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토마토

by 힉엣눙크

주말 아침 식사는 점심을 겸해서 대개 샌드위치를 먹는다. 이전에는 샌드위치를 토스터기에 구워서 먹었는데 2년 전에 홈쇼핑에서 쑈 호스트가 손쉽게 만드는 빵틀 프라이팬을 보던 아내가 그걸 사서 지금껏 이용해 오고 있다. 실제 사용해 보니 홈쇼핑 그 남자가 강조한 것처럼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되지는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료 준비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게 생략된 장면은 마법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제법 요긴해서 계속 사용해 왔다.


요리를 시작해보자 우선 접어서 양면으로 구울 수 있는 빵틀 모양의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열을 가한다. 팬이 달궈지면 달걀을 깨어서 넣어 먼저 익히고 식빵을 놓고 뚜껑을 덮은 후 뒤집어서 그 위에 구운 햄과 과일, 달걀, 치즈를 얹은 후 다시 그 위에 식빵을 덮고 빵틀을 접어서 구우면 된다. 붕어빵처럼 뒤집어 가며 구우면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부른다. 다 익어서 꺼내면 내용물이 샌드위치로 밀봉된 뜨끈한 빵이 나온다.

정성껏 준비한 아내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별 맛은 없다. 소스를 넣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햄, 과일, 치즈 등 재료가 주는 맛이 정직하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심심하다. 원래 그렇다. 정직하면 맛이 없다.(이쯤 얘기하고 보니 막 나간 것 같다. 뒷일이 두렵다.)


여느 휴일 아침과 같이 오늘도 아내는 빵틀에 구운 샌드위치를 건넸다. 다른 생각에 빠진 채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던 나는 색다른 맛에 화들짝 놀랐다. 이전의 그 맛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무슨 소스를 넣었냐고 물었다. 아내는 소스 같은 건 넣지도 않았다 했다. 다만 텃밭에 익은 토마토를 사과 대신 넣었다고 했다. 내용물을 살펴보니 과연 토마토가 들어 있었다. 토마토의 즙액이 햄, 치즈와 녹아들면서 풍미를 더했던 것이다. 토마토는 다른 재료들의 고유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살려내고 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하는 요즘 말하는 ‘케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항상 샌드위치 마지막 꼭지는 남겨서 은달이에게 던져주곤 했는데 너무 맛있게 먹다 보니 그만 다 먹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침을 폭포처럼 흘리던 은달이는 오늘은 토마토가 빚어낸 그 진미를 맛볼 수 없었다. 측은한 마음에 은달이에게 말했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언젠가 새날이 올지니” 은달은 대답 대신 젤리처럼 굳은 침을 내 다리에 흥건히 닦고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토마토 국물이 떨어져 얼룩진 내 티셔츠를 핥았다. 마치 제 상처를 치유하듯 정성껏 핥아 주었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인 토마토는 16세기 무렵 우리나라에도 전해져서 재배되었지만 음식의 재료로는 잘 사용되지는 않았다. 우리 고유의 음식에 토마토가 들어가는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디저트 정도로 즐겼던 것 같다. 비타민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은 토마토를 설탕에 찍어 먹진 않지만 내 어릴 때만 해도 토마토는 채소가 아니라 ‘맛없는’ 과일로 여겨서 설탕 없이는 잘 먹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을 비롯한 지중해 나라들에서는 대부분의 요리에 토마토가 들어간다. 왜 그런지는 오늘 여실히 깨달았다.

동양화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한다. 수려한 산수는 여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서양화는 여백은 없지만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것이 있다. 바로 배경이다. 배경의 채도를 낮추거나 형태나 색상의 조화를 통해 주제를 부각시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에서 배경이 제 목소리를 내겠다고 잘 난 소리를 해댔다면 그 고요하고 신비로운 피렌체 귀부인의 미소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人間)은 한자로 ‘사람과의 사이’ 즉 관계를 뜻한다. 동양에서는 사람의 본질에 있어서 그 관계성을 중히 여겼다. 인간은 서로 어울려 살도록 운명 지워진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 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온갖 다양한 감정, 삶의 희로애락이 고통처럼 스며들 수밖에 없다.

크고 작은 일에 이기려고만 들고 무시하려 들고 충고하려 드는 세상 속에서, 드물지만 같이 있을 때 나를 더욱 나답도록, 나의 장점이 더욱 돋보이고 잘 드러나도록 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고추처럼 좁지도 않고, 오이처럼 거칠지도 않고 태양빛 아래 한껏 밝고 붉게 익어서 빵, 고기, 치즈 등 다른 재료들의 고유의 성질을 살려내고 북돋우고 어우러지게 하여 풍미를 더하는 그런 토마토 같은 사람과 조우한다면 고단한 삶 속에서 큰 위로가 될 것이다.


한참 모자라지만 나도 감히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내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어디서 끝날지 모를 인생길에서 만나게 되는 누군가에게... 아니면 적어도 상처는 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효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