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그대 가슴에도 한 송이 꽃 피었나니

by 힉엣눙크

마주 앉은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친 들판같이 휑했다. 하지만 눈빛은 뭔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쥔 소년 소녀처럼 반짝거렸다. 처형은 냉장고에서 오미자주를 꺼내 컵에 따라 주었다. 분홍빛 색깔에 상큼한 맛과 향이 마실만 했다. 취기가 오르자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러다 문득 처형이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는 뒤에서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했어야지 하다가 막상 시공업자가 오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그러니까 나만 얘기하고. 자기 왜 그래?” 일순 두 부부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


지난주 토요일 시골에 집을 지어 들어간 처형댁에 집들이를 다녀왔다. 우리 집 정원에 있는 이런저런 꽃들을 종류별로 조금씩 캐내서 화분에 담아 가져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동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새로이 조성한 처형네 정원은 두 사람의 노력 덕분에 마치 몇 년 지난 정원처럼 제법 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하지만 5월 초순인데 아직 이렇다 할 꽃이 피어있지는 않았다. 나무는 물론이고 꽃들도 새로운 토양에 적응하느라 몸살을 앓고 있을 터였다.


주차장 초입에는 황토를 이용해서 돌담을 멋지게 쌓아 놓았고 마당 진입로는 판석을 이용해서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깔끔하게 만들어 놓았다. 솜씨에 놀라기도 했지만 단시간 이렇게 하기까지는 몸도 많이 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 열병에 걸린 듯 정원 만들기에 땀을 쏟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발적인 처형의 질문에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오미자주가 ‘꼴딱’하며 소리를 냈다.


동서는 정색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사실이잖아. 사람들이 일을 이따위로 했냐며 투덜댈 때는 언제고 그 사장이 오면 결국 얘기를 하는 사람은 나였잖아.” 처형도 지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보통 때 같으면 동서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먼저 꼬리를 내리고 조용해지곤 했는데 그날은 쉬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기가 서린 말투는 낯설었고 저러다가 된통 당하지 않을까 조바심이 들었다. 사실 처형이 한 성격 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당신이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그렇지. 사실 나도 얘길 했다구.” 동서의 맞대응이 만만치 않게 강하자 처형이 되레 주춤했다. 두 사람의 공방전을 지켜보던 우리 부부는 불편해졌다. 특히 나는 처형네 부부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당황스러웠다. 저러다가 그릇이 날아다니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집을 짓는 과정에서 맘고생 몸 고생으로 쌓인 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형 부부의 도돌이표 대화가 몇 차례 이어지고 험악해지려는 찰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아내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분위기가 누그러져서 그간의 좌충우돌 고생담과 에피소드가 다시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저녁 무렵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처형네가 행복하게 시골생활 잘 적응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몸을 쓰는 힘든 작업을 함께 하면 티격태격하기 마련이다. 입술이 지고 몸살이 날 정도로 소나기처럼 몰아치며 일을 하다 보면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둘은 아마도 감정의 골짜기를 건너고 있는 듯 보였다.


일주일 뒤, 아내가 처형을 다시 만났다. 우리가 다녀가고 난 뒤 며칠이 지난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향하던 동서가 큰소리를 치더란다.


“숙아, 예쁜 꽃이 피었어!”


바야흐로 우리가 준 화초가 뒤늦게 꽃을 피워 냈던 것이다. 처형이 밖으로 나가 보니 한 송이 꽃창포가 정원을 화사하게 밝혀주고 있더란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고 했다. 그동안의 피로가 가시고 서로를 향한 감정의 앙금도 어느새 풀어져 버리더란다.


마당에 애써 가꾼 식물이 꽃을 활짝 피워내면 대견하고 안쓰럽고 그리고 사랑스럽다. 게다가 생명이 새삼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남의 집 백만 송이 꽃보다 내 집에 핀 한 송이가 훨씬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비가 잦아지는 늦봄에 꽃들이 피어나듯 잡초들도 놀라운 기세로 돋아나고 있다. 요즘 이것저것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뺏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주말에는 마당의 잡초를 뽑아내듯 내 속에 돋아난 헛되고 거친 생각들도 캐내야겠다.


비바람 맞고 돌아와 쓸쓸할 때 서랍을 열듯 가슴 한 켠 고요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작은 꽃 한 송이 예쁘게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 욕망 가득한 바깥에 눈멀어 보지 못했을 뿐. 사막 같은 가슴에도 때가 되면 기적처럼 어느덧 피어난다. 그러면 활짝 웃으며 외치자.


“그대여, 한 송이 꽃 예쁘게 피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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