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누룽지로부터 시작되었다.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바랐건만 그건 착각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바탕 일전은 정원을 팽팽한 긴장으로 물들였건만 그들이 떠나고 나자 이 모두가 덧없는 꿈일 뿐임을 텅 빈 공간은 말없이 일러주었다. 저기 뽑혀 흩날리는 깃털은 분노가 남긴 흔적이다.
둘째 처형이 누룽지를 모았다가 아내에게 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누룽지는 소중한 간식거리였다. 군것질거리가 그다지 흔하지 않던 시절이고 한참 자라나던 시절이라 누룽지는 없어서 못 먹었다.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며 오랜만에 맛본 누룽지. 하지만 깨물자마자 이빨이 먼저 아파오고 탄수화물 섭취로 인한 비만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이전과 같은 맛이 아니었다. 달고 맛있는 여러 음식들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입맛으로 인해 누룽지는 이제 추억 속 서랍에 담아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그걸 반려견 은달이에게 주기로 했다.
시험 삼아 몇 개를 줘 보았다. 녀석은 침을 줄줄 흘리면서 참 맛깔스럽게 먹어치웠다. "오도독 오도독..." 아! 이 무슨 맛있는 소리란 말인가. 아내와 나는 은달이의 누룽지 먹는 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절로 "흐흐흐"하는 웃음소리가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은달이가 누룽지를 먹으며 내는 소리가 주는 쾌감은 가히 아름다웠다. 만약 세상의 맛있는 소리 경연대회라는 것이 있다면 녀석을 당장 출전시켜보고 싶었다. 유튜브에 공개한다면 요즘 유행하는 ASMR의 최고봉에 등극하여 백만뷰를 획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이럴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녹음해서 제과회사나 광고사에 팔아야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박장대소했다. 사고나 치고 잠만 자는 먹보 은달이에게 이런 재능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우리는 은달이에게 누룽지를 오롯이 양보했다. 아니 누룽지를 제공하고 먹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을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오도독 오도독'
은달이가 누룽지를 먹을 때마다 부스러기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먼저 참새들이 찾아와서 먹었다. 처음에는 멀찌감치 떨어진 것만 먹더니 이내 적응하여 은달이 바로 코앞까지 와서 먹었다. 겨울 먹잇감이 없어 굶주린 참새들이 불쌍하다며 아내는 누룽지 가루를 마당 여기저기에 뿌려주었다. 그것이 누룽지 패권을 둘러싼 각축전을 불러일으킬 줄 아내는 꿈에도 몰랐다.
참새들의 잔치가 벌어지더니 어느새 직박구리도 와서 먹고 멧비둘기까지 와서 먹었다. 여럿이 달려들어 먹어대는 품으로 봐서는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정신없이 몰입해서 쪼아댔다. 처음에는 다른 종들끼리 섞여서 서로 사이좋게 먹었다. 참새와 직박구리 비둘기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화롭게 먹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직박구리가 참새를 내쫓기 시작했다. 참새보다 크기가 서너 배나 되는 덩치의 직박구리는 날렵한 저고도 비행과 화려한 공중전으로 참새를 끝까지 쫓아가며 멀리 내쳤다.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길고 지루하게 반복되자 참새들은 먹이를 포기하고 하나 둘 떠나갔다. 이제 멧비둘기 한 쌍만 남았다. 크기는 직박구리와 비슷했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비둘기는 옆에 참새가 있건 직박구리가 있건 상관하지 않고 제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타입이었다. 토실하게 살이 찐 것은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는 후덕한 심성 덕분일 것이다. 비둘기는 빠른 목과 주둥이로 누룽지 부스러기를 착실하게 먹어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직박구리가 심사가 뒤틀렸는지 갑자기 녀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먹이를 쪼아대고 있는 비둘기를 향해 빠른 저고도 비행으로 겁주기 그리고 도망가는 비둘기 꽁무니 털 뽑기 등 날렵하면서 잔인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아주 집요하게 공격해댔다. 하지만 비둘기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느새 직박구리의 공격 패턴을 간파하고서는 공격 비행이 오면 날아서 도망가는 대신 땅 위에서 날개를 위로 펴고 춤추듯 한 바퀴를 빙그르 돌면서 맞섰다. 마치 치마 같은 전통복장을 입은 터키 남자가 뱅글뱅글 돌면서 추는 명상춤 '세마'처럼 말이다. ’아 이 무슨 신공이란 말인가...‘ 우리는 비둘기의 대응에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정말 새처럼 보였다.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하고 울긋불긋한 색상으로 암컷을 유혹하는 수컷 새처럼 한껏 치장을 한 채였다. 그리고 춤을 추는 것인지 위협하는 것인지, 힘을 과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다인 것인지. 눈알이 빠질 듯 크게 치켜떠서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기세 싸움을 벌이는 이러한 행위는 인도 암리차르와 파키스탄 라호르 사이 펀자브의 와가-아타리 국경 검문소에서 매일 국기 하강식을 치르는 양쪽 군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한다. 판문점에서 벌어지는 기세 싸움은 이에 비하면 양반이라 할 것이다.
인도-파키스탄 국경검문소나 판문점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팽팽한 긴장이 직박구리와 멧비둘기 사이에 흘렀다. 몇 차례 공격에도 후퇴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직박구리는 약이 바짝 오른 듯했다. 공격 후에 이제는 멀리 가지도 않고 두 뼘 정도 거리의 나뭇가지에 앉아서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비둘기도 먹이 먹는 것을 중단하고 직박구리를 노려보았다. 점차 긴장도는 높아졌고 직박구리는 진노를 참지 못해서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수시로 날개를 부들거리며 극도의 공격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한 피 말리는 상황이 1시간여 진행되었다. 공격을 당하는 와중에도 먹이를 부지런히 먹어대는 고래 심줄 같은 비둘기를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비둘기에게 소화제를 좀 줘야 하지 않을까." 먹다 체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대치상황은 극도의 긴장을 유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귀한 구경이었지만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현관을 나서서 "이제 그만"하고 말하며 손뼉을 크게 쳤다.
"짝"
그러자 직박구리와 비둘기 모두 놀라서 목전에 벌이던 분노와 광기를 접고 황급히 사라졌다. 1시간여 동안 우리는 마당 안에서 벌어지는 일대 격전을 실시간으로 현장에서 목격하고 나자 손에 땀이 차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직박구리는 최종적으로 패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비둘기는 직박구리에게 깃털이 뽑히는 고통도 감내하며 끝까지 버티면서 먹을 만큼 먹고 떠났다. 그렇다면 승자는 누구였나?
전쟁이 발발하자 입대를 앞둔 젊은 아버지가 어린 딸과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린 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폭격을 맞아 파괴된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보며 망연자실 눈물을 흘리던 여성은 다시 정착할 수 있을까. 남편과 아들을 조국에 두고 끝없는 피난행렬 속에 몸을 싣고 떠나는 이들은 다시 돌아와서 남겨둔 이들과 재회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양국 국민들의 서로 원치 않는 전쟁이 왜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누룽지 부스러기 같은 것들 때문에 그들은 패권을 장악하려고 나섰다. 분노가 분노를 낳고 서로가 서로를 도륙하는 전쟁을 이어갈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죄 없는 목숨들이 탐욕의 불덩이에 제물로 던져질 것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 그런가. 인류사가 어렵사리 지성의 문명을 쌓아 올렸건만 전쟁과 광기의 역사는 아직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분노와 욕망으로 눈먼 광인들에게 각성의 손뼉을 크게 쳐서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