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달팽이의 꿈

by 조성현

달팽이가 인간이 깔아둔 데크길을 횡단하고 있었다. 방부제 냄새가 진동하는 나뭇길에 코를 박고 기어가며, 달팽이는 불길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 길에서 죽음의 냄새가 나." 달팽이는 저 멀리 보이는 수풀을 향해 몸뚱이를 힘차게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달팽이는 인간의 발길을 피하기엔 너무 느렸고, 인간의 시선에 닿기에도 너무 작았다. 아직 달팽이는 살아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죽음 곁에 있었다.


달팽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땅을 보고 걷는 습관이 있었다. 아내와 걸을 때도 앞에 밟아서는 안되는 것들을 먼저 발견하곤 했다. 사실 그 습관은 아버지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걸을 때면 아버지는 "야, 앞에 똥있다. 똥!"이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걸을 때도 늘 사주경계를 놓치지 않던 아버지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 민감함은 때로는 고통이었지만, 많은 경우에 사랑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습관을 배웠고, 달팽이를 들어 수풀 속으로 살포시 던졌다.


4857C7CA-555A-4D12-B1E6-BE41C1E8AC85_1_105_c.jpeg?type=w1
5700F1DE-DAD4-4955-829E-5E267A4F7CA0_1_102_o.jpeg?type=w1
오동도의 데크길에서 달팽이를 만났다. 달팽이가 고른 곳은 언제 누가 와도 밟히기 좋은 위치였다.

나는 얼떨결에 여수까지 내려와 달팽이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아아, 인간이란 이렇게 후안무치한 생물인 것이다. 지들이 멋대로 데크길을 깔아두고선 밟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라는 꼴이라니.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동도 데크길을 성큼 성큼 걸었다. 내 발 밑에서 떨었을,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생물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해수욕장의 하늘은 변덕 그 자체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가, 해가 쨍하고 밝았다가, 비가 쏴 쏟아지다가, 해가 구름을 타고 슬며시 다가왔다. 아내와 나는 파라솔 밑에서 비치타올을 깔고 누워있었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폴라포를 하나 까먹고, 책을 읽다가, 아내의 배 위에 손을 얹고 태동을 느끼다가, 잠에 들었다. 바닷물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다섯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자는 동안에 발이 파라솔 그늘 밖으로 나와있었는지 발등이 벌겋게 데여있었다. 화끈거리는 태양의 얼큰함이 나쁘지 않았다.


3F4A8A83-4BFC-4DE8-BC58-3868AFED986A_1_105_c.jpeg?type=w1
182D3EEB-3935-4CA5-9BCF-F90F74BE4804_1_105_c.jpeg?type=w1
해변을 거닐다가, 누워있다가, 책 읽다가...
A89B2C1B-A600-40A5-8F5B-0AE81822FCB6_1_105_c.jpeg?type=w1
7AA46C53-94EA-448C-8B50-77F495399C04_1_105_c.jpeg?type=w1
CA096324-754C-4C8E-8EF9-9BCB9E324598_1_105_c.jpeg?type=w1
슈퍼에서 컵라면 한 그릇 먹고, 폴라포 먹고...
7DBD95D0-CEB2-4DDE-9532-4EAE5C9A9C54_1_105_c.jpeg?type=w1
ED5BD8AE-4F6C-44C9-A12D-AD2366F0556E_1_105_c.jpeg?type=w1
사진도 찍고 놀았다. 한 것들이라고는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특별했다.


여수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택시 기사님, 호텔 직원들, 해수욕장 관리인, 바다슈퍼 할머니까지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눴다.


여수엔 여유가 있었다. 그 은근한 파동은 서울 사람들은 없는 줄 모르고, 여수 사람들은 있는 줄 모르는 것이었다. 아주 은밀하게 삶에 스며있는 여유는 쉽사리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인사 한 마디에, 걸음 한 보폭에,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에 녹아있다.


서울에 돌아와서 여수를 생각했다. ktx로 세 시간 십 분이면 갈 수 있으니 그리 먼 곳도 아녔다. 아내와 안산 둘레길을 걸으며, "나중에 퇴직하면 여수에서 살아도 좋겠어. 서울은 너무 사람이 많으니까." 라고 말했다. 여수는 그정도로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수달이가 태어나면 같이 해수욕하러 가자고 했다. 이번에 묵었던 호텔에서 또 며칠 묵으며, 피자도 먹고 파스타도 먹고 수영도 하자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며, 나는 또 바닥을 살폈다. 거기엔 밟혀 죽은 달팽이가 있었다.


서울 달팽이는 인간이 깔아놓은 아스콘 길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서울 달팽이도 수풀로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뜨겁게 달궈진, 이상하리만큼 널찍한 돌덩이 위를 횡단하며, 조금만 더를 되뇌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의 길은 여수의 길보다 넓었고, 발바닥은 너무 많았다. 그날 서울은 너무 뜨거웠다.


B92A3F6E-59CA-451B-B294-0E729DB48F7B_1_105_c.jpeg?type=w1
3EB6CB87-94B6-4864-9159-C6D7CF01327E_1_105_c.jpeg?type=w1
오랜만의 물장구도 즐거웠고, 아무 소음도 간섭도 없는 독서도 즐겼다.
CE3CA1FA-630F-4E57-963A-BC2F66CD47E6_1_105_c.jpeg?type=w1
F8BEA703-3177-49CC-BF3D-71745AC4619E_1_105_c.jpeg?type=w1
23BFFD92-E2E7-42E6-90E1-B5FF523AF353_1_105_c.jpeg?type=w1
갓이 유명한 여수에서만 맛볼 수 있을 ‘갓페스토 고르곤졸라’를 먹었다. 조식도 매우 훌륭했다.
8F8E8E28-3277-4410-A905-5C6F08DEA35F_1_105_c.jpeg?type=w1
DFE4BB1E-07FF-48A0-A347-2ADBBD32985C_1_105_c.jpeg?type=w1
서울로 돌아가는 날, 로스터리 카페에 들러서 커피를 마셨다.
A9AC41CA-A881-40FF-8454-945DF71C3057_1_105_c.jpeg?type=w1
295E26D1-1ED7-47F3-AAD3-6547C5391600_1_105_c.jpeg?type=w1
카페 안에서 보이는 밥집. 곡성식당. 배가 고파졌다. 9천 원에 엄청 푸짐한 식사가 나왔다. 와, 전라도는 전라도네. 맛있게 배부르게 한 끼를 해결했다.
98064F54-C093-435D-B8D0-CB169336F4BE_1_105_c.jpeg?type=w1
10CA2C45-62FB-43F4-9101-99F0A6374BA6_1_105_c.jpeg?type=w1
교통 체증을 바퀴벌레보다 싫어하는 나로서는 ktx 여행이 다행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손님맞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