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물

알고보면 제일 중요한 맛의 정수

by 조성현

"평소 먹던 김치찌개 맛이 아닌데?" 아내가 말했다.

"그래?"

"뭔가 외국에서 사먹는 맛이야. 외국인이 끓인 김치찌개?"

걸렸구나! 뭐든 다 맛있다고 해주지만, 은근히 예리한 미각으로 맛의 변화나 특징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아내가 수없이 먹어온 김치찌개에 반기를 든 것이다.

"김칫국물이 안들어가서 그래." 나는 말했다.


냉장고에 한동안 묵혀있던 묵은지와 냉동실에 남아있던 자투리 고기를 털어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더랬다. 대단한 순서랄 것도 없고 특별한 재료랄 것도 없이 맛있을 수 밖에 없는 음식이라 맛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재료를 넣다보니 결정적인 게 빠졌음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김칫국물이었다.

김치찌개의 종류를 논할 때 중심에 서는 재료는 돼지고기, 참치, 꽁치, 햄 같은 단백질 거리다보니, 정작 김치는 너무 당연해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김치가 맛있어야 김치찌개가 맛있다. 적고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데 정작 먹을 때는 무시된다. 내가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사먹지 않는 이유다. 식당에서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김치를 홀대하기 마련이고 그만큼 맛도 없다. 홀대받는 것은 김치도 그러할진데 하물며 김칫국물은 오죽할까. 그깟 빨간 소금국물이 뭐 대단한 역할을 하겠느냐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김칫국물이야 말로 김치찌개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주연이다.

김칫국물의 부재를 감추려 고춧가루를 뿌리고, 소금 간을 더 하고, 액젓과 조미료로 분칠을 해보아도 김치찌개의 본질을 다 채우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아내의 매서운 미각 레이더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음이 포착되었고, 오늘의 김치찌개는 '외국인이 끓인 것 같은 김치찌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머쓱하게 다음에는 '엄마가 끓인 김치찌개'를 끓여주겠노라고 눙치고 넘어갔다.


김칫국물의 위력에 새삼스레 경탄했다. 다먹고 빈 김치통에 쓸쓸히 바닥을 채우는 김칫국물은 흔히 하수구 구멍으로 버려지곤 했다. 김치없이 김칫국물만 먹을 일은 없으니 말이다. 맛의 비밀을 다 쥐고있는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홀대해버렸던 지난 날들이 지나간다. 그깟 김칫국물가지고 무슨 이런 생각까지 하는가 싶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외면 받고 있는 또 다른 김칫국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쉬이 넘어갈 일도 아닌 것이다.

버려지는 것들을 재활용하고,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찾는 것은 외면받는 것들에 대한 동정일 뿐 아니라 세상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경제적 가치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김칫국물 정신이란, 감성으로 접근해도 좋고 이성으로 접근해도 좋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이라면 김치찌개를 마다할 이 없으니 더할나위가 없다.


BDF829B6-94B8-4EBE-83FF-59B8EA388E41_1_105_c.jpeg 김치찌개의 진한 국물은 의외로 만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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