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갑갑하거나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느껴지면 옥상 정원으로 올라간다. 데크로 바닥이 덮여 있고 가장자리 쪽에 화단이 만들어져 있는 곳이다.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뛰거나 몇 바퀴 걷기도 한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양측백나무는 여전히 푸르지만 배롱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채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그 옆 한 발짝 떨어진 곳의 흙바닥을 잠시 쳐다본다. 이상하면서 슬펐던 지난 일이 떠오른다.
그날 오후에도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더위는 잦아들지 않았고 햇살은 따가웠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마치 파르테논 신전처럼 장식인지 덮개인지 모호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그늘 아래 서 있었다. 전망이 탁 트인 곳도 있었지만 큰 도로가 바로 마주 보여서 차량 소음 때문에 시끄러웠고 그나마 조용한 자리를 찾은 곳이 거기였다. 오후 시간, 잠시 틈을 내서 그곳에 서면 핸드폰으로 영어 학습 앱을 켰다. 원어민의 대화에 집중하면서 바라보이는 아래에는 옆 건물이 있었다. 박공지붕에 송판 거푸집으로 마감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 새로 지은 건물답게 큰 곳은 크고 작은 곳은 작게 창호를 세련되게 만들었다. 색유리로 되어 있어서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소녀처럼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 건물의 문을 열고 나오더니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곧 사라졌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영어대사에 집중하느라 그냥 무심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누군가 옥상 정원의 문을 열고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 그 소녀였다. 아니, 가까이서 보니 이십 대쯤 돼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옥상에는 나 혼자 있었고 그녀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핸드폰을 내리면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서서 나처럼 아래 건물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이곳은 뭐 하는 곳이죠?”
옥상정원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라 그녀의 질문은 마치 ‘당신은 왜 당신이죠?’ 또는 ‘당신은 왜 내가 아니죠?’라는 물음처럼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그냥 옥상정원이죠. 휴식할 수 있는 공간. 왜 그러시나요?” 내가 대답했다.
“밑에서 보니까 옥상에 나무가 보이길래 궁금해서 와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자그마한 키에 초점 없이 고정된 큰 눈, 긴 생머리는 정돈되지 않아서 부스스하고 지저분했다. 그때였다. 내 휴대폰에서 영어 대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구나.” 그러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먼 곳을 응시하듯 다른 세상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은 그녀의 눈망울은 어두우면서도 탁했다. 나는 그녀를 피해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화단 경계석에 올라서서 까치발을 하고서 다시 그 건물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조사하고 의심하고 추론하며 자신의 확증을 믿고서 그걸 뒷받침할 무언가를 집요하게 찾는 수사관처럼. 그녀는 내가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쯤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혹은 음탕한 관음증 환자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녀는 자신만의 의혹을 밝혀내야만 했던 것이다.
훼방꾼에게 빼앗긴 나의 휴식시간을 접고 그냥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행동이 불안해서 바로 내려가지를 못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래를 한참 바라보던 그녀는 나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 “모두 미쳤어.” “그게 무슨 소리죠?” 그녀가 나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굳어버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 그녀는 순식간에 옥상정원의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치솟는 심장 박동과 분노롤 애써 누그러뜨려야 했다. 조금 있으니 차분해지는 나를 느꼈다. 그녀는 다만 아픈 사람이라는 생각, 어딘가 부서졌다는 인식이 연민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아직 한참 젊은 나이인데 무엇이 그토록 의심스럽고 또 무엇이 그렇게 불안했을까. 깊은 감정의 파도가 쉼없이 그녀의 뇌 속에 자리 잡은 신전의 대리석 돌기둥을 침식시키고 이윽고 쓰려 뜨려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은 계속 같은 시간을 가리키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고장 난 시계였던 것이다.
자신이 어딘가 고장 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좁은 울타리에 갇힌 동물들이 계속 같은 짓을 반복하는 ‘정형행동’처럼 무너지고 부서져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늪에 빠져버린 사람들. 어쩌다 만나게 되는 그들의 거친 언사와 모욕은 종종 나를 슬프게 한다.
자신이 내지른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해치는지도 모르는, 옥상에서 만난 그녀의 뒷모습은 내가 만난 어떤 이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조금씩 미쳐있고 미쳐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각자의 울타리, 저마다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끄러움도 없이 오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 어쩔 수없이 그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불교에서 인간의 근원적 고통 중에 원증회고라는 말이 있다. 싫어도 미워도 그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일본의 어느 승려가 한 마을의 사찰에 머물 때였다. 마을의 어느 처녀가 아이를 임신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처녀는 승려가 아이 아버지라고 둘러댔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이 사찰로 몰려가 그 스님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그 승려는 한 마디만 했다. “아, 그런가?” 아이가 태어나자 부모는 승려에게 그 아이를 맡기며 당신이 책임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승려는 이번에도 “아, 그런가?”라고 답하며 아이를 받았다. 승려는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를 동냥젖을 먹이며 정성껏 키웠다. 1년이 지나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처녀가 아이 아빠는 사실 이웃마을 청년이었음을 실토했다. 처녀의 부모는 사찰로 달려가 승려에게 사죄하며 아이를 돌려달라 요구했다. 승려는 아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아, 그런가?” 일본 임제종 중흥조로 추앙받는 ‘하쿠인 에카쿠’의 일화라고 한다. 억울한 일, 누군가로부터 오해를 사는 일이 벌어지면 떠올리며 위안을 받곤 하는 이야기다.
사람들에게 간혹 오해와 불신을 받을 때가 있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사람들의 왜곡된 평가를 원망하지도 말고 해명하려고 덧없이 애쓰지 말자. 일본 선승처럼 시간의 강물에 훌훌 털어버려야 하리. 언젠간 어떤 형식으로든 바로잡히는 날이 온다. 정월대보름 ‘액막이 연날리기’라는 옛 전통이 있다. 한 해 동안의 오욕, 불운과 상스러움을 연에 실어서 높이 날아 올렸다. 이윽고 연줄을 툭 끊어서 저멀리 멀리 날려버리는 것이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상징으로라도 이별을 하고 떠나보내야 한다. 미신이라 여기지만 그런 ‘상징적 폐기’ 의식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우리 뇌의 신비다. 삶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고통과 불운의 감정을 놓아주고 버려주는 일을 잘하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겨울이 오자 낙엽은 떨여졌다. 옥상 정원에 푸르던 잡초들도 갈색으로 앙상하게 말라버렸다. 나는 찬바람을 맞으며 데크를 몇 차례 천천히 돌고 있었다. 배롱나무를 지나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잎이 다 떨어졌는데 뭔가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려 있었다. 죽은 육신이 처마에 걸린 풍경처럼 바람에 흔들거렸다.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건 브이자 모양으로 벌어진 가지 사이에 목이 꼭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떡하다가 여기에 매달려 죽은 것일까? 수많은 숲과 들판의 나무를 놔두고 하필 이곳, 옥상 조그만 정원의 나무에 말이다. 마치 누가 죽은 새를 걸어놓은 것 같았다.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날아가던 늙은 새가 힘을 잃고 떨어지다가 우연히 가지에 걸린 것일까. 잠시 쉬어가기 위해 배롱나무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던 순간 가지에 목이 끼어 질식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바다 건너 먼 길을 일부러 찾아와서 죽어버린 것인가?
사무실로 내려가 여직원에게 청소용 집게를 달라고 했다. 그녀가 창고에서 집게를 꺼내주면서 물었다. “뭐 하시게요?” “옥상에 새가 한 마리 죽어 있어서 묻어주려고.” “어머, 어떡해...”
쇠 집게를 두 손으로 잡고 배롱나무 아래 땅을 팠다. 푸석한 마사토라서 구덩이는 쉽게 파졌다. 집게로 새의 몸통을 잡고 위로 밀어 올리면서 가지 사이에 끼어 있는 머리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찌르레기 종류인 것 같았다. 조그만 구덩이에 바싹 마른빨래처럼 가벼워진 그 새를 가만히 뉘이고 이불을 여미듯 흙을 덮어주었다. 땅에 주검을 묻는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일종의 조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매장 풍습은 죄와 업을 지으며 살다 떠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존엄과 자비, 용서와 화해다.
이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녔을 새의 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몇 달 전 그곳에서 만났던 여성이 생각났다. 나를 바라보던 멍한 눈동자, 나의 몸을 관통하여 저 너머 어딘가로 향하던 시선. 무언가를 집요하게 찾던 그녀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해맑은 웃음과 동경, 빛나던 눈동자와 찬란한 꿈, 그리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사랑. 그녀의 마음을 실타래처럼 헝클어서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들, 놓쳐버린 소중한 것들. 그녀가 애타게 찾아헤매던 것들. 그들이 심장에서 떨어져 이리저리 세상을 떠돌다가 가시나무새처럼 다시 옥상 정원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마음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무구하고 정결한 조각들이 부서져서 떠나버리면 우리는 서럽도록 외로워진다. 고독한 우리가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찬바람 부는 거리를 오래 방황하면, 떠났던 것들이 어느덧 다시 돌아온다.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 자리로. 일생에 한 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와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는 가시나무새처럼.
종이처럼 가벼운 그것을 조용히 내려서 묻자. 쓸쓸하고 서글프고 아린 가슴 한편에. 그렇게 우리는 자마다의 가슴속에 작은 무덤 하나씩 품고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녀가 미칠 듯 찾던 것,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것, 당신이 목놓아 울면서 떠나보낸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찬바람에 흔들리는 배롱나무 가지. 겨울은 또 이렇게 깊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