, 생리 전 증후군은 이렇게 무섭다.


작은 서운함을 10배로 키우고 어린애처럼 토라진다. 그런 거 딱 싫어하면서.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우리가 카톡으로는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 상처주기 전문인 나도, 경어체를 쓰니 말이 자동으로 순화돼 생각보다 더 쏘아대진 못했다. 분명 화를 내는데 화내는 것 같지 않은 그런 느낌이랄까.


아무튼 나는 평소와는 달리 다소 삐딱한 문자를 던져놓고 답을 기다렸다. 그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긴장됐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여기서 그는 어떻게 나올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화를 낼까? 아니면 같이 주저리주저리 톡으로 싸워댈까? 이겨먹으려도 발끈할까? 아니면 삐쳐서 깐깐하게 나오거나 토라질까? 일방적으로 시비 거는 지금 내 모습을 어떻게 받아 드릴까?


이내 합리화 시작.


상대방의 진면목은 다투는 순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이번 일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기로 했다. 과연 뭐라고 답이 올까 두근두근.


“띠릭 -!”

카톡이 울렸다. 미리보기로 슬쩍 확인.


- “나 이런 이야기 카톡으로 하고 싶지 않아요. 자기 마음 좀 풀리면 전화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 그동안 내가 만났던 남자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다. 보통은 카톡으로 끊임없이 대화하거나, 아님 바로 전화가 걸려와 풀어준다던가, 싸운다던가 그런 식이 었는데 내 마음부터 진정되고 연락을 주라니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자아를 각성하게 만드니,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지금 나의 삐딱함을 객관적으로, 차분하게 돌아보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솔직히 호르몬 탓이 컸음을 알아챘다. 비로소 진정됐다.


진정된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내가 서운함을 느꼈던 부분을 이야기했다. 그는 내 얘기를 듣더니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내가 미쳐 알지 못했던 그의 사정을 알게 됐다. 데이트를 취소하고 싶지 않아서 전날에도 밤을 새웠고, 그러면서도 그날 (시험을 마치고 온 날 위해) 꽃다발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던 그였다. 많이 민망해진 나는 되지도 않는 애교를 섞어가며 머쓱하게 사과했다. 그리곤 괜히 호르몬 핑계를 댔다.


우리는 그날 훈훈하게 데이트를 마쳤다. 상황은 잘 마무리됐고 호르몬의 부작용을 십분 경험한 순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의 매력을 하나 더 알게 됐다. 이런 식으로 갈등을 푸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잘 만날 수 있겠다. 어쩌면 이 연애가 생각보다 길게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생각.

더불어 나의 호르몬 꼬장의 본질을 직시했다. 어쩜 호르몬은 핑계일지 모른다. 상대가 점점 편해지고 나의 단점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에 드러내는 그저 못된 심보다. 나의 어떤 모습이라도 이해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사람들일수록 더 친절해야 하는데 (사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하려 들지 않은 나를, 다시금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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