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전등이 꺼졌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해지면서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일상의 공간이 갑자기 지옥의 공간으로 변했다. 극도의 공포가 엄습했다. 차분한 이성은 사라지고 평소 들리지 않던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귀에서 터질 듯 쿵쾅거렸다. 어디선가 외쳤다. “허리를 낮추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세요. 그리고 유도등을 따라가세요!”
지금, 세상이 온통 녹색이다. 앞산을 바라보니 갖가지 빛깔의 새순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이 일제히 잎을 피워내 언제 그랬냐는 듯 싱그러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누군가는 연둣빛 나뭇잎의 색상이 단풍보다 더 아름답다고, 그래서 신록의 푸르름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어린 새순이 돋아나는 봄의 숲과 산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우리는 왜 녹색의 숲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사람들이 녹색을 몇 초간 바라보기만 해도 혈관이 이완되고 긴장이 풀리면서 혈압과 스트레스가 완화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한다. 우리가 녹색을 사랑하고 즐기는 이유는 인간이 수백만 년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활해 왔던 터전이 바로 녹색의 숲이나 들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주말이면 너도나도 자연을 찾아 떠난다.
얼마 전 소방교육을 다녀왔다. 벚꽃 잎 날리는 계절, 재난에 대한 교육이라니.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따분한 교육이 될 뻔했지만 교육생 무리 속에서 반가운 지인들을 만나 함께 교육을 들을 수 있게 되어 덕분에 길게 느껴졌던 일주일이 금방 지나고 말았다.
소방시설 과목을 들을 때였다. 강사는 비상 유도등을 설명했다. 사람이 뛰어가는 모습의 픽토그램이 녹색으로 그려져 있는 작은 램프가 건물의 계단이나 복도에 설치되어 있다. 평소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유도등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은 평상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재나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실내는 어두워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 복도나 계단 아래쪽에 있는 비상 유도등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위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상 유도등은 왜 노란색이나 붉은색이 아니라 녹색일까? 어두울 때 우리 눈의 시세포가 가장 잘 식별할 수 있는 색깔은 녹색이기 때문이란다. 강사는 이것을 '푸르키녜 효과'라고 말했다. 푸르키녜는 체코의 생리학자로 이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콘크리트 베란다에 화분 하나를 놓아두었었다. 조그만 생명이 녹색으로 움을 틔우고 쑥쑥 자라나서 꽃을 피웠다. 바람에 날리는 잎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일주일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긴장으로 뭉쳐 있던 근육이 나도 모르게 풀어졌다. 일이 힘들고 관계에 시달리던 그때, 나는 베란다에 하나 둘 화분을 늘렸다. 삶의 쳇바퀴 속에서 나 자신이 소진되어 간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무력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녹색의 화분이 나를 이끌었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빛나는 유도등처럼.
10여 년 전 도시 근교의 시골 마을로 이사를 왔다. 화분을 기르다가 제법 큰 정원을 가꾸게 되었다. 나무와 꽃의 아름다움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지겹거나 따분해지지 않았다. 매일 바라봐도 그저 놀라움과 경탄을 안겨주었다. 지긋이 바라보면 마음이 평화롭고 안온해진다.
세상일이 힘들고 괴로울 때 우리는 저마다의 비상 유도등을 찾아서 떠난다. 하지만 찾아간 그곳이 생의 고통이 사라지는 파라다이스가 될 수는 없다.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면 도망가거나 탈출하는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한 번쯤은 내가 세상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고집이 세상을 거부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어쩌면 녹색 유도등은 이 세상 다른 곳이나 저세상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한 자락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