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또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직원들과 함께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마주 앉은 동료가 비가 오면 마음이 울적해진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왜 비가 오면 사람들은 우수에 빠질까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리들은 종종 얘기한다.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걷고 싶다거나 그리운 사람과 분위기 좋은 카페에 찾아들어 차 한잔 나누고 싶다거나 파전에 동동주를 마시고 싶다 등등 무언가 특별한 일들을 떠올린다. 반면에 화창하게 맑은 날은 그냥 일하기 좋은 날이거나 야외에 놀러 가기 좋은 날이라고 단순하게 귀결 짓고 마는데 말이다.
왜 우리는 비만 오면 감상에 젖어 그런 특정한 행위들을 떠올리거나 뭔가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우리의 진화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고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바닷속을 마음껏 헤엄치고 유영하던 태곳적 조상의 흔적이 우리 몸속 어딘가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면 온 세상이 물로 뒤덮여서 마치 물속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면 물고기의 본능이 꿈틀거리며 깨어나서 사람의 감정선을 건드리기 때문에 우수에 빠져든다고 한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우리가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 옛날 바닷속을 경계 없이 헤엄치며 돌아다니던 물고기의 꿈이 되살아나는지 모른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속박을 벗어나 그리운 어딘가로 유유히 떠다니고 싶은 꿈 말이다. 하지만 터 잡고 살아가야만 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는 비를 바라보며 우울해지는 건 아닐까.
용왕의 막내딸이었던 인어공주처럼 오랜 옛날 우리의 조상은 뭍으로 올랐을 것이다. 바닷속보다 거동이 불편하고 중력을 더 많이 받아서 무거워진 몸을 지느러미 대신 다리로 지탱해야 했을 것이다. 걸을 때마다 칼로 찌르는 고통이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소통의 도구를 잃고 입만 뻐끔거리며 육지의 고단한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왜 물고기는 뭍으로 오르는 힘든 여정을 선택했을까?
마치 첫사랑 왕자를 찾아 결혼하려 했던 인어공주처럼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간직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혼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 언어로 이를 대신하면서 사람들의 소통은 불완전하여 쉽게 오해하고 불신하게 되었으리라.
결혼이라는 것이 나만의 집착, 편견 그리고 탐욕만 가지고서는 이뤄질 수 없듯 지금의 기후위기라는 ‘회색 코뿔소’는 인류가 자연이라는 왕자와 공존하고 번영하는 결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표상이 아닐까. 동화 속에서 물거품으로 변해버린 인어공주처럼 인류는 지구상에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야 할 텐데 말이다.
오후에 어느 나이 지긋한 손님이 우산을 접으며 사무실 자동문을 열고 들어섰다. 몸동작이 불편하고 행색은 초라했다. 파란 많았던 그만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빗속을 헤엄쳐서 우리 사무실로 찾아든 한 마리 물고기처럼 그는 입을 벌린 채 헐떡이며 자리에 앉았다. 창구에는 코로나가 창궐할 때 설치된 투명 칸막이가 있었다. 안 그래도 잘 들리지 않는 그의 청력에 칸막이는 어항의 유리 같은 장벽이었다. 직원도 입을 크게 벌려서 소리를 높였다. 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 마주 보며 입을 껌뻑였다.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처럼
떠나기 전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자신의 일을 봐준 직원에게 음료수병 하나를 건넸다. 그 직원이 특별한 혜택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 고마움에 그 ‘물고기 손님’은 어떻게든 속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 같은 사람에게서 오히려 음료수 선물을 전해 받은 직원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우산을 챙겨 들고 불안하게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찡해지면서 마음 한 귀퉁이에 온기가 돌았다. 그건 아마도 어려움에 처했지만 따스함과 여유를 잃지 않은 그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기사에서 읽었는데 이웃을 돕는 기부자들의 통계를 살펴보니 재정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금액을 떠나 남을 더 많이 돕는다는 것이었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듯, 여유가 있어야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조사 결과를 보니 그것도 하나의 편견일 수 있겠다 싶었다.
‘동병상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픔이나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돕고 싶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이 들게 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가진 것 없어도 나눔을 곧잘 실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폐지를 주워서 모은 돈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하는 사람들의 미담 사례를 우리는 해마다 접하곤 한다.
남이야 어찌 되었든,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극악스럽게 욕심부리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히지만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베풀고 나누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훨씬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고 또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쩔 수 없이 삶의 경쟁에 내몰려 제 앞가림하기도 힘들지만 돌아서면 마음 아파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나마 척박한 이 땅에 희망이 있고 아직은 살만한지도 모른다.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 마녀는 인어공주에게 칼을 건네며 왕자를 죽여야 인어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고. 하지만 인어공주는 제 목숨과 제 이익보다 사랑을 선택했다. 비록 이뤄지지 않은 사랑일지라도. 아니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이뤄진 것인지 모른다. 인어공주는 마녀의 칼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지금의 문명은 당장의 이익에 눈멀어서 한번 문 먹이를 절대 놓지 않으려는 불도그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확증편향으로 승자독식을 당연히 여기는 독선을 강화하고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닫고 생각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절벽을 향해 가는 건 아닌지 두렵다.
함께 꾸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다. 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함께 꿈꾼다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언덕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인어공주가 꿈꾸던 사랑과 세상 말이다.
팔월의 눈처럼 겨울에 찾아온 장마를 창문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든 생각이다.